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 칼럼] 법인세를 높이면서 코스피 5000간다니

2025-07-31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법인세 인하의 효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에서 인하했던 것을 정상화시키는 것이란 취지로 정부가 설명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여당 간사인 정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9일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 보자. 지금 논란이 되는 부분은 법인세 최고세율이다. 과세표준 3000억원을 넘어서는 법인의 소득에 대해 매기는 세금이 논의의 핵심이다. 본래 해당 구간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25%였지만, 2009년 이명박 정부 당시 25%에서 22%로 내렸다가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25%로 올렸으며, 이후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 24%로 낮춘 바 있다. 정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정부는 그것을 25%로 '정상화'하겠다는 취지를 분명히 밝힌 셈이다.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3000억원 이상을 버는 법인은 대기업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부자'다. 그런데 왜 우리가 '부자 감세'를 해줘야 하는가? 세금을 걷어서 교육, 국방, 기반 시설 등에 투자하는 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이자 기본적인 임무다. 세금을 걷을 때 걷어서 제대로 써야 국가 경제가 제대로 활성화될 수 있으니, 법인세 인하 같은 '부자 감세'는 그 취지와 달리 오히려 국가 경제에 해로울 수도 있다. 국가는 적극적으로 세금을 걷고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일단 우리는 이 문제를 '부자 감세'라는 프레임 바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3000억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대기업이 '가난한 서민'일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부자'라고 곧장 의인화하여 바라보는 것 또한 성급한 일이다. 즉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대체 법인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한층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경제 칼럼에서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 싶겠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이므로 여러분도 스스로 답을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 글을 쓰는 나와 읽는 여러분은 모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밥을 먹고 잠을 자야 생존 가능한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요컨대 우리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자연인(自然人)이다.

그런데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으며 생명 유지를 위해 애써야 하는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다. 모든 동물이 다 그렇다. 요컨대 자연인이란 '동물로서의 사람', 혹은 '동물적 요소에 바탕을 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집에서 개나 고양이처럼 대체로 지능이 높은 동물을 키우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개에게 개껌을 주면 '내 것'으로 인식한다. 주인이 빼앗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만의 공간에 숨기기도 한다. 몹시 초보적이고 원시적인 점유와 소유의 개념 정도는 동물도 다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우리의 인간적 활동이 그런 원시적 점유와 소유의 차원을 한참 넘어서서 작동한다는 데 있다. 우리집 뽀삐는 내가 준 개껌을 숨겨놓고 혼자 먹으려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집 뽀삐가 옆집 쫑을 상대로 '내가 너에게 개껌 5개를 빌려줄 테니 2주 후에 개껌 7개로 갚으라'는 계약을 맺고, 그 내용을 문서로 확인하며, 공증을 받거나 내용증명을 보내는 등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사람은 법적 주체로서 다른 법적 주체와 법적 권리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단순한 동물적 점유와 소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고도의 복잡한 활동이다.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동물도 그것을 이해하고 수행할 지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우리는 피와 살을 지닌 동물이지만, 동시에 '법의 거미줄'이라는 가상의 시스템 위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법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육체를 지닌 자연인이 죽거나 활동을 계속할 수 없을 때, 혹은 여러 자연인이 협업을 해야 할 때, 법적 행위의 일관성을 유지해줄 어떤 '가상의 법적 주체'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3대가 계속 대를 이어서 식당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할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 식당의 명의로 빚을 졌다. 그 빚을 아들이나 손자가 갚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빚을 진 주체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식당 그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피와 살을 지닌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사람으로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는 존재가 바로 법인이다. 법인은 고대 로마 시절부터 다루어져 왔으나 그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이후다. 먼 바다로 항해를 하고 모험을 떠나는 것은 선장이나 선원이 죽고 없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사람이 죽거나 바뀌어도 유지되는 '법인'이, 특히 영리를 목적으로 한 '기업'이, 본격적으로 필요해진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맺는 법적 관계를 되짚어 보자. 자연인과 맺은 게 더 많을까, 법인과 맺은 게 더 많을까?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더라도 우리는 법인과 거래를 하게 된다. 편의점 사장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등록된 '사업자'와 돈을 주고 받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법인이 만들어낸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보고, 법인이 만들어낸 랩탑으로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하며, 법인인 기업에 출근하여 월급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이 있다. 법인은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인은 어디까지나 법적 활동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법적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법인을 마치 진짜 사람처럼 바라보고 취급할 때 우리는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감정적 시선이 덧붙여져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법인세 인하를 '부자감세'라 부르는 것은 그런 오류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법인, 그 중에서도 오늘의 주제인 영리법인, 다시 말해 기업의 경우로 논의를 한정해서 고민해 보자. 기업의 소득은 어디로 가는가? 매출에서 임직원의 임금, 재료비, 금융 비용, 경상비, 기타 제반 비용을 빼고 남은 돈이 소득이 된다. 그 소득은 다시 투자될 수도 있고 사내유보금 등의 형식으로 현금이나 자산이 되어 기업 내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돈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횡령이나 배임 등의 범죄가 저질러지지 않았다고 가정했을 때, 기업이라는 법인이 낸 소득은 법인의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기업을 소유한 사람, 혹은 기업의 의사결정권자가 운용할 수 있긴 하지만, 원칙적으로 기업 그 자체의 것이며 결국에는 임금이나 투자 등의 형식으로 사회에 되돌아간다. 언젠가 법인이 영업을 중단하고 해산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올린 수입은, 그렇게 창출해낸 이윤은, 이미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사회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정태호 의원의 발언은 그런 면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법인세 인하가 일자리 창출이나 투자 촉진 효과가 없다고 단언한다. 기업이 돈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국가가 세금을 걷는 게 낫다는 주장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법인세가 높은 국가를 피해 낮은 곳, 이른바 '조세 피난처'로 기업의 본사를 옮기는 일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숱하게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경우는 같은 국가 내에서도 법인세가 낮은 주로 본사를 옮기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대한민국이 아일랜드나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같은 조세 피난처가 될 수는 없겠지만, 법인세가 기업에 인센티브 혹은 패널티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정부가 세금을 통해 국가의 기반을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는 말은 언제나 옳다. 하지만 결국 경제 활력은 고용과 투자로 인해 결정되며, 그것은 기업의 몫이다. 기업의 의지를 꺾는 정책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어떻게 '코스피 5000'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재명 정부의 논리적 일관성과 목적 의식에 대해 새삼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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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노정태는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이다.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앙일보, 서울신문, 신동아에 칼럼을 기고한다. '프리랜서', '불량 정치' 등을 썼으며,'아웃라이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칩 워' 등의 번역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