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대통령 장정구를 탄생시킨 사파타와의 1차전 경기

2024-12-04     조영섭 기자

서울 강남구 선정릉역 인근에서 ‘더원’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백승원 관장이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다.

더원 복싱체육관 백승원 관장

현재 14년 동안 체육관을 운영하는 백 관장은 1984년 부산 태생으로 중학 시절 현 대한복싱협회 이상우 심판위원의 체계적인 지도로 엘리트 코스인 송도상고와 동아대를 거친 정통파 복서 출신이다.

제28회 MBC 신인왕전 슈퍼밴텀급 챔피언과 2006년 1월 KBC 슈퍼페더급 챔피언에 등극한 백승원은 2010년 체육관을 개관,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 KBM 페더급 챔피언 심하녹, KBM 한국 미들급 챔피언 백하소, 그리고 전 슈퍼 웰터급 챔피언 김용옥을 비롯한 국내 챔피언 9명을 화수분처럼 쉼 없이 배출 그 지도력을 검증받은 지도자다.

온화한 성품의 백 관장은 복서 개인의 스타일에 맞춰 강점을 부각시키면서 세심하게 지도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되는 김지용, 이해빛 등 다수의 유망주를 조련하고 있다.

한국프로복싱이 무관으로 전락한 지 어느덧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복싱 대통령 장정구 여유로운 모습

그 긴 세월을 현장에서 지켜볼 때마다 필자의 뇌리에 불쑥 불쑥 떠오르는 복서가 바로 장정구 챔프다.

장정구가 두 번째 타이틀에 도전했던 1983년 3월의 한국프로복싱은 1981년 8월 30일 WBC 플라이급 타이틀에 도전한 김태식이 멕시코의 안토니오 아베라에게 충격적인 2회 KO패 이후 기록적인 세계타이틀전 11연패의 깊은 수렁에 빠져있었다.

만일 장정구가 12번째 도전했던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일라리오 사파타(파나마)와 대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도전 실패 기록이 12연속 13연속으로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지속적으로 질주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 나아가 이러다가 복싱계 일각에서는 16연속으로 세계타이틀 도전에 실패한 인접국 일본의 기록을 우리가 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1958년 파나마 태생의 챔피언 사파타는 1980년 3월 일본 동경에서 김성준으로부터 타이틀을 탈취해간 나까지마 시게오를 판정으로 꺾고 WBC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을 획득, 1차방어전에서 한국의 김치복을 스타트로 멜렌데스. 조이 올리버. 헤르만 토레스. 보라싱 등을 차례로 잡고 롱런 가도를 달린 특급 복서다.

그러던 1982년 2월 9차방어전에서 멕시코 강타자 우루수아에게 KO패로 좌초하며 타이틀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해 7월 일본에 또 다시 원정, 도모리 다다시를 15회 판정으로 꺾고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리고 2개월후 맞이한 1차방어전 상대가 바로 장정구였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일라리오 사파타는 1978년 첫 번째로 내한, 김영환에 판정승을 거둔다.

김치복과 일전을 펼치는 사파타(좌측)

그리고 2년 후인 1980년 6월 김치복과 세계 타이틀 방어전을 펼치기 위해 두 번째 방한 경기를 펼쳤다. 김치복은 아마츄어 국가대표 출신으로 박찬희와 승패를 주고받은 간판 복서였다.

이 대결에서 한국인 부심 정영수 심판마저 149-139로 채점을 할 정도로 사파타의 일방적인 15회 판정승이었다. 

사파타는 1982년 9월, 세 번째로 내한해 장정구와 타이틀전을 벌였다. 당시 18전 전승(8KO)을 기록한 장정구는 사파타가 기록한 2패(로페스. 우르수아) 상대를 모두 한 차례씩 꺾은 기록이 있어 승산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 대결에서 장정구는 긴 리치를 이용한 왼솝 잡이 복서 사파타의 견제 잽과 다람쥐처럼 빠른 발을 잡기에는 한 뼘 부족해 결국 2-1 판정패를 당한다.

1980년 신인왕전 우승자 장정구

복서들은 경기에서 승리할 때는 글 한 줄 분량의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패했을 때는 책 한 권 분량의 산지식을 체득할 수 있다.

그만큼 패했을 때는 냉정히 분석해보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게 훨씬 많은 법이다. 절치부심한 장정구는 6개월 후 벌어진 재대결에서 군말 없는 3회 TKO승을 거두고 대한민국 프로복싱 12대 챔피언에 등극한다.

