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후견주의’를 경계한다

2024-08-07     김경은 칼럼

혹시 ‘국가의 자살’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한 한국 사람에겐 역시 낯선 용어일 것이다. 하지만 ‘자살한 국가’를 예로 들면 무슨 뜻인지 직감할 것이다.

‘남미의 유럽’으로 부러움을 사던 아르헨티나, ‘작은 베네치아’로 칭송받던 베네수엘라, ‘구세주의 나라’라는 자부심이 넘치던 엘살바도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라들이다. 대중영합적 국가정책으로 국가 위기를 맞은 나라다. 아르헨티나는 한 때 세계 경제 5대 강국이었다. 에비 페론(에바타)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르헨티나는 더 이상 없다. ‘남미의 최고 부자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 폭발적 인플레로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가치를 따지는 게 무의미해졌다. 중앙은행 폐지를 고려해야 할 지경이다. 그렇게 되면 자국 화폐, 아르헨티나 페소는 사라진다. 달러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국민 절반이 빈곤 상태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하나인 베네수엘라는 남미의 최대부국이었다. 부패와 사욕에 빠진 정치인은 ‘가난으로 가는 정책’을 양산했다. 살인적인 물가를 견디지 못한 국민의 국가 탈출이 이어지고 있다. 엘살바도르는 ‘구세주가 필요한’ 나라가 됐다. 해외 교민이 보내주는 돈으로 국가의 생계를 연명하고 있다. 중남미 3국은 절망과 고통에 빠져 있다. 이처럼 몰락한 ‘남미 현상’을 ‘국가의 자살’이라고 한다.

사진: '양보' 없는 국회

추락하는 데는 날개가 없는 것일까. 드라마가 따로 없다. 세상의 부러움을 사던 나라들이 한순간에 가난의 구렁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폭발적인 물가 상승이다. 정부는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세금으로 ‘아기날도(13달의 월급)’, ‘더블 보너스’ 등을 지급했다. 노동자는 당장 공짜 돈에 눈이 멀었다. 돈을 주는 페론주의자를 지지했다. 베네수엘라도 마찬가지다. ‘윤리적 경제’를 내세웠다. ‘윤리적 경제’란 베네수엘라의 가부장적 온정주의 정책이다. 정부는 가장이고 국민은 가족이다. 가장이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명분 아래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실시했다. 수당을 만들어 국민에게 살포했다. 사실상 정부 재정으로 국민의 지지를 산 것이다. 석유기업을 국유화했다. 석유를 판 돈으로 산업 활성화를 위해 재투자하지 않았다. 국유화한 기업은 정부 관리의 부패 온상이 됐다. 팽창한 화폐는 고스란히 인플레가 되어 돌아왔다. 재정적자는 눈송이 말리듯 늘어갔다. 악순환은 이어졌다. 문제는 유가마저 폭락했다. 국민에게 주던 혜택을 중단할 수 없다. 화폐를 계속 찍어냈다. 결국 ‘인플레이션 조세(lnflation tax)’가 낳은 부작용으로 나라는 점점 궁핍해졌다. 인플레 조세란 선심성 정책이 낳은 인플레로 국민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말한다. 엘살바도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인은 국민 환심 사기에 바빴다. 치솟는 물가에 분노한 국민에게 무책임한 장밋빛 선심을 썼다. 그 대가로 인기와 지지를 샀다. 재정이 바닥나면 그 책임을 외세에 돌렸다. 그렇게 해서 핑크 타이드(Pink Tide·중남미 국가의 좌파 정권)는 집권, 재집권, 장기 집권이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은 회복 불능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핑크 타이드 정책의 기저에는 정치적 후견주의(Clientism)다. ‘정치적 후견주의’는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에 대한 보은으로 어떤 자리를 마련해 주거나 다른 혜택을 제공하는 교환시스템을 말한다. 대중영합적 정책이 가장 큰 문제다. 민심을 얻기 위해 무분별한 선심성 복지, 최저임금의 과다한 인상, 지원금이나 격려금 지급 등이 대표적 사례다. 그것은 부패의 싹이 됐다. 금융 특혜, 인허가권, 독점적 정보는 부의 불균형을 확대했다. 특히 정권의 수혜자는 상상할 수도 없이 엄청난 ‘불평등의 대가(특권이나 특혜를 통해 얻는 큰 이득)’를 누렸다. 

실은 이억만 리 떨어진 중남미 국가 얘기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경계와 교훈을 삼아야 한다. 최근 이해하기 힘든 일이 반복되고 있다.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도토리 표 정국’이다. ‘야당 강행 처리→대통령 거부권 행사→재의결 표결→폐기’의 무한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민 지지를 얻기 위해 입법을 주도하는 야권은 더 국민의 귀에 솔깃한 법안을 내놓고 있다. 중남미 국가로부터 교훈을 얻는 게 아니라 그들을 따라가는 양상이다. 마치 정치적 후견주의에 전염된 듯하다.

