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권의 AI와 함께 살기]AI시대를 위한 필수역량 ‘언러닝’

IT저널리스트

2025-09-25     구본권 박사

”21세기의 문맹은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언러닝하고, 재학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정보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세가지 능력을 이렇게 정의했다. 인공지능 사회에서 각 부문의 변화가 빨라짐에 따라 배움은 학창 시절같이 인생의 특정한 시기에 국한된 게 아니라 상시적이고 필수적인 생존 활동으로 바뀌었다. 정보사회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학습’, 그리고 ‘재학습’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앨빈 토플러가 강조한 ‘언러닝(unlearning)’은 특별하다. 배우지 않음이 아니라 학습한 것, 알고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포기하는 행위를 말한다.

미래학의 석학 앨빈 토플러. (사진=위키커먼스)

‘학습’은 몰랐던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는 의도적 행위로, 양동이에 물을 채우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재학습’은 낡은 지식과 역량을 신선한 내용으로 대체하는 업데이트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깨끗한 물을 담기 위해 양동이 가득한 고인 물을 쏟아내듯, “배운 것을 비워낸다”는 의미에서 언러닝을 ‘비움학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까지 지식은 ‘채우기’, 이제는 ‘비움학습’ 뒤 업데이트

그런데 ‘비움학습(언러닝)’은 양동이를 비우듯이 손쉽게 수행할 수 없다는 데서 어려움이 생겨난다. 관행과 관성 때문이다. 정보화 시대가 닥치기 이전의 공부는 기본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수집하고 기억하는 활동이었다. 동전이나 우표 수집처럼, 학습은 지식이라는 아이템을 더 많이 모으고 저장하는 ‘채움활동’이었다.

학습은 정해진 기간 안에 필요한 지식을 더 많이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해 저장하는 일, 그리고 필요할 때 꺼내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으로 여겨졌다. 교육과 학습은 이런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고, 각종 시험은 개인이 보유한 지식 수준을 비교·평가해서 줄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어려운 학습과정을 거치며 힘들게 채워넣은 지식을 비우고 지워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학습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지식은 수고로운 학습과정을 거쳐서 획득하고 축적해야 하는 소중한 자산으로 간주돼 왔다.

배리 오라일리가 펴낸 '언러닝'(위즈덤하우스)은 2023년 국내에 번역출간되었다.

그런데 정보기술은 모든 것을 연결하며 누구나 외부 저장장치, 검색시스템, 챗봇과 인공지능에 언제든지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열었다. 더욱이 무엇이건 질문만 하면 유창하게 답변을 쏟아내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는 ‘채움학습’은 효용성을 잃어버리게 됐다. 

새로운 정보를 뇌에 담기 위해서는 고인물처럼 낡아 쓸모없게 된 정보를 비우는 작업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 이후에야 재학습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다. 재학습을 위한 필수적 사전활동이 ‘비움학습’이다. “우리가 미래를 여는 능력은 얼마나 잘 배우는가가 아니라 배운 것을 얼마나 잘 비워내는가(unlearn)에 달렸다”라고 애플컴퓨터 펠로를 지낸 앨런 케이는 말했다. 

가정에서 침대나 텔레비전·냉장고와 같은 새 제품을 구매할 때 낡은 제품을 옮기거나 처분해 배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상식이다. 지식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사람 뇌는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낡은 지식을 비워야 새 지식이 들어올 자리가 비로소 생겨난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언러닝의 원리를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가구나 가전제품과 달리,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인지 과정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언러닝은 스스로 취약함을 감수하는 행위”

입력된 정보를 손상이나 변형없이 원형대로 보존하는 능력은 컴퓨터 정보처리의 특징이다. 그런데 사람의 불완전한 기억 능력은 비움학습 차원에서 보면 일종의 축복이다. 아르헨티나의 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완벽한 기억을 가진 사람의 불행을 다룬다.

청년 푸네스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망각하는 기능을 잃어버리고 완벽한 기억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불행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과거의 불행과 상처를 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보르헤스는 사람이 완벽한 기억을 갖게 되면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능력을 잃게 되고, 과거의 사소한 부분에 얽매여 현재 적절한 지식과 방법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완벽한 기억이 장점이 아니며, 언러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능력이 오히려 축복이다.

배리 오라일리가 ‘언러닝’의 성공 사례로 제시한 디즈니 테마마크 손목밴드. 디즈니는 하락세의 테마파크 사업을 살리기 위해 기존의 성공방식을 지우고 새로운 학습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사고방식을 관람객 입장으로 바꾸면서 연간 수익 24%를 늘린 손목용 매직밴드를 개발했다. 입장권, 숙박, 결제, 사진 촬영 등을 손목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액세서리다. 다양한 디자인으로 출시돼 원하는 스타일을 고를 수 있다. (사진=디즈니)

지식은 신선식품의 유효기간처럼 일정 기간이 지나면 쓸모없어지는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는 게 힘이다”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지식은 권력이자 자산으로 통했다. 우리가 살아온 사회는 졸업장, 자격증, 특정 직무경력 등 지식과 경험을 자산과 경쟁력으로 여기며 소중하게 취급해왔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획득했고 스스로 경쟁력이자 자산으로 여기는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싱귤래리티대학 교수이자 벤처기업 인큐베이터인 배리 오라일리는 “언러닝은 스스로 취약함을 감수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언러닝은 “확실히 아는 것을 내려놓고 불확실성 앞에 과감히 자신을 열어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배움도 산술적으로, 순차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져 있었다. 즉, 과거엔 배움의 목표가 ‘더 많은 정보’였다면 이제는 ‘더 적절한 정보’로 바뀌었다. 낡아서 더 이상 적절하지 않게 된 정보를 지워버리거나 비워버리지 못하면, 과거의 지식과 관점은 자산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과 적응을 방해하는 족쇄가 되고 만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과 정보가 쏟아지고 척척박사 챗봇이 일상으로 들어온 인공지능 세상에서 ‘지금 적절한 정보’로 업데이트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낡은 지식과 관행을 성찰하고 비우는 ‘언러닝’이 소중한 능력으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