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일의 시사직격] 북향민의 주체적 시민자격 상실에 대해
정체성을 지워야 하는 사람들
북향민들은 한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신분을 갖고 말이다. 하지만 북향민들의 한국 사회에서의 삶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신분증 하나로 동등해지거나 평범해지지는 않는다. '탈북자'라는 호칭에 내재된 한국 사회의 무시와 혐오, 관심으로 포장된 동정의 시선이 때로는 이들의 정착에 큰 장벽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감정이나 시선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북향민들은 학업을 위해, 취업을 위해, 친구를 사귀기 위해 끊임없이 '북한'이라는 흔적을 지워내야만 한다.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역사를 지워내야만 '한국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표정과 말투, 옷차림에서 완전히 한국 사람처럼 보여야만 한다. 그제야 한국 사회는 북향민들에게 "한국 사람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북향민 청년들은 입에 연필을 가로 물고 서울 말투를 연습한다.
북향민들은 한국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경제자본, 인적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 모든 면에서 전무하다. 그러니 치열하게 몇 배로 더 열심히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한국 사람들조차도 어려운 게 평범하게 살아내는 것이 아니던가. 북향민들도 평범하기 위해 애쓴다. 평범하다는 것은 '탈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한국 사람처럼 인정받는 것이다. 북향민들의 정착 과정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굳이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가 없다.
현재 북향민들의 자살률은 일반 국민의 3배, 실업률은 2배, 직장근속기간은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80% 가까이 일용직과 3D업종에 종사한다. 통일에 앞서 북향민과의 사회통합이 더 중요한 이유다.
성공과 실패: 평균에 스며들기
통일에 앞서 한국 사회의 과제는 무엇보다 북향민들과의 사회통합이다. 이들과 사회통합이 어렵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통일은 과연 가능할까. 북향민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한 이래 이들을 위한 한국 정부의 정책은 가능한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보완돼 왔다. 하지만 늘 그렇듯 정책으로 담아낼 수 없는 빈틈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북향민들이 한국 사회에 잘 통합될 수 있도록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 정부는 구체적인 정책 또는 캠페인 등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북향민들이 전혀 다른 사회인 한국에서 잘 정착해서 성공하는 모델을 만들어낸다면 이는 분명 통일 준비에 긍정신호다.
한국 사회에서 북향민들이 잘 정착한다면 이는 쉽게 '성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이라는 기준이 저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이 글에서 성공은 북향민들이 한국 사회에 잘 통합되어 사회에서, 직장에서, 커뮤니티에서, 친교관계에서 자신의 '출신'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이들에게 성공이란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남한 사람들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출신에 대한 배타적 시선이 없는 평범한 삶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취업의 문턱에서 실력과 무관하게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낙방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취업이 워낙 어려운 요즘이라 하더라도 북향민들에겐 투명하게 덧씌워진 출신에 대한 차별은 높고도 다양하다. 그래서 이력서에서 '탈북자' 흔적을 어떻게든 지워낸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북한 말투'는 종잇장 이력서와는 달리 도저히 흔적을 지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서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말투를 고친다. 북향민들에게 평범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외모와 말투에서, 이력서에서 '북한' 출신이 결코 발견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다른 말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게 북향민들에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북향민들의 평범한 삶, 즉 성공 사례가 많아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회통합의 시작이 될 것이다. 북향민들의 평범한 삶은 남북한 주민들 간의 사회통합에 필수조건이다. 어느 한쪽이 우위에 있지 않은 동등한 조건의 사회통합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동정이나 시혜로 어울려주고 통합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북향민들의 한국 사회 정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노력이다. 새로운 곳에 잘 정착하려면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북향민들은 개인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럼에도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언론에 성공사례로 나왔던 북향민이 어느 날 백골이 되어 1년이 지난 뒤에야 발견된 것은 분명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다. 북향민 한성옥 모자 아사 사건은 너무도 치명적이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목숨 걸고 탈북했는데, 자유의 땅 한국에서 굶어 죽었다는 건 결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를 얻지 못해서, 실시간 소통채널이 넘쳐나는 곳에서 소통할 사람이 없어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해 외롭고 쓸쓸하게 목숨 걸고 얻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북향민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하지만 제도는 이걸 쉽게 감지해 내지 못한다. 자유의 땅에서 외로워서 다시 고향으로 월북하는 걸 그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통일은 서로 달리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보자고 하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가 탈북민을 호출하는 방식
북향민들의 주류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노력은 치열하다. 여기서 '주류사회'란 통상적 의미의 메인스트림을 포함한 일반적인 한국 사회의 한 구성원을 의미한다. 북향민들이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데 장애가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는 말이다. 더러는 방송활동과 유튜브 콘텐츠로 '탈북' 정체성을 적극 활용한다. 소위 장애 요소가 될 법한 '출신' 정체성을 활용해서 남한사회와 소통하는 역할을 한다. 탈북이라는 고유한 경험이 전달해 주는 정보는 남한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와 닿는다. 이렇다 보니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긍정적인 효과를 넘어 '~카더라' 식의 왜곡된 정보와 가짜뉴스도 넘친다.
