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 칼럼] 이재명의 민생지원금과 흥선대원군의 당백전
"정책이 시장을 이길 수 없지만, 시장도 정부 정책을 이길 수 없어요. 그런 관계에 있기 때문에, 고삐를 놓아주면 담합하고, 독점하고, 횡포 부리고, 폭리 취하고 원래 그런 거잖아요. 조선시대에도 매점매석 했잖아요. 매점매석하는 사람 잡아서 사형시키고 그랬죠, 옛날에."
지난 9월 30일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말이다. 추석을 앞두고 물가, 특히 식료품 물가가 상승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부가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 대통령이 경제학 교과서와는 다른 경제 상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이미 충분히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 '중간 상인의 폭리'와 '매점매석'을 거론하며 '사형'을 운운하는 이 발언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듯하다.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농담으로라도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웃음기 하나 없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소름이 끼친다.
이 대통령의 '매점매석 사형' 발언을 보며 소름이 끼치는 이유는 또 있다. 10월 현재 물가 상승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딱 한 사람 꼽으라면 바로 이 대통령 본인이기 때문이다. 마치 불을 질러놓고 119에 신고하면서 범인을 찾아 사형시켜야 한다고 대중을 선동하는 방화범을 보는 듯 하다.
이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경제학적 상식을 확인해보자. 통화량이 증가하면 물가는 올라간다. 특정 시점에 존재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가운데 통화량, 즉 돈이 늘어나면 당연히 돈의 상대적 가치가 낮아지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물가가 올랐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돈의 가치가 낮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렇게 '돈의 가치가 낮아지는' 이벤트를 올해 벌써 두 차례나 겪었다. 취임 후 고작 100일을 넘겼을 뿐인 이 대통령이 '민생지원금'을 살포했으니 말이다. 1차와 2차 추경에 투입된 재정만 해도 35조원 가량이다.
민생지원금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연 매출액 30억원 이하인 업종에서만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껏 나온 지원금이 주식이나 부동산 등 '엉뚱한 곳'에 쓰이지 않게 하려는 취지다. 뜻은 좋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이다. 주로 생필품이나 식료품 구입에 민생 지원금이 쓰였으므로, 그쪽의 물가가 더 빨리 상승하는 것 또한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모기가 왜 들어오냐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보일러를 틀고 왜 방이 더워지냐고 불평하는 것 또한 단순한 희극적 상황일 수 있다. 하지만 이재명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국민 중 상당수와 야당의 반발을 무시한 채 민생지원금 살포에 나섰던 그가 '왜 물가가 상승하느냐'고 역정을 내다가 심지어 '사형'을 운운하는 건 도저히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왕 조선시대를 언급했으니 우리가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역사적 교훈을 떠올려 보자. 1866년(고종 3) 11월 조선에는 새로운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실제 가치는 상평통보의 대여섯 배에 불과했지만 명목상으로 그 100배의 가치를 부여해버린 '당백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경복궁을 중건하고 국방력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조선 조정은 재정을 크게 낭비했는데, 그 손실을 채우기 위해 아예 '돈을 찍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벌어진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실제 가치에 못 미치는 악화가 유통되면서 화폐 가치가 폭락했다. 화폐 가치가 폭락했다는 것은 물가가 폭등한다는 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당백전의 발행은 안그래도 힘들었던 조선의 민생을 더욱 도탄에 빠뜨렸다. 조선이 망할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당백전의 발행과 그로 인한 물가 폭등이 조선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25년 대한민국의 물가가 폭등한 이유를 딱 하나만 꼽자면 민생지원금이다. 당백전이 조선 말의 물가 폭등을 불러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그때는 그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을 조정에서 빨리 알아차렸다. 사헌부 장령 최익현이 용기있게 상소를 올렸고 당백전의 유통은 마침내 중단됐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 민주국가의 대통령을 임금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이재명 대통령은 수많은 언론과 학자들의 상소마저 무시하고, 심지어는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리면서, 사형까지 운운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더니, 지금 우리가 그런 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도저히 지우기 어렵다.
# 외부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필자 노정태는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이다.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앙일보, 서울신문, 신동아에 칼럼을 기고한다. '프리랜서', '불량 정치' 등을 썼으며, '아웃라이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칩 워' 등의 번역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