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요삼 아마서 꺾어 세계챔프 만든 차관철 아십니까

필자 소속 용산공고 복서에 5연승 거둔 악연 차관철, 전국체전 첫 경기서 최요삼에 판정승 국가대표 선수촌서 영어 공부 몰입 학구파 불혹 넘어 무역회사 창업...100억 매출 꿈

2025-02-05     조영섭 기자

그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의 다가옴을 알리는 입춘에 즈음해 지난 주말 필자는 ㈜티케이앤에스 차관철 대표와 모처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차관철 ㈜티케이앤스 대표

필자가 복서 출신 차관철 대표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현역시절 필자가 지휘봉을 잡은 용산공고 복서 4명을 상대로 5차례 격돌해 모두 꺾은 용산공고 킬러 복서였기 때문이다.

그 제물엔 뒷날 WBC LF 급 챔피언에 등극한 최요삼도 포함된다. 1973년 홍천 태생의 차관철은 4살 때 부친을 여의고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홍천중·고와 상무를 거치면서 국가대표 복싱선수로 활약한 왼손잡이 복서 차관철 (상무)은 1992년 태국 TASA컵 LF급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에 등극했다.

92년 TASA컵 최우수 선수를 차지한 차관철(오른쪽)의 경기 모습

그와 필자가 인연을 맺은 것은 35년 전인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 홍천고 2학년으로 45Kg 코크급으로 '김명복박사배'에 출전한 차관철의 4강전 상대가 필자의 소속팀인 용산공고 1학년 백달근이었다.

당시 백달근은 8강에서 1989년 11월 전국 회장배대회 우승자인 김대준(경희대)을 5-0 판정으로 잡고 4강에 선착, 결승진출권을 놓고 홍천고 2학년 차관철과 맞대결한다.

여담이지만 그 전년도 11월 회장배대회 금메달리스트로 제2의 허영모로 불린 순천금당고 김대준은 우승 당시 차관철을 꺾었다.

그 무렵 차관철은 코크급 한계체중에서 3Kg 정도 미달 될 정도로 왜소한 체격이었다. 이 대결에서 차돌처럼 단단한 차관철의 압박 권투에 밀려 백달근(용인대)은 예상외로 5-0 판정패를 당한다.

두 번째 대결은 그해 10월 제주도 서귀포에서 개최된 제71회 전국체전에서 이루어졌다. 코크급 1회전에서 서울 대표로 출전한 용산공고 에이스 최요삼의 첫 상대가 바로 강원 대표 차관철이었다. 

최요삼은 그해 7월 개최된 전국체전(서울) 선발전에서 지난 4월 김명복배(코크급) 결승에서 차관철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이근식(리라공고)을 판정으로 잡고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한편 차관철도 그해 6월 벌어진 40회 중고선수권 대회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상(MVP)에 선정되어 이근식에 석패한 아쉬움을 털어내면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40회 학생선수권 최우수복서 차관철

이 대결은 월드컵 축구에 비견하자면 독일과 브라질 경기처럼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이 대결에서 최요삼은 독일 탱크처럼 진격하는 차관철과 초반엔 용호상박의 접전을 펼쳤다.

하지만 종반부에 갈수록 화염 방사기처럼 강력한 화력을 품어내는 차관철의 공세에 밀려 5-0 판정패를 당한다. 차관철은 그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편 차관철에 완패를 당한 최요삼은 한국체대와 서원대학에서 스카웃 요청이 들어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역싸움에 밀린 자괴감으로 아마추어 복싱을 접고 93년 7월 프로로 전향했다. 그해 신인왕을 발판으로 한국챔피언, 동양 챔피언, 세계챔피언에 순차적으로 등극하며 차관철에 당한 패배의 설움을 달랬다.

만일 그때 최요삼이 차관철에 승리하고 아마복싱에 남았다면 요동치는 지각변동이 일어났을 거란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필자(왼쪽부터), 최요삼, 임계룡 선수.

1993년 12월, 국가대표 선발전이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LF급 준결승에서 만난 차관철(상무)의 세번째 희생자는 최요삼의 용산공고 1년 후배 임계룡이었다. 당시 차관철은 강원대를 휴학하고 명조련사 이흥수 사단의 상무팀 소속으로 1992년 태국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에 출전해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선정돼 물이 오를대로 오른 상태였다.

용산공고 재학시절 전국대회 3관왕을 달성한 임계룡은 차관철과 맞대결에서 황산벌 전투처럼 치열한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3회 막판 체력이 소진되어 RSC 패를 당한다.

난 이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단장(斷腸)의 아픔을 느꼈다. 차관철의 결승전 상대는 임계룡의 용산공고 1년 후배 최준욱이었다. 배경석(경희대)을 11-9 판정으로 꺾고 결승에 진출한 최준욱은 차관철과 맞대결에서 역시 전반적인 전력에서 열세를 보이다 3회 경기종료 2초를 남기고 RSC 패를 당한다.