또 일부는 정치활동에 적극적이다. 정치권에서도 북향민들을 필요에 따라 적극 호명(호출)한다. 정치권에서 북향민들을 호명하는 방식은 주로 두 가지다. 하나는 '보수적 호명'이며, 다른 하나는 '피해자적 호명'이다. 둘 다 보수 진영에서 호명하는 방식이다. 보수정당에서 북향민은 반공의 상징이나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리 잡는다. 이들은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온 존재로서, 북한 체제의 폭압성과 비민주성을 증언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북향민 정치인이 정치권에 입문하는 경우, 보수정당에서 활동하게 되고, 북한인권 문제나 강경한 대북정책을 적극 대변한다. 지금까지 북향민 출신 국회의원이 네 명(19대 국회 조명철, 21대 국회 태영호·지성호, 22대 국회 박충권)이 나왔다. 모두 보수정당에서 배출됐다.
또 북향민들은 북한 정권의 억압과 폭정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피해자'라는 존재로 호명된다. 따라서 북향민들은 인권 운동이나 사회적 약자 담론 내에서 포섭되지만, 이 과정에서 주체적인 정치 행위자로 인정받기보다는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만 규정된다. 또한 이들의 증언은 반북(反北) 정치 기제로 활용된다. 보수진영의 대북정책 우선순위가 북한인권인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 호출 방식은 북향민들이 독자적인 정치적 주체성을 형성할 수 없게 한다. 오히려 보수 진영이 부여한 정체성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북향민들을 두 개의 주요 담론 속에서 호출한다. 따라서 북향민들이 정치적 행위를 할 때 이 호출된 위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북향민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 "자연스럽다"고 간주되지만,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면 즉각적으로 "빨갱이냐", "다시 돌아가라"는 등의 사상검증과 공격 앞에 쉽게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대개 보수 기독교, 보수정당 지지자들이 이런 공격을 한다.
반면, 진보진영은 북향민들을 적극적으로 호명하지 않는다. 이는 북향민 사회가 보수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진보적 가치와 연대할 기회를 구조적으로 갖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북향민이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북향민들의 정치적 선택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낳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북향민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 202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 선거캠프에 북향민들이 조직되어 참여했다. 특히 후보직속 한반도평화번영위원회 산하에 남북한청년들로 구성된 미래한반도청년특별위원회(상임 공동위원장 조경일)는 대통령 후보의 북향민 정책공약을 직접 개발하여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환대와 냉대의 조건
북향민들은 보수적 견해를 가지면 '남한사회에 잘 동화된 탈북자'로 환대받지만, 진보적 견해를 가지면 즉각적으로 '북한을 옹호하는 자'라는 냉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중적 기준은 북향민들이 자유롭게 정치적 신념을 형성하고 표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북향민들이 보수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자기검열을 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북향민들은 한국 사회에 정착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안정적인 삶을 꾸려야 한다. 그러나 북향민이 진보적인 정치인이나 진보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경우, "탈북했는데 어떻게 종북정당을 지지하냐?"는 식의 혐오 반응에 마주하게 된다. 이는 북향민들에 대한 사상검증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북향민들은 차라리 정치와 담을 쌓은 정치무관심층으로 자신을 위치시킨다.
