‘오물 풍선’이 소환한 한·중·일의 분뇨 활용법
‘오줌 채소’는 조선의 물물교환 경제의 상징이다
‘풍선 전쟁’이다. ‘오물 풍선’ 대 ‘전단 풍선’. 최근 남북한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심리전이다. 냉전 시대의 전술인 ‘선전 풍선’이 한반도에서 부활한 것이다.
북한이 오물 풍선을 바람에 태워 남한으로 보냈다. 대략 1,000개는 넘는다고 한다. 한국 내 대북 단체의 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보복이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북한 인민의 표현의 자유”라고 억지 주장을 했다. 남한의 탈북민단체의 ‘전단 풍선’에 대한 대응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탈북민단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맞불을 당겼다. ‘자유북한운동연합’이 6일 새벽에 대북 전단 20만 장을 살포했다. 그 속에는 북한 체제 비판 메시지(20만 장)와 한국 드라마와 트로트·K-팝이 실린 휴대용 저장장치(USB) 5,000개가 들어 있었다. ‘풍선 전쟁’으로 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대북전단→대남풍선→대북 확성기 재개→북한의 제한적 도발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걱정스럽다.
‘오늘의 이슈’가 과거를 소환한 키워드는 ‘오물’이다. 그중에서도 오물 속에 든 분뇨(거름)다. 한 사회의 문화행태와 그 구성원의 사고방식,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도구는 수없이 많다. 인간 생활과 직결된 배설과 배설물 처리도 그중 하나다. 한·중·일은 농경 기반 사회였다. 인간의 배설물을 농사에 이용했다. 거름으로 재활용했다. 분뇨가 비옥한 땅을 만드는 자원이었다. 농업사회에서 똥의 가치는 똥이 밥이 되는 순환성(똥→퇴비→벼→모→쌀→밥→똥)에서 나온다. 이 순환은 자연에서 얻은 것을 자연으로 돌려줌으로써 새 생명과 에너지를 얻으려는 농경사회의 지혜다.
조선에선 ‘자원’(거름)을 낭비하면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재를 버리면 곤장 30대를, 똥을 버리면 곤장 50대(棄灰者 丈三十, 棄糞者 丈五十)를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각종 농서는 엄벌 이유는 설명하고 있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거름을 하늘(날씨), 땀(노력)과 함께 1년 농사를 결정하는 3대 요소로 규정하고 있다. “밥 한 사발은 줘도 한 삼태기 똥은 안 준다”라는 속담에서 거름의 가치는 좀 더 구체화한다. 속담은 하늘로부터 배운 지혜다. 그 지혜는 일상생활에 그대로 적용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조선시대에는 이웃집에 놀다가도 용변을 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는 게 상례였다. 불가피하게 이웃집에서 볼일을 봤다면 다음 날 이웃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용변을 보게 할 정도였다. 혹시라도 ‘똥 빚’을 받지 못하면 똥 대신 채소를 받았다. 이를 ‘오줌 채소’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남의 집 똥을 퍼가야 하는 경우, 메주콩을 사례하는 게 풍습이었다. 메주콩은 중요한 1년의 찬거리로, 똥의 가치는 된장과 비견될 정도였다. 이것은 평안도 지역의 풍습과 비교하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평안도 한 지역에서는 ‘똥의 재분배’를 통한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다. 당시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풍성한 두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많은 식솔과 가축을 거느린 고관대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지역 평민은 정월 초하룻날에 ‘똥 부잣집’의 두엄을 훔쳤다. 이것이 재해예방과 풍년을 기원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도둑맞은 부자는 결코 두엄 절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공동체의 공생을 위한 ‘비료 무상 지원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화생방 무기, ‘똥 대포’를 아시나요?
이것이 화장실을 비료공장으로 만든 근원이다. 우리 선조는 똥과 오줌을 구분하여 발효시켰다. 똥은 발효될 때 공기가 필요(호기발효)하다. 오줌은 굳이 공기가 필요하지 않다. 공기가 없어도 저절로 발효(혐기발효)된다. 특히 오줌에는 질소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질소는 식물 생장에 중요한 물질이다.
똥과 오줌을 구분함으로써 성분이 다른 자연 퇴비를 생산했다. 김광언이 쓴 《민속지》에 따르면 1910년대 수원에서 퇴비의 상품성과 재료에 따라 퇴비 한 섬에 10전에서 30전까지 팔렸다. 물론 오줌 퇴비냐 똥 퇴비냐에 따라 가격은 달라졌다. 어떻든 우리 조상은 경험을 통해 현대과학에 못지않은 통찰력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 못 할 대목도 없지 않다. 남녀의 분뇨까지도 구분했다. 이규태의 《한국인의 힘》에 따르면 작물에는 남자의 배설물을, 열매가 많이 열리고 뿌리가 뻗게 할 필요가 나무에는 여자의 분뇨를 썼다고 적고 있다.