차관철, 그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당시 차관철은 프로복싱 8체급을 석권한 파퀴아오처럼 묵직한 한방은 없어도 샘물처럼 솟아나는 강철 체력을 주무기로 기관총처럼 주먹을 난사하는 왼손잡이 파이터였다.

이듬해 한국체대에 진학한 최준욱은 대표선발전에서 차관철과 두번째 맞대결했으나 역시 RSC 패를 당한다. 차관철이란 한 선수에게 용산공고 선수 4명이 기록적인 5연패(RSC패 3회)를 당하는 쓰라린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적장(?) 차관철은 뇌리에 깊숙이 박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악마(惡魔) 같은 복서였다. 

그래도 필자가 위안을 삼는 대목은 차관철에 패한 최요삼이 훗날 프로복싱 세계정상에 올랐고 최준욱은 한국체대에 진학 국가대표로 발탁돼 1994년 7월 굿월게임 은메달, 97년 동아시아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위를 선양했다.

임계룡 역시 동아대학 재학시절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1995년 7월 제25회 대통령배 금메달에 이어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임계룡의 용산공고 동기인 백달근도 1991년 8월 제12회 전국 회장배선수권대회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상(MVP)을 획득했다.

그리고 1993년 2월 제7회 세계선수권 파견선발대회 페더급 2회전에서 1991년 호주 세계선수권 은메달 박덕규와 13-13 으로 비긴뒤 종합점수에서 뒤지긴 했지만 만개한 기량을 보여주며 차관철에 당한 쓰라린 패배의 아픔을 달랬다. 

한편 국내를 평정하고 국가대표로 발탁된 차관철은 상무팀 소속으로 1993년 제7회 세계선수권대회(핀란드) 8강 진출,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동메달, 1994년 1월 아시아선수권 동메달 8월 세계 군인선수권대회(튀니지)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4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신동길(왼쪽부터), 차관철, 홍성식 선수.

그리고 그해 10월 차관철은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LF급 국가대표로 선발돼 출전한다. 국가대표 동료인 플라이급 신동길의 전언에 의하면 차관철은 선수촌 훈련이 끝나면 숙소에서 식사시간 외에는 온종일 영어공부에 몰입하는 학구파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차관철은 은퇴 뒤 창업을 염두에 두고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부분 선수들이 현역에서 은퇴할 때쯤이면 체육회 직원이나 복싱팀 코치 그리고 체육관 설립이나 자영업 등 향후 펼쳐질 진로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구상한다. 

그러나 차관철은 달랐다. 비록 무일푼인 상황에서도 더 크고 웅대한 포부를 설계하고 있었다. 지금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16세기 중반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문학의 주류이던 천동설을 뒤엎은 혁명적 발상이었다.

차관철도 이같은 창조적인 발상을 토대로 전역과 동시에 곧바로 복싱을 접는다. 그리고 1995년 차관철은 강원대학 경영·회계학부에 2학년으로 복학한다. 그곳에서 차관철은 귀한 분을 만난다.

김만수 감독(왼쪽부터), 김광수 교수, 차관철 대표.

그 주인공은 1947년 4월 평안북도 신의주생으로 서울대에서 학사·석사를 마치고 독일에 유학해 박사 학위를 받은 강원대 경영·회계학부 김광수 교수다.

세종대 교수를 거쳐 1982년 강원대 교수로 재직 중인 김광수 교수와 인연으로 차관철은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출발한다. 학생에게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절반을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면 유비도 삼고초려(三顧草廬) 했듯이 좋은 스승을 찾아가는 것은 성공을 찾아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4살 때 부친을 여읜 차관철을 사랑과 정성으로 훈육하며 부모님의 빈 공백을 채워주었다. 그는 차관철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은인이었다.

인품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그분을 통해 대학 재학중 장학생으로 선발된 차관철은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졸업 뒤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또다시 실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차관철 대표(왼쪽)와 아들, 그리고 아내.

귀국한 그는 결혼과 함께 9년 동안 무역회사를 4차례나 옮겨 다니면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발휘해 매출을 2배로 끌어올린다. 그러던 2014년 어느날 불혹이 넘어선 차관철은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할 때가 왔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리하여 그해 하남시 풍산동에 ㈜티케이앤에스라는 식품 무역회사를 창업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항해에 나서 괄목할만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입지를 구축했다.

현역 시절 닉네임인 진돗개처럼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근성으로 사업에 매진한 차관철은 앞으로 5년 안에 100억대 매출을 올리는 게 목표이자 꿈이라 말한다. 

대학 재학시절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우유배달 등으로 생활고를 해결하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차관철은 말한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절망하지 말고 또 다른 문에 시선을 돌려 문을 열어야 한다. 하루종일 닫힌 문만 바라보고 있으면 열려 있는 다른 문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관철에 대한 글을 쓰면서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본인 잘못이다"란 빌 게이츠의 명언이 떠오른다.

끝으로 드넓은 시야와 창의적인 발상으로 자신의 운명을 반전시킨 자랑스런 복서 출신 차관철 대표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