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기는 새로운 꿈을 꾸는 것“ 구자승 작가
정물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11월25일까지 선회랑 개인전
“그림 그리는 작업은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다. 거기 그 사물(being)이 그 적절한 자리에서 하나의 필수불가결한 아름다운 대상이 되는 것, 그 대상들 하나 하나가 나의 분신이 되고, 내 잃어버린 꿈의 파편이 된다. 메마른 나무상자, 흰 보자기, 오랜 유물같은 바랜 주전자, 비워진 술병, 그리고 담겨지지 못한 자그마한 것들, 자갈,체리토마토, 레몬, 계란, 바랜 사진....”
일상 속 사물을 주제로 한 정물화에 집중했던 구자승 작가의 개인전이 11월 25일까지 선화랑에서 열린다.
“어느날 쓸모없이 버려진 나무상자에 술을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술병은 비워져 있다. 물기어린 자갈들을 하얀 보자기에 싸 말려주고 싶다. 담겨져야 온전해지는 것들, 담아야 그릇이 되고, 이름이 되고, 존재가 되는 것들, 그런 떠도는 일상의 사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주고, 더 아름답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그들 각자는 이미 생명을 상실했지만, 하나의 그림이라는 공간에 높여짐으로 의미있는 시적 오브제의 재탄생을 본다.”
구자승 작가에게 작업은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다. 메마른 나무상자, 흰 보자기, 바랜 주전자, 비워진 술병 같은 일상의 사물들은 이미 생명을 잃은 듯 보이지만, 그의 화면 안에서 다시금 숨을 쉰다. 화면 위에 피어오르는 미묘한 빛과 정교한 형태에는, 사물의 외형을 넘어 그것을 마주한 순간의 감정과 시간, 그리고 작가의 삶이 녹아 있다.
“예술은 우리의 삶처럼 깊이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듯, 나이와 함께 비로소 자신의 삶을 보게 되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는가 보다. 그리고 내 그림의 표정을 통해, 순간 지나가는 바람마저도 숨을 죽여야 하는 그런 초긴장의 상태에 도달하고 싶다. 어느새 내 시각이 미세한 색채와 형태에 신경이 곤두설 때쯤이면, 내 삶도 오브제들 속에 되살아난다.”
그는 숨을 쉬는 그림, 대상들이 주는 더 미세한 호흡을 찾고 싶다.
“상처 투성이의 아픈 심장을 가진 정물들을 나는 그림 속에서 치유한다. 가장 깨끗하고, 온전한 것으로 표현되어 새로운 힘을 잉태하고, 다시 하나의 커다란 힘에 응집되는 새로운 조화와 질서 위에 놓여나길 원한다.”
그의 작품속 극도의 정적 속에 투명하게 빛을 머금는 사물, 존재의 오브제들은 자유로운 유기체가 되어 감상자와 마주한다.
“ ‘사물이 거기 그 자리에 있다. 나 스스로도 개입하길 원치 않는 단지 거기 그 자리에 그들을 높여주는 일을 할 뿐이다. 그래서 굳이 내가 그들을 통해 뭔가 말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 리얼리티의 벼랑 끝에서 그것들은 이미 현실의 being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오브제에 빠져들면 우리는 미지의 공간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작품이 자신들의 자리매김과 저마다의 색깔로 빛을 발할 때쯤이면 그는 가끔 호흡을 멈춘다. 그들이 호흡하기 때문이다. 이내 절대긍정 망각의 세계에 빠져든다. 인간의 정신은 망각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한다. 그래서 자기긍정은 망각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
“혹 지나치기 쉬운 사실 안에서 가장 바른 사실의 긍정, 결코 억압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기망각의 공간, 결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참 긍정의 꿈의 영역, 이것이 내가 표현하는 ‘사실’의 세계이다.”
사실 서양 정물화의 미학사는 ‘사물의 외형 → 감각의 인상 → 존재의 의미’로 발전해왔다. 정물화는 결국 ‘사물을 통해 인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정물화의 미학은 사물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감각과 존재의 유한성을 성찰하는 예술이다.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말하는 그림이다. 구자승 작가의 정물(사실의 세계)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