둘째, 북향민 네트워크의 보수적 정치 성향의 강화이다. 한국 사회에는 북향민 출신 정치인, 언론인, 활동가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대체로 보수적 정치 노선을 따른다. 이들은 북한 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을 기반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며, 보수 정당과 협력하고 있다. 이들은 다른 북향민들에게 한국 사회의 '정치적 생존법'을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즉, 북향민 사회 내부에서도 "우리는 보수 진영과 함께해야 이익"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에 무관심한 북향민들도 자연스럽게 보수 성향을 갖게 된다.
셋째, 정치적 보수 진영과의 연계 및 이용이다. 보수진영은 북향민들을 선거에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북향민들은 북한 체제의 '피해자'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반북 담론을 강화하는 데에 이용하는 것이다.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신뢰투쟁
북향민들은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기 위해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을 넘어 신뢰투쟁(struggle for trust)을 해야만 한다. 인정 투쟁은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가 소개한 이론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과정은 타인과의 상호 인정, 즉 타인과의 투쟁을 통해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신뢰 투쟁 개념은 인정 투쟁에 빗대어 내가 만든 개념이다. 신뢰투쟁이란, 북향민들이 단순히 능력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사회적 불신과 의심의 구조 속에서 적극적으로 존재론적 신뢰를 쟁취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인정의 단계로 공고히 해나가기 위한 선행단계이다.
인정투쟁을 만인들의 사회적 인정을 얻는 투쟁의 범주로 본다면, 신뢰투쟁은 존재의 정체성 증명을 통한 신뢰확보 그 자체로 해석할 수 있다. 북향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잘 정착하기 위해 구조적 불신과 의심의 시선을 극복해야 하는 현실을 반영한 개념이다. 쉽게 말해 신뢰투쟁은 북향민들이 '빨갱이나 간첩'이 아니라는 사상검증과 정체성 검열을 극복하고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출신불문 누구나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북향민들, 즉 '탈북' 정체성들을 일종의 비(非)시민으로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선이 존재한다. 이는 분단체제가 우리 내면에 체화되어 무의식적이고 반복적인 재구조화를 통해 끊임없는 타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는 제2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적용한 '분단의 아비투스'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 때문에 북향민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간첩이 아님'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북향민들은 사회적 인정 이전에 존재에 대한 신뢰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혐오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혐오담론은 사회적으로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낙인찍는 기능을 한다. 특히 혐오담론 속에서 '빨갱이' 혐오 분단 체제하에서 형성된 강력한 정치적 공격 프레임으로 작동해 왔다. 이 혐오는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북향민들이 정치적 의견을 표명할 때마다 '색깔론'의 틀 안에서 해석되도록 만든다.
생각이 다른 타자를 쉽게 공격하는 빨갱이 혐오가 한국에서 사회적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자기검열을 강요받는 심리적 부담이 사회 기저에 배태되어 있다. 북향민들은 이러한 혐오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정상적' 시민, 즉 적대국인 북한에서 탈출했지만 대한민국을 전복하거나 남한 국민들에게 결코 해를 입히지 않을 '안전'하게 '재사회화'된 시민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또 더 나아가 '자유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국민임을 입증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과거 탈북 귀순용사들이 기자회견 장소에서, 또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이 최고위원 후보 유세 공개연설 장소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것도 바로 언어로 표출하는 방식의 존재론적 증명이었다. 북향민 출신 박충권 국민의힘 의원이 공천권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민주주의를 훼손한 내란을 기꺼이 옹호하는 적극적 정치행태를 보이는 것도 이런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듯 탈북 정체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존재에 대한 신뢰를 얻기 위해 언어로 표출해야 한다. 더 적극적 행위인 자발적 반북활동을 통해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심리적 압박도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북향민들은 여전히 "간첩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받는다. 특히 진보적 입장을 표명하면 "빨갱이", "간첩", "다시 북으로 돌아가라" 등의 파시즘적인 공격도 받게 된다. 이렇다 보니 북향민들은 보수정당과 같은 입장을 취하거나,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모두를 비판하는 양비론을 취한다. 아예 자신의 정치적 의사 표현을 제거하고 정치무관심층이 되는 방식으로 사상 검증을 회피하기도 한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
북향민(탈북민)들이 당연히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보수당을 지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선택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압력 또는 문화적 특정 담론 속에서 강요된 원인이 크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1~2편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어쨌든, 한국 사회의 북향민들을 수용하는 '환대와 냉대의 논리' 속에서 북향민들의 주체적 시민성 확보의 길은 여러 어려움이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북향민들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표현을 제약하고 있다.
