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 칼럼] 전기차 캐즘이 걷힐 빛이 보인다
한국은 고품질 이차전지(삼원계) 생산 강국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이차전지 기업들은 맥을 못 추고 있다. 전기차 캐즘 때문이다. 신기술이 출현할 때 소비자의 반응은 다르다.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는 혁신자(Innovator), 기술의 가능성만 보이면 구매에 나서는 초기 수용자(Early Adopter), 이것저것 따져본 후 구매하는 초기 다수구매자(Early Majority), 충분한 검증이 있어야 반응하는 후기 다수구매자(Late Majority), 그리고 대다수 사람이 구매할 때까지 기다리는 지각수용자(Laggards)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캐즘(Chasm)은 초기 수용자와 초기 다수구매자 사이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들 사이에 큰 틈이 벌어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캐즘이 생기면 시장은 도입기를 넘어 성장기로 진입하지 못한다.
불행히도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전기차 시장이 캐즘을 겪었다. 덩달아 전기차의 핵심인 이차전지 시장도 더디게 형성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캐즘이 심했다. 내연차에 비해 전기차의 단점만 부각된 탓이었다. 충전 인프라 부족, 긴 충전 시간, 주행거리 불안, 겨울철 배터리 방전, 배터리 내구성에 대한 의심, 중고차 가치 불확실성, 전기차 화재 등에 소비자들이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그러다 보니 한국 이차전지 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배터리를 개발해 놓고도 내수시장 부진에 애를 먹었다. 그사이 가격이 저렴한 중국 리튬인산철(LFP)이 세계시장을 장악하였다.
그렇다고 정부와 자동차 기업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충전 인프라 확대에 노력을 기울였다. 100 km 도로당 충전소 수를 살펴보면 한국은 2기 정도로 전기차 보급률이 높은 중국(3.5기), 영국(3.1기), 독일(2.8기)에 비해 낮지 않다. 또 전기차 한 대당 충전기 수도 0.5기로 글로벌 평균 0.1기보다 높다. 기업들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화재 예방을 위한 첨단 기술 도입, 1회 충전에 500km 이상 주행이 가능한 전기차 개발, 그리고 가성비 높은 전기자동차 개발에 힘을 쏟았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한국 전기차 시장에 변화 조짐이 생겼다. 올해 5월 기준, 친환경차(전기, 하이브리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수소차) 내수 판매 비중이 전체 자동차 판매의 52%에 달해 처음으로 월간 판매량에서 내연차를 추월했다. 하이브리드차(35.7%)가 가장 많이 팔렸고 다음이 전기차(15.1%)다. 더 극적인 변화가 중고차 시장에서 일어났다. 2024년 1분기 대비 2025년 1분기 중고 자동차 평균 성장률은 4.0% 역성장이었다. 휘발유차와 경유차가 –3.0%와 –10.4%로 역성장의 진원지였다.
반면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는 15.6%와 47.4%의 급속성장하였다. 전기차의 경우 2024년 1분기 7348대였던 판매고가 2025년 1분기 1만832대로 폭증했다(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 성장률만 보면 전기차가 하이브리드차를 앞섰다. 판매가에서는 더 큰 변화가 있었다. 전기차(2025년 6월 초 기준) 평균 중고 매매가격이 2666만원으로 휘발유(1985만원), 경유(1744만원), 하이브리드(2626만원)에 비해 가장 높았다. 중고차가 팔려나가는 속도도 전기차가 압도적이었다. 평균 19일로, 휘발유(33일), 경유(43일), 하이브리드(43일)에 비해 매우 빨랐다(중고차 플랫폼 케이카).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소비자들이 전기차의 장점을 인식하기 시작해서다. 전기차는 휘발유차 대비 연료비가 20~30% 수준이다. 여기에 엔진오일, 미션오일, 머플러 등을 교체할 필요가 없어 유지비용이 대폭 준다. 가장 큰 변화는 배터리에 대한 인식전환이다. 전기차 도입 초기 가장 큰 우려는 배터리였다. 하지만, 국내 전기차 기업들이 배터리 수명 보증기간을 8년/16만km로 제공하면서 불안을 불식시켰다. 여기에, 한국산 배터리의 경우 6년 이상을 주행해도 배터리 잔량이 80~90%에 이른다는 사용자 후기가 퍼지며 배터리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또한, 배터리 진단기술의 발전으로 배터리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화재에 대한 막연한 불안도 줄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이 쌓이자 신차와 중고차 모두에서 소비자의 전기차에 대한 태도가 변했다.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전기차 캐즘이 사라질 것으로 예단할 수는 없다. 확실하게는 내연차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차보다도 전기차가 더 많이 팔려야 한다. 하지만, 앞서 살핀 내용만으로도 한국시장에서 전기차에 대한 악성 캐즘이 걷힐 가능성은 예측할 수 있다. 특히, 중고차 시장에서의 변화는 의미가 크다. 이 시장에서 차를 사는 사람은 적어도 혁신자나 초기 수용자를 넘어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중고차 구매자들은 매우 신중하다. 운 나쁘면 구입비보다 수리비가 더 클 수 있어서다. 그래서 이들은 중고차 구매 전 다른 사용자들의 후기나 평판 정보를 꼼꼼히 살핀다. 소비자 유형으로 말하자면, 최소한 초기 다수구매자다. 이런 구매계층이 늘어날 때 캐즘은 사라진다. 중고차 시장에서 전기자동차에 대한 구매패턴 변화는 이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에서 전기차 캐즘이 벗겨지면 이차전지 기업들의 도약이 기대된다. 국내 시장이 커진 만큼 규모의 경제도 좋아져 원가경쟁력이 높아져서다. 지금껏 이차전지 시장은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 리튬인산철 배터리에 의해 끌려다녔다. 한국시장에서 전기차 캐즘이 사라지면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고, 여기에 더해 한국형 배터리의 장점인 고품질이 빛을 발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고무적인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중국 체리자동차가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8Gwh, 금액환산 약 1조원어치를 구매하기로 했다.
지금껏 한국 배터리의 중국시장 진입을 막았던 중국 정부가 이를 허가한 것은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기자동차 치킨 게임과 무관치 않다. 중국에서는 저가형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자동차 회사 간 무한 가격경쟁이 일어나고 있다. 선두 기업인 BYD 자동차가 이를 선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중국 전기자동차 시장이 혼탁해지고 있다. 체리자동차는 이 끝없는 가격 게임을 벗어날 무기로 한국형 고급 배터리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최근의 변화는 한국의 이차전지가 그간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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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홍은 KAIST를 졸업하고 광운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경영대학장과 경영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인사조직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지식경영학회 및 한국중견기업학회 회장을 지냈고, 삼성그룹, 포스코, 한국전력, CJ그룹 등에서 자문교수로 활동했다. 정부혁신관리위원장, 사업재편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현재는 한국이해관계자학회 수석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비즈니스의 맥', '세종에게 창조습관을 묻다', '국가경쟁력, 중견기업에서 답을 찾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