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 칼럼] 퇴직연금 의무화 - 꿈꿀 권리와 실패할 권리

2025-07-03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적극적 자유는 무언가를 ‘할 수 있을’ 자유를 의미한다. 가령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적극적 자유다. 반면 소극적 자유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가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지난 6월 24일 고용노동부가 국정기획위원회에 보고한 퇴직연금 개선안을 들여다볼수록, 나는 자유의 두 개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정부는 국민의 소극적 자유를 지키겠다는 명분 하에 적극적 자유를 억누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일단 언론에 보도된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자. 고용노동부는 퇴직연금을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금의 성격으로 바꾼다는 취지 하에 퇴직연금을 모든 사업장에 의무화하고 기금형으로 바꾸며 1년 이상 일해야 받을 수 있는 퇴직급여를 3개월만 근무해도 받을 수 있도록 법 개정에 나서고 있다. 정권 인수위 역할을 하고 있는 국정기획위원회가 내놓은 맞춤 정책 해법이다.

이런 정책적 변화를 추구하는 이유가 뭘까? 정부는 국민의 고용 안정을 보장하고 퇴직 후의 삶을 지켜주며, 특히 노령층의 빈부격차를 줄이겠다는 취지를 앞세우고 있다. 소극적 자유 중에서도 말하자면 ‘굶지 않을 자유’를 지키겠다는 주장이다.

국민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이유다. 민주주의 이전 그 어떤 전근대 사회의 국가나 공동체에서도 사람이 굶어서 죽어가게 하는 것을 용납하는 일은 없었다. 부득이하게 그런 결과가 벌어질 수야 있겠지만 원론적으로 보자면 그렇다. 온 국민이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게 하는 것, 아무리 실패해도 굶어 죽지는 않게 하는 것, 그 소극적 자유의 보장이라는 대의명분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디테일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퇴직연금 개혁안의 취지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퇴직연금 가입을 모든 사업장에 의무화한다. 둘째, 직장 가입 후 1년이 지나야 가능했던 퇴직연금 수령을 3개월 이후에도 가능하도록 한다. 셋째, 그렇게 만들어진 퇴직연금을 기금형으로 전환하여 고용노동부 산하 기관을 설립하여 국가가 운용한다. 넷째, 지금까지 그 어떤 패널티 없이도 일시불로 받을 수 있었던 ‘퇴직금’을 없애고 오직 연금으로만 수령이 가능하게 한다.

일단 퇴직연금을 모든 직장에 적용하는 방향의 개정 자체는 반대할 일이 아니다. 그러한 변화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에 부담을 주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중소기업과 자영업에서 평생 일하며 살아온 이들이 노후의 불안에 노출되는 것을 막겠다는 개정안의 취지와 잘 부합한다. 문제는 그 부작용을 어떻게 줄여나가느냐다.

개정안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그런 면에서 커지는 우려를 감추기 어렵다. 3개월 근무한 후 퇴직연금을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특히 중소기업과 자영업에 종사하는 국민들의 노후를 보장하겠다는 그 취지에 부합하려면 짧은 근로 기간을 최대한 늘릴 수 있는 유인동기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을 수 없게 규정하면서 동시에 3개월만 근무해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취지인가?

국민을 가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즉 돈으로부터의 소극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이번 개정안의 취지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없지 않다. 문제는 국민의 적극적 자유를 어떻게 보장하느냐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일해서 돈을 벌 권리가 있다. 자신이 번 돈을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고, 단지 가난에서 벗어나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의 포부를 펼치며 자아실현을 할 권리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퇴직연금의 기금형 전환은 의아함을 넘어 경악스럽다. 퇴직연금은 기본적으로 내가 일해서 번 돈을 국가가 강제로 저축시키는 것이다. 온 국민의 노후 보장이라는 취지에 맞춰 강제 저축까지는 수용한다 치더라도, 그렇게 모인 돈을 어떻게 굴릴지는 국민 각각의 판단에 맡겨져야 하는 것 아닐까? 국가가 운용하는 기금이 개인의 판단보다 더 나은 수익을 올릴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설령 그런 보장이 있다 한들 그것은 ‘돈에 대한 적극적 자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운영 원리와 맞지 않다.

이는 퇴직연금을 강제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원리다. 미국의 401(k), 호주의 퇴직연금(Superannuation Guarantee: SG), 일본의 확정기여형 퇴직연금(DC) 등이 모두 그렇다. 중간에 돈을 뺄 권리는 없지만(정확히 말하면 목돈을 인출하기 위해서는 벌금과 소득세를 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 돈을 내 뜻대로 굴릴 권리 자체를 국가가 가져가버리지도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아가는 것을 왜 나쁘다고 보아야 할까? 국민에게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퇴직금을 연금으로 받고 싶은 사람은 연금으로 받도록 하고,일시불로 받아서 작지만 자기만의 일을 해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그게 더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 아닐까?

‘퇴직하고 할 거 없어서 치킨집 차리고 날려먹는 은퇴자’ 운운하는 반론이 벌써 들려오는 것 같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우리 모두에게는 꿈꿀 권리가 있다’는 말은 흔쾌히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꿈꿀 권리란,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실패할 권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모든 사람의 꿈이 다 실현될 수는 없고, 누군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니 말이다.

국민의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한다는 미명 하에 꿈꿀 권리, 실패할 권리마저 박탈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정책일까? 치킨집 하면 망할 수밖에 없으니까 자영업을 꿈도 꾸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사회의 모습일까?

모두가 그런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현재 대한민국 치킨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인 교촌치킨은 존재조차 할 수 없었다. 교촌치킨은 창업주 권원강 회장이 개인택시 면허를 팔아서 마련한 3500만원으로 차린 아파트 상가 통닭집에서 시작했다. 물론 개인택시 면허를 판 돈을 퇴직금이라 할 수는 없으나, 교촌치킨을 차리고 싶어서 퇴직금을 들고 본사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음만은 권 회장이 통닭집을 차리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국민의 노후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덕목이다. 퇴직연금의 확대에 무조건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국가가 보장해야 할 것이 과연 ‘노후 생계’일 뿐이냐다. 국가는 국민이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크고 평평한 운동장이어야 한다.

이번에 고용노동부가 제출한 퇴직연금 개정안은 그런 면에서 우려스럽다. 내가 일해서 번 돈을 내 마음대로 투자하지도 못하게 하고, 심지어 더 일하고 싶은 나 자신에게 투자하지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굶지 않을 자유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꿈꿀 자유, 심지어는 실패할 자유마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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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노정태는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이다.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앙일보, 서울신문, 신동아에 칼럼을 기고한다. '프리랜서', '불량 정치' 등을 썼으며,'아웃라이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칩 워' 등의 번역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