첫째, 이는 북향민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훼손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경험과 신념에 따른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비난 또는 공격받아서는 안 된다. 그가 북한 출신이건 남한출신이건 한국 사회에서 동등한 국민으로 살아가는 이상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정체성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이건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북향민들이 '보수'가 아닌 다른 정치적 지향, 통상 '민주진보진영'으로 일컬어지는 쪽을 지지할 경우 바로 '빨갱이'나 '종북'으로 정체성을 공격해버린다. 이때 공격하는 이들은 대개 보수우파들이다.
둘째, 북향민 사회 내부의 분열을 초래한다. 민주당 또는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북향민들은 같은 북향민들에게서조차 “빨갱이, 간첩” 같은 거침없는 공격을 받게 된다. 이는 북향민들 사이에서 다양한 정치적 논의를 어렵게 만든다. 앞서 밝혔듯 북향민들이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북향민들의 경우 보수 또는 극우 집단의 반공이데올로기 공격 프레임을 그대로 수용해서 같은 북향민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선다. 이는 학습을 넘어 세뇌의 수준으로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다.
셋째, 북향민들이 정치적으로 도구화되는 문제를 낳는다. 보수 진영에서는 북향민들을 이용해 반북담론을 강화하고, 진보 진영에서는 북향민들이 북한 체제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북향민들은 스스로의 정치적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형성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북향민들의 정치적 주체성 확보는 이들의 주체적 시민권을 보장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포용성을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진영 모두의 역할과 노력이 필요하다. 북향민들이 보수진영 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과의 협력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북향민들이 단순히 ‘보수정치 세력의 상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정치적 주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혐오를 넘어 포용으로
북향민들의 신뢰투쟁은 혐오담론을 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향민이 정치적 주체로서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또한, 진보 정당을 포함한 기존 정치 세력이 북향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 북향민들이 보수·진보를 넘어 다양한 정치적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북향민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정치적 행위자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북향민정책의 기조와 방향도 마찬가지다. 북향민들이 자유로운 정치적 시민의 자격을 확보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취업과 창업 등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북향민들의 경제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바로 북향민들에 대한 선입견과 왜곡의 시선이다. 북향민들을 향한 사회적·문화적 시선을 바꾸는 것이야 말로 이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동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향민들을 더 이상 ‘동화’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고 ‘통합’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북향민들을 호명하는 정치지형이 지금처럼 보수진영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는 북향민들이 보수집단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보수진영에 줄을 서는 것이 더 안전하고 이익이 된다면 이것을 비판할 수는 없다. 북향민들이 보수진영에서만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들이 보수화됐거나 민주시민 교육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보수진영에서 정치활동을 해야 안전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보진영에서도 북향민들이 정치활동에서 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적극 호명하고 제도권 안으로 포용해야 할 것이다.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보수진영에 있는 북향민들에 대해 민주주의 시민의식이 부족하거나 또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계엄사태를 옹호하는 등 어떤 부분 또는 사례에서는 맞다. 하지만 이는 북향민들의 극우화 현상의 책임을 앞서 설명한 북향민들이 처한 사회 구조적 한계로 보지 않고 오로지 북향민 개인들의 비민주성 또는 비시민성으로만 치부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관점은 부당하다. 이제 진보진영에서도 북향민들을 연대할 수 있는 주체적인 정치집단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북향민들도 다양하다. 다만 극우적 목소리를 내는 이들만 언론에 비춰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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