그리고 얼마 후 12대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청와대를 예방했다. 이 대목에서 문득 조선 시대 성군인 정조대왕과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스토리가 생각난다. 정조는 다산이 22살 때 처음 만나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24살 때인 1785년 다산은 초시(과거의 1차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본 시험에서 불합격한다.

예비고사 수석을 본시험에서 일부러 탈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불합격 처리한 데에는 다산을 담금질하려는 정조의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임금이 다산의 시험답안지를 읽게 하고 무릎을 치며 칭찬하기를 네가 지은 것이 사실은 과거시험의 장원 못지않다,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조는 다산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를 좀 더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그 후 다산 정약용은 28세에 대과에 급제하는 등 모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훗날 서양과 동양의 과학을 융합 화성을 설계하고 공사에 필요한 기중기를 만드는 등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1980년 신인왕전 우승자 장정구

장정구 챔프 역시 1980년 거행된 세계챔피언의 등용문인 MBC 신인왕전에서 <우수 신인왕 상>을 받을 만큼 발군의 경기력을 보여준 천재 복서였다.

하지만 데뷔 2년 4개월 만에 맞이한 1982년 9월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사파타와 첫 세계타이틀전에서 근소한 차의 판정에 고개를 숙였다.

19전 만에 첫 패배를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재능을 눈여겨본 극동 프로모션 심영자 후원회장이 경기 패배 후 막대한 자금을 투자, 그에게 다시 한번 재도전할 기회를 주었다. 절치부심한 장정구는 자신이 패배한 경기를 비디오를 돌려보면서 연구분석, 정신적으로 한층 성숙한 복서로 거듭 태어난다.

그리고 6개월 후 다시 만난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사파타와 재대결을 벌인다. 고무줄처럼 유연한 몸놀림과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날카로운 스트레이트에 스피드까지 겸비한 챔피언 사파타는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첫 대결에서 사파타의 지능적인 변칙복싱에 말려 패했던 쓰라린 경험을 되살린 장정구는 180일간 상대를 철저히 분석해 빈틈없이 준비를 끝낸다.

그리고 1회전 탐색전이 끝나기 전에 저돌적인 인파이팅으로 상대를 매섭게 몰아붙인다. 초반 날렵한 푸드웍과 버드나무 가지처럼 휘어지는 유연한 허리로 장정구의 강타를 피하던 사파타는 3회 장정구의 무차별 함포사격에 휘청거리면서 로프에 기대어 간신히 지탱하다 결국 백기를 들면서 경기를 포기한다.

터질 듯한 관중들의 긴장감이 곧 환희와 탄성으로 전환되어 울려 퍼진 일전이었다. 장정구는 같은 선수에게 다시 도전해 기어이 뜻을 이룬 국내 최초의 복서로 기록된다.

그때까지 한국복서로는 정순현이 카르도나에게, 박찬희가 오꾸마에게 각각 도전했지만 모두 좌절을 겪었었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승리의 기쁨도 상대적으로 더욱 컸던 일전이었다. 

세계 정상에 오른 장정구는 이 소중한 타이틀을 5년 8개월에 걸쳐 지켜내면서 15차 방어 대업을 이룩한다.

특히 1985년엔 프로스포츠 선수 수입 중 단연 1위가 장정구였는데 그 금액이 2억 4천만 원이었다. 참고로 당시 발행된 올림픽복권 1등 당첨금이 1억 원이었고 무쇠 팔 최동원의 연봉이 7천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복싱대통령 장정구는 언젠가 필자에게 사석에서 그때 나에게 사파타에게 당한 1패가 없었다면 오늘날 장정구란 복서는 없었다고 단언할 정도로 그 1패는 향후 성장의 기폭제가 되는 영양가 만점의 패배였다.

은퇴 후 장정구 챔프는  한국복서로는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등 한국프로복싱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되돌아 지난날을 회상해보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내에 복싱 인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중책을 책임질 능력 있는 인물들이 적재적소에 앉을 자리에 앉으면 흥(興)하고 그렇지 못하면 쇠퇴하는 것이 흔들림 없는 법칙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박한 현실에 처한 한국복싱을 위기에서 구할 장정구 챔프 같은 불세출의 복서 출현을 기대해 본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