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섬·짓밟힌 목소리, 연극 '낙월도'가 던지는 비극적 절규
[연극 평론] 2025년 서울의 무대 위, 전태일의 외침을 되묻는 연극 "낙월도" 전태일의 불꽃, 무대 위로 되살아나다...연극 "낙월도", 침묵을 묻다
1970년 11월 13일, 스물두 살 청년 재단사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와 함께 자신을 불태웠다. 그의 슬픈 사연은 단 한 사람의 분노를 넘어 한국 노동 현실의 어두운 민낯을 향한 절규가 되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2025년, 그날의 불꽃은 제10회 여성연극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연극 <낙월도>는 전태일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극적으로 재현하는 동시에,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권력·정보·계급의 구조를 날카롭게 고찰한다.
사)한국여성연극협회 강정숙 이사장은 천승세 작가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이 작품은 외부와 단절된 섬을 배경으로, 배를 소유한 소수의 지배층과 노동자 계층의 참혹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그려낸다. 섬의 핵심 자원인 ‘배’와 유일한 정보 통로인 ‘라디오’는 권력 독점과 정보 통제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작품 전반에 걸쳐 계급적 이동의 불가능성과 저항의 좌절을 드러낸다.
'배'와 '라디오'가 빚어낸 현대판 '지옥도'
연극 <낙월도>의 무대인 섬은 '배를 가진 자만이 떠날 수 있는' 고립된 계급 사회의 축소판이다. 섬의 권력은 배를 독점한 '최부자'와 '양서방' 단 두 명에게 집중되며, 이들은 유일한 외부 정보 통로인 '라디오'까지 통제한다.
정보의 단절은 곧 저항의 불가능을 의미하는 이 잔혹한 공간에서, 인물 '귀덕'은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전태일 분신 사건의 뉴스를 접하고 거대한 각성에 이른다. 이 지점에서 연극은 관객에게 냉혹하게 묻는다. "정보와 배를 독점한 자들은 공동체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낙월도> 속 '노잽이'(노동자)들은 늘 굶주림과 모욕에 시달리며 탈출을 꿈꾸지만, 권력으로 통제되는 단 여덟 척의 배는 그들의 삶을 묶어둔다. 이는 계급, 권력, 정보, 젠더라는 불평등의 작동 방식이 정교하게 배치된 우리 사회 구조의 냉혹한 축소판이다.
"나한테 그 노만 줘봐" 2025년의 '노동자 존엄' 외침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비참하게 짓밟힌 인간의 존엄을 대변하는 인물 '용배'는 '월순'의 비극적인 죽음을 마주하며 처절하게 외친다.
"나한테 그 노만 줘봐."
이 한 마디는 1970년 전태일이 외쳤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와 시대를 넘어 공명한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이라는 당연한 권리를 지키려 했다면, 용배는 '노'(배를 저어 탈출할 도구)라는 최소한의 '탈출 및 생존의 권리'를 갈망한다. 노를 갈망하는 용배의 절규는, 오늘날 권력과 정보의 독점으로 인해 '배를 갖지 못한' 채 침묵을 강요당하고 고립된 모든 이들의 비명이다.
이상희 연출은 ‘묵자’와 ‘청백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 서사에 다층적 의미를 부여한다. ‘묵자’는 두 명의 배우가 번갈아 맡아 동화적 서술을 제공함으로써 비극적 사건을 보다 친밀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반면 ‘청백이’는 초자연적 존재로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는 인물로 그려져, 죽음과 고통 앞에서도 인간적 숭고함을 환기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관객이 사건의 감정적 무게를 체감하도록 돕는다.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노동자 계층 대표인 ‘용배’의 절규로 수렴된다. “나한테 그 노만 줘봐.”라는 그의 외침은 단순한 도구에 대한 갈망을 넘어, 짓밟힌 존엄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읽힌다. 이 순간은 전태일이 남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메시지와 강력하게 맞물리며,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 속 침묵의 기원을 반추하게 한다.
<낙월도>는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노동 현실과 정보 불균형, 성별에 따른 노동의 취약성을 함께 윤곽화한다. 권력과 자원의 독점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공적·사적 차원에서 어떠한 책임과 행동이 요구되는지를 묻는다. 연극은 관객이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기를 기대한다.
전태일의 동생은 그를 ‘열사’가 아닌 ‘동지’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의 불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만 머물지 않고, 오늘을 사는 이들의 양심을 시험하는 지속적 질문으로 남아 있다. 연극 <낙월도>는 그 질문을 무대 위로 옮기며,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침묵에 익숙해져 있으며, 그 침묵 앞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공연은 10월 19일까지 이어지며, 관객들은 무대에서 던져진 질문을 각자의 삶과 공동체로 되돌아가 성찰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