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일의 시사직격] 인도주의와 인권, 같이 갈 수 있나?
'북한'은 없다. 이제 '조선'이다
인권이 바로 정치다
우리는 흔히 인권을 보편적 가치라고 말한다. 맞다. 이 자명한 명제를 누가 동의하지 않을까.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선언했다. 1919년 3.1 기미독립선언서에도 “인류 평등의 큰 진리를 환하게 밝히며”라고 명시돼있다. 모든 인간은 맨몸으로 왔다 맨몸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이런 보편적 존재들이 살아갈 때 필요한 권리, 즉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정말 보편적으로 적용 되냐는 것이다.
우리는 인권이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정치와 분리해서 봐야한다고 말한다.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했다면 아마 세상은 오래 전에 평화를 찾았을 것이고 우리는 이미 천국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은 정치와 분리할 수 없는 지극히 정치적인 담론이다. 다른 말로 인권은 정치에 종속된 담론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인권은 결핍에서 비롯됐다. 결핍은 정치가 만들어낸다. 우리는 외딴 섬에 홀로 살지 않는 이상 어떤 형식으로 구성됐든 국가라는 공동체에 속해서 살아간다. 국가가 우리에게 국민, 인민, 시민이라는 자격을 부여한다. 그래서 국적 없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인권을 보호받기가 어렵다. 본국을 이탈한 난민들이 타국에서 고통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인권은 시민의 자격이 있을 때에야 옹호될 수 있다.
조선(북한)을 탈출한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 인신매매로 팔려가고 성폭력, 노동폭력을 당해도 그들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다. 중국이 민주국가였다면 최소한의 권리는 침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중국은 조선을 이탈한 사람들을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조선 공민’자격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상황은 비슷하다. 어느 곳에 도착했든 피난민들은 도착국가의 국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가 쉽지 않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며 재집권한 트럼프는 불법이민자들을 추방하고 있다. 더러는 부모 자식 간에 생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음에도 행정권력은 절차대로 밀어붙인다.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뼈가 앙상해져 마른 나뭇가지처럼 죽어가고 있지만 인권선진국들은 외면하고 있다. 인권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 ‘보편적 가치’라는 말은 배부른 자들의 수사로 전락했다. 1990년대 중후반 북쪽에서 고난의 행군으로 수십만 명이 굶주릴 때 인권 선진국들은 외면했다. 인권이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권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식별하는데서 시작된다. 가해자를 비판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다. 가해자 김정은 정권을 비판하고 피해자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피해자들을 도울 방법을 마땅히 찾지 못하고 있다. 가해자를 비난하는 게 전부다. 인권이 정치에 종속된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의 다른 말이 바로 정치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있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 이걸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바로 정치다. 인권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북한 인민들의 인권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인권은 생존권, 이동권, 자유권 등 여러 권리를 포함한다.
고난의 행군 당시 수십만 명이 탈출한 이유는 생존권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소수만이 정치적 이유와 자유를 위해 나왔다. 즉 생존권을 위협받지 않았더라면, 굶지 않았다면 탈북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배고픔은 인간의 원초적 고통이다. 이들의 고통해결에 우리가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 여기서 바로 인권과 인도주의가 나온다. 인권과 인도주의, 이 둘은 마치 대립하는 개념 같지만 사실 독특한 한국 정치지형 아래 오염된 갈등일 뿐이다.
인도주의와 인권은 같이 갈 수 있나?
인도주의와 인권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목표달성에 있어서 우선순위(priority)를 결정해야 하는 정책적, 정무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현재 인권은 보수, 인도주의는 진보라는 관점이 있다 보니 인도주의(교류)를 말할 때 인권문제가 축소되고, 인권을 말할 때 인도주의가 축소되는 한계가 있다.
인도주의던 인권이던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든 간에 중요한 것은 ‘북한에 있는 주민들의 인권이 실제로 개선되는가?’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것을 쉽게 놓칠 수 있는데, 나는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북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는가? 우리의 책임은 북한의 현 상황과 정보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기반해서 공론화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 인민을 구원해야 하는 ‘구원자’를 자처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사고는 필연적으로 흡수를 전제로 한 적대적 관점을 강화하고 타자화 한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실제로 목표하는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역설적으로 장애가 되기도 한다. 물론 북한 인민들은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를 동등하게 누려야 하고 그런 상태라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역할이다.
현재 2030이 북한문제나 통일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의 성격에 따라 관심은 달라진다. 적대적 관계가 아닌 교류협력의 관계가 된다면, 특히 제한적이더라도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관심 또한 생기게 될 것이다.
현재 남과 북은 관계가 단절된 상황이지만, 정치적 변화는 언제든 가능성을 만든다. 통일 문제를 북한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레토릭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청년들에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분명한 사실이다.
인도주의와 인권이 함께 갈 수는 없는가? 인도주의와 인권은 별개가 아니다. ‘인도주의’의 목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생존권, 이동권, 자유권 등)이 실제로 개선되는 것이며, ‘인권’의 목표도 결국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이 목표다. 문제는 현재 북한주민들이 처한 열악한 인권 중에 가장 긴급한 인권이 바로 생존권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도주의는 제한적이나마 생존권을 개선할 수 있으며, 인권만 주장하는 것은 정치에 종속된 아젠다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생존권도 개선하지 못한다는 현실 정치의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인도주의와 인권은 함께 가야하며, 필요에 따라 우선순위를 조절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실제 북한 주민들의 삶이 개선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 가보는 것이다. 필요시 인권은 국제무대에서, 인도주의는 국내정치로 접근하는 것 또한 필요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북한은 인도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지금 북한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변화하고 나름 발전해서 내수를 만들었다. 더 이상 예전의 북한이 아니다. 이제 ‘조선’이다. 우리는 인도주의가 아니라 조선과 어떻게 관계를 가질 것인지 토론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치가 다시 작동해야 한다. 새로운 남북관계 만들어야 한다. 조선과 한국이 어떻게 위협을 관리할 것인지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인권도 그렇다. 나는 내 고향에 남은 이웃들, 친구들, 친척들이 더 이상 굶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들의 인권을 밖에서 말해야 한다. 그런데 말만 하면 안 된다. 말로는 저들의 인권이 거의 개선되지 않는다. 우리는 개입해야 한다. 개입은 인도주의가 될 수도 있고 경제협력이 될 수도 있다. 개입의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이전의 남북관계가 아닌 관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