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일의 시사직격] 혐오의 극단화, 헤이트 스피치법이 필요하다
요즘 극우 성향의 일부 단체들이 ‘혐중시위’를 조직하며, 거리에서 중국을 향한 적대와 배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집회를 열고 확성기를 통해 “차이나 아웃”, “공산당 아웃” 등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하며 “중국인 입국을 전면 금지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는 지난해 윤석열의 12.3 계엄 선포 명분이기도 했다. 중국이 개입해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후 국회의 비상계엄해제와 탄핵, 현재 진행중인 내란재판 상황에서 혐중시위는 국민의힘의 비호 또는 동참아래 세력이 커졌다. 윤 대통령과 계엄을 옹호하는 극우의 목소리는 거리뿐 아니라 보수야당의 주요 논지이기도 하다. 특정 민족과 국가를 ‘위협’으로 명명하고 사회적 불안을 특정 집단으로 전가하는 방식은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혐오의 정치적 동원이다.
이 풍경은 낯설지 않다. 일본 사회는 이미 지난 20여 년간 ‘혐한시위’라는 형태로 이 문제를 경험해왔다. 2000년대 이후 일본 극우 단체 ‘재특회’는 “조선인은 일본에서 나가라”, “한국인은 범죄자 집단”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 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주장은 경제 불황, 역사적 적대감, 민족적 배타주의가 결합한 산물이었다. 이러한 시위는 단순한 사회적 현상을 넘어, ‘민족적 배제’라는 정치를 대중화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혐한시위에 제동을 걸었다. 2016년 국회를 통과한 ‘헤이트스피치 해소법’은 노골적 혐오 발언에 제도적 경고를 보냈다. 물론 이 법은 형사처벌 조항이 없어 비판을 받았으나, 적어도 공적 공간에서의 혐오 발언을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데에 의미가 컸다.
상징적 판례도 있었다. ‘우토로 마을 혐오 발언 사건’에서 교토지방재판소는 혐한시위 참가자들이 우토로 주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불법 체류자”, “범죄자 집단”이라 모욕한 행위가 주민들의 존엄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이들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었고, 이는 일본 사회에서 ‘혐오 표현’이 법적 심판대에 오른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특히 우토로마을에 불을 지른 방화범은 징역형 4년을 선고받았다. 마스다 게이스케 재판장은 "재일 한국인과 조선인이라는 특정 출신에 대한 편견과 혐오감 등에 기초한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것"이라며 피해를 생각하지 않고 폭력적인 수단을 썼다고 비판했다. 그 후 극우 단체들의 거리 시위는 급격히 위축되었고, 혐오 발언을 공공연히 외치던 풍경은 줄어들었다.
한국의 ‘혐중시위’와 일본의 ‘혐한시위’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첫째, 특정 민족과 국가를 ‘위협’으로 명명해 사회 문제의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이다. 혐중론자들은 중국인들을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간첩으로 동일시하는데, 이는 지난 계엄선포 당시 ‘중국인 간첩 99명 체포’했다는 가짜뉴스 사례가 대표적이다. 해당 뉴스를 보도한 언론사는 폐간되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중국인은 간첩과 동일시된다. 일본의 혐한론자들에게도 한국인은 ‘역사적 반일 세력’이자 ‘범죄 집단’으로 묘사된다.
둘째, 극우 정치세력은 이를 동원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정치력을 확보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한국의 일부 보수단체들이 혐중시위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듯, 일본의 재특회도 혐한시위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극우의 혐중론은 제1야당의 목소리와 궤를 같이한다는 데에 있다.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을 비롯해 나경원 의원 등 계엄내란을 옹호하는 보수당 정치인들이 혐중론을 주장하며 극우의 혐중시위에 힘을 보탠다는 점이다.
셋째, 경제적 불안과 국제 갈등을 민족주의적 적개심으로 전환하는 구조 역시 유사하다. 결국 양국의 혐오 시위는 단순한 사회적 해프닝이 아니라, 극우 정치가 혐오를 동원하는 방식의 복제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닌 전형적인 선동의 논리로 움직인다. 중국인 무비자 입국 정책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른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중국인 무비자 정책은 지난 해 윤석열 정부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 이재명 정부에서 시행된 것이다. 하지만 극우집단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 문제를 단순히 ‘혐오 현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혐오 시위는 경계를 둘러싼 투쟁이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은, 한국에서 조선족과 중국인은 ‘경계인’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다수 사회의 내부에 있지만 언제든 외부로 배제될 수 있는 경계선 위의 존재다. 언제든 배제될 수 있는 집단이다. 혐오 시위는 바로 이 경계인들을 다시금 주변부로 몰아내려는 폭력의 언어다.
폭력을 정당화 하는 경계짓기는 정치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나서서 경계짓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는 형국이니 우리는 다시금 민주주의를 말해야 한다.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북향민, 조선족, 고려인, 재미한인 모두가 각기 다른 경계 위에 서 있으나, 그 경계를 넘나드는 삶을 통해 ‘다름 속의 공존’을 체화하는 존재들이다. 삶의 역사적 경험이 다르다고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혐오 시위에 맞서는 일은 단순히 혐오 ‘억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 상상력을 확립하는 일이다. 한국 사회가 혐중시위에 무관용을 선언하는 것은, 단지 중국인을 보호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일본의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일본은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헤이트스피치법’을 제정해 제도적으로 보완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혐오표현을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차별금지법도, 헤이트스피치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는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국회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차별금지법은 단지 소수자 보호를 넘어, 민주주의 공동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경계다. 차별금지법에 논쟁적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를 멈추는 최소한의 합의는 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혐오표현 대응 조례를 마련하여 지방정부가 앞장서서 혐오 시위를 규제하고 피해자 지원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혐오에 맞서는 사회적 감수성을 확산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혐중시위는 단순한 사회 갈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칙을 시험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혐오는 사회를 분열시키고, 민주주의를 잠식한다. 법적 대응과 제도적 장치 없이 혐오를 방치한다면, 그 끝은 폭력적 배제와 공동체 붕괴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선택해야 한다. 혐오는 자유가 아니다. 혐오는 민주주의를 좀먹는 독이다. 혐오의 정치가 아닌 연대의 정치로 나아가 갈 때, 한국 사회는 한 단계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적 시민의 힘으로 내란을 종식한 시민민주주의의 힘으로 혐오에 맞서 민주주의를 견고하게 만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