‘25만원 지원법(민생회복지원금 특별조치법)’과 ‘노란봉투법’가 가장 대표적 사례다. 25만원 지원법은 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했다. 전 국민에게 25만~35만 원의 민생회복지원금을 지역사랑 상품권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제22대 민주당 1호 법안이다. 민주당의 1인 체제를 갖춘 이재명 전 대표가 총선 공약하고 발의했다. 1인 체제의 이재명 전 대표에게 누구 감히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당내 토론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경제 상황이 어려울 때도 그렇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지급한 ‘코로나 긴급지원금’ 말이다. 당시 정부와 청와대는 이 문제에 대해 민주당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당시 청와대 출신의 민주당 의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한 청와대 출신 인사는 “청와대 출신 의원 중에 다른 생각을 가진 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여당 불참속에 '노란봉투법'(노동조합·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표결이 진행되고 있다. 야당 주도로 강행 처리된 노란봉투법과 방송4법, 민생회복지원금법(25만원 지원법) 등에 대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를 진행했던 국민의힘은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절대다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은 의회주도권을 갖고 있다. 의정 운영의 책임이 더 크다. 의정은 법률로 이뤄진다. 법률 제정에 오류조차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신중하고 철저해야 한다. 과연 ‘25만원 지원법’과 ‘노란봉투법’에서 그런 책임감을 엿볼 수 있을까. 법률의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는, 국민에게 보여주기식 입법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입법부에는 예산편성권이 없다. 정부의 권한이다. 여권으로부터 헌법 무시, 삼권분립 위배라는 비판이 예고됐다. ‘처분적 법률’이라면 피해 가고 있지만 국민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지 미지수다.

민주당은 예산편성의 주체인 정부는 물론 여당과 협의조차 하지 않았다. 국민을 위한 어젠다를 제시했다면 공론을 만들어야 한다. ‘처분적 법률’이라면 공론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토론 없이 미래지향적 어젠다가 되지 못한다. 여당이 반대하더라도 그 취지를 살려 대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법안의 일방적 단독 처리로 정책 논의의 불씨조차 살리지 못했다.

물론 여권에서 거부권 행사를 예고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거부권 행사가 분명한 상태의 국회 통과여서 그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지, 의문을 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입법 성과는 온전히 이재명 전 대표에게 돌아간다. 거부권 행사하면, 정부는 국민의 민생과 소상공인의 생계에 관심이 없다는 역공을 취할 수 있다. 당연히 민생을 외면하는 윤석열 대통령과의 차별화도 꾀할 수 있다. 여기서 최소 12조 8,193억 원에서 최대 17조 9,471억 원 추산되는 재정 부담은 논외다. 민주당은 지원 효과가 3조 원 정도라는 정부 여당의 주장에 대해 “그것이라도 민생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전자가 미국 정부로부터 64억 달러 재정지원을 받고 440억 달러를 투자, 미국 현지에 공장을 세웠다. 5만 명 고용효과를 냈다. 재정 효과가 효율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없어 보인다고 국민의힘으로부터 역공을 받는 이유다. 안 될 것을 알면서 법률 제정을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당으로서는 얻는 게 있다. 이재명 전 대표가 주장한 ‘막사니즘(먹고 사는 문제에 역점을 두는 ’재명니즘‘)’을 국민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 국민의 민생을 돌보고 골목 상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그 자체가 소기의 목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작 국민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다. 정치적 이해만 있지 국민의 삶은 뒷전인 듯하다. 나랏돈을 이용해서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으려는 속셈이었을 뿐이다.

‘노란봉투법’도 마찬가지다. 이 법은 합법적인 파업의 범위를 확대하고 파업으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노동자 개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파업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안정적인 파업과 권리 주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불법적 파업의 양산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혹시 그렇게라도 된다면 산업 현장에 ‘파업 만능주의’가 판칠 가능성이 커진다. 법 개정이 파업을 조장하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파업에 따른 노조의 손배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른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기회는 많았다. 불법 파업 범위 축소, 액수 한도 하향 조정 등을 포함한 노조법 개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다. 19대 국회부터 21대 국회까지 매번 그랬다. 하지만 법안 심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폐기됐다. 그러다가 지난 21대 국회 말에 ‘노란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민주당이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한 것이다. 이번 역시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법 자체가 기업에서 지킬 수 없는 독소조항이 많아서 그랬다고 한다. 이 법 발의 역시 윤 대통령의 거부권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노동자 편을 드는 민주당의 이미지만 사겠다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