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아름다운 무늬가 된 이광 작가
12월 20일까지 갤러리 마리 1년 레지던시 결과물 전시 어린시절 가정폭력 직시...호랑이가 된 자화상으로 승화
어린시절 작가의 집에는 낮에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창문으로 빛이 들어와도, 공기 속에 떠다니는 긴장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문틈이 흔들릴 때마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곤 했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는 예고 없는 천둥 같았고, 아무도 웃지 않는 집에서 침묵은 또 다른 소음처럼 울렸다. 스마트했던 아버지가 어느순간부터 도박과 술,가정폭력의 주인공이 되면서 안식처로서의 가정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12월20일까지 갤러리 마리에서 초대전을 갖는 이광 작가의 이야기다.
“엄마는 아빠가 때리기 시작하면 소리 없이 맞았다. 사람아닌 사물처럼 조그맣게 웅크리고 ‘아야’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엄마를 때리면, 내 쪼그만한 등으로 엄마를 덮쳐서 대신 맞았다. 그러면 몇 번의 발길질을 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한 아버지가 나가버리면, 불도 못키고 부엌에 숨어서 몰래 술을 마시는 엄마를 보게 됐다. 엄마의 얼굴에 검고 시퍼런 멍자국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동안, 나의 가슴에도 피멍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살면서 지장보살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옥에까지 가서 어머니를 구해오는 지장보살, 그녀가 늘 가여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작가의 작은 손에는 색연필 몇개가 꼭 쥐여 있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그걸 쥐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덜 흔들렸다. 종이가 있으면 종이에, 없으면 꼭 구겨진 광고지 뒷면에, 그마저 없으면 손등에 작은 선을 그었다. 그 선들은 그가 살아 있다는 작은 증표였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는 그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나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저릿하다. 그 아이는 늘 겁에 질려 있었으나, 동시에 기묘하게도 뭔가를 만들고 싶어 했다. 폭력의 소리가 울릴 때면 귀를 막는 대신 색을 칠했고, 두려움이 몰려오면 더 선명한 선을 그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 아이가 스스로에게 건네던 작은 속삭임이었을 것이다. ‘괜찮아, 조용히 숨 쉬고 있어. 너는 사라지지 않았어.’ "
시간이 흘러 그 어린아이는 작가가 됐다. 이제는 집이 조용해도 무섭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문 소리에 움츠러들던 그 아이가 여전히 살고 있다. 그는 가끔 붓을 들고,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천천히 색을 올린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그 아이가 손을 얹고 나를 도와주는 것 같다. 함께 과거를 다시 쓰고, 한 번도 울지 못했던 눈물을 대신 흘려줬다."
아이의 얼굴은 민화속에 나올법한 착한 얼굴을 한 호랑이 모습이다. 겉으로는 호랑이의 얼굴처럼 보이지만, 사실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초상이다. 호랑이는 강인함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두려움과 보호의 본능을 함께 지닌 존재이다. 그 모순된 감정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내면과 닮아 있음을 느낀다. 노란색과 주황색은 태양과 에너지를, 붉은색은 생명의 열기와 감정의 폭발을 의미한다. 머리 위의 붉은 형태는 열매이자 불꽃이며, 작가에게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상징이다. 하트무늬 장식은 작가를 지탱하는 따뜻한 감정들—사랑, 애정, 유대—의 흔적이다. 결국 작가가 내면의 호랑이를 마주하는 기록이다. 놀이 같기도 하도 동시에 치유의 행위 같기도 하다. 불화나 중세시대의 그림 느낌을 주는 이유다. 내면의 풍경,의식의 흐름 같은 그림이다.
“나는 고통을 미화하려 하지 않는다. 폭력은 누군가에게 남기는 상처보다 훨씬 더 깊은 침묵을 남긴다. 그러나 그 침묵을 그냥 두는 대신, 나는 색과 선으로 조금씩 흔들어 깨운다. 그러면 잠들어 있던 감정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아픔이지만, 더는 나를 삼키려 들지 않는 아픔이다. 예술은 그것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준다. 고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나를 덮어버리지 못하게 내 손 안에 올려두는 법을. 어떤 날은 작업 중에 문득 깨닫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집의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끔 캔버스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너는 잘 버텼어. 이제 내가 너를 안아줄게.’
“예술은 상처 위에 덧칠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예술은 살아남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다시 건네는 온도다. 나는 그 온도로 조금씩 치유되고, 조금씩 다시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나는 부서진 과거를 품은 채로도 충분히, 아름답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세상 사람들과 ,특히 약자들과 이를 공유하고 싶다.”
그는 이제사 아버지를 응시한다. 한 손에는 뭔가를 산 봉지를 들고, 한 손에는 담배를 물고, 제법 야무지게 잘 생겼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 쓸쓸했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를 단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신이 아니라, 아버지를 단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의 가슴에 타오르는 돌 같은 불을 끌 수 있을 텐데. 이 죄책감을 내려 놓을 수 있을 텐데. 시간은 돌이킬 수가 없다. 이 생에서는 기회가 없다. 그 보다도 더 불쌍하게 살다간 이 남자를 구해줄 길이 없다.
“상처가 꽃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지나야 하는지 나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다만,마음의 가장 어두운 곳에 희미한 빛 하나가 스며들 때가 있다. 그 빛은 말한다. 미움이 너를 지키는 듯 보이지만 결국 너의 가장 깊은 곳을 잠식한다고. 그래서 나는 내 안의 오래된 그림자를 조용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손바닥의 체온이 차가운 감정을 데우기 시작할 때,상처는 조금씩 모양을 바꾼다. 지우려 하지 않아도,없던 일로 만들지 않아도 그저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 흉터는 하나의 무늬가 된다. 용서란, 그 무늬 위에 다시 길을 그리는 일. 사랑이 닿았던 자리와 사라졌던 온기를 기억하며 새로운 선을 그어 나가는 일. 그리고 언젠가 그 무늬가 문양이 되어 내 삶의 결을 아름답게 바꿔놓을 때, 나는 조용히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선택한 작은 기적의 형태라고.”
아마도 그의 화폭이 작은 기적의 무늬들일 것이다.
이번 전시는 지난 1년간 갤러리 마리 레지던지 결과물을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독일 신표현주의의 대가 마커스 뤼퍼츠(Markus Lüpertz)의 수제자인 이광 작가는 1998년 유학이후 독일에서 작업을 이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