분뇨가 퇴비를 만드는 데만 쓰인 건 아니다. 농사용 분뇨를 임진왜란 때 무기로 사용했다. 일명 ‘똥 대포’다. 피스톤을 장착한 대나무로 만든 원통에 금즙(金汁·똥을 거른 다음에 1년 동안 삭힌 똥물)을 넣고 발사했다. 주사기처럼 생긴 대포로 짐작된다. 일종의 생화학무기인 셈이다. 화기 무장이 어려웠던 의병이 주로 사용했다. 성벽을 오르다가 똥물 세례를 받은 일본군은 분뇨 악취로 정신이 혼미해져 성벽 오르기를 주저했다고 조선의 군사 정보를 다룬《민보의(民堡議)》와《풍천유향(風泉遺響)》등에 전한다.
중국도 똥과 오줌, 여뇨와 남뇨를 구분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우리보다는 월등하게 분뇨관리가 철저했다. 《열하일기》에는 “심지어 소 외양간이나 돼지우리까지 모두 법도 있게 깔끔하다”라면서 “두엄더미까지도 그림처럼 곱다” “중국 제일의 장관이 똥 덩어리에 있다”라고 찬사를 연발했다. 사업화된 중국의 분뇨처리를 부러워한 것이다.
박지원이 ‘중국 똥’을 최고 장관이라고 한 이유
중국은 도시의 분뇨를 전담으로 처리하는 직업이 따로 있었다. 그들을 경각공((傾脚工)이라고 했다. 경각공의 역사는 당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의 분뇨를 수거한 다음 도성 외곽의 농촌에다가 내다 팔았다. 이윤 추구가 목적이었다. 명·청 시대에 들어서는 도성 외곽에 ‘대변공장’ 즉 거름 공장이 생겨났다. 대변공장에서 펜푸(糞夫·분뇨 수거 노동자)가 옮긴 분뇨를 햇볕에 말려 비료로 만들었다. 분뇨처리사업은 사실상 공공사업이다. 그것을 개인이 독점했다. 그 수익은 엄청났다. 당연히 경쟁을 유발했다. 과당 경쟁을 막기 위한 장치가 생겨났다. 똥을 수거하는 사람이 각자의 구역을 구분했다. 그것을 펜다오(糞道)라고 했다. 한 구역의 펜다오 책임자를 펜다오주(糞道主)라고 했다. ‘구획정리’로 인해 일시적으로 산업 질서가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펜다오주는 이익의 확대를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분변 패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인 것이다. 이들의 경쟁을 부추긴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역에 따라 분뇨의 가치가 달랐다. 부자 지역의 분뇨는 비쌌다. 고수익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이권 다툼이 생겨났다. 물론 부작용을 낳았다. 청나라 말기에 삼벌(三閥)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일반 백성에게 횡포를 부리던 3대 민간업자를 일컫는다. 식수를 공급하는 물장수(水閥), 분뇨를 수거 업자(盆閥), 사망진단서를 발급해주는 음양사(喪閥)가 그들이다. 분뇨업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강희제 연간부터는 작업구역을 거래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분벌’의 횡포는 그치지 않았다. 어떻든 분뇨 수거 벌이는 짭짤했다. 펜다오에 소속되지 않은 채 생계유지를 위해 분뇨 수거하는 노동자도 늘어났다. 1920년 무렵 분뇨 수거 노동자가 4,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똥배가 오사카 자본을 만들었다
일본에서도 분뇨는 돈 되는 사업이었다. 분뇨 처리업의 종사자 중에 오사카 출신이 유난히 많았다. 이들이 벌어들인 돈은 ‘일본의 부엌’으로 불리는 오사카의 성장과 발전 기반이 됐다. “천하의 부는 오사카에 있고 오사카의 부는 똥배에서 나온다”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똥배’는 에도, 교토 등 대도시의 분뇨를 모아 농촌으로 옮기는 배를 말한다. 이를 카사이후네(葛西船)라고 불렀다.
천한 곳에서 가장 귀한 게 나오는 것일까? 에도시대의 분뇨 값은 한마디로 금값이었다. 10명의 점원을 둔 오사카 상점은 분뇨 대가로 한 번에 2~3푼의 금을 받았다. 어느 대가에서는 한해 30냥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금 1푼은 쌀로 환산하면 8홉~한 되 두 홉의 가치가 있었다. 역시 돈에서는 구린내를 느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분뇨 가격 차이가 나는 것일까. 신분이 높을수록 똥값이 높게 매겨졌다. 사무라이의 똥은 ‘명품 똥’으로 둔갑했다. 분뇨산업은 사무라이 계급의 생계 수단, 더 나아가 재산증식의 방편이 됐다. 똥 장수의 뒤를 봐주며 재미 보았다. ‘똥의 계급화’는 이익 극대화를 위한 사무라이와 상인 결탁의 소산이다.
남녀의 분뇨도 구분해서 값이 매겨졌다. 크리스토퍼 히버트의 《도시로 읽는 세계사》에 따르면 “여자 변소보다는 남자 변소의 값을 더 쳐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에도시대 때 인구가 약 100만 명 정도이고 이중 사무라이 계급이 50만 명에 이르렀다. 상도덕은 그 상업적 윤리를 주도하는 사람에서 나온다. 하지만 상도덕이라는 게 결국 상거래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본은 사무라이가 주도하는 사회였다. 사무라이는 농·상공인들의 지배 기초 위에 서 있었다. 똥값 인플레이션과 차별화된 똥값의 원인을 사무라이가 제공했는지도 모른다. 똥값에서도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자본주의 탐욕과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