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일의 시사직격] '피고인'은 돈키호테에게 배우라
돈키호테와 윤석열
‘슬픈 몰골의 기사’와 ‘비겁한 몰골의 피고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근대 소설의 시효라고 할 만큼 대단한 소설이다. 한 늙은 기사의 망상을 좇는 해학극 같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관철해 나가는지 보여주는 장엄한 투쟁기다. 주인공 알론소 키하노는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명명하고, 비루한 현실을 기사도의 세계로 재편하려 했다.
소설 속에서 그는 우스꽝스러운 미치광이라 조롱받는 기사로 묘사되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필수 고전으로 읽히는 이유는 세르반데스가 책을 잘 써서기도 하지만 돈키호테가 비록 망상을 좇았으나 현실의 명예를 아는 기사도 정신이 높이 평가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망상 속에서조차 비겁하지 않았으며, 패배의 순간에도 하인인 산초 판사를 탓하거나 그의 뒤에 숨지 않았다.
망상을 좇았던 돈키호테를 한국으로 소환해보자. 우리는 곧 12.3 계엄내란 1주년을 앞두고 있다. 헌정사상 초유의 ‘내란’ 혐의로 법정에 선 피고인 윤석열의 모습은 돈키호테가 보여준 인간적 존엄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아 불쾌하면서도 안쓰럽기 짝이 없다. 어떤 면에서 윤석열은 망상을 좆았던 돈키호테와 닮았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괴물로 설정하고 싸우다 나뒹굴었던 슬픈 몰골의 기사였다면, 윤석열은 부정선거 음모론과 반국가세력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놓고 싸우다 형량 선고를 앞둔 비겁한 몰골의 피고인이 됐다.
윤석열의 법정 진술을 보면 한때나마 통수권자였던 지도자의 언어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오로지 형량을 줄이기 위해 위법한 명령에 따랐던 부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루한 겁쟁이의 언어만 난무하고 있다. 국민들은 재판 중계를 보면서 “이게 내란재판이 맞아?”라며 혀를 내두른다. 비록 망상과 싸웠을지언정 돈키호테는 숭고한 기사도 정신이라도 있었는데 피고인 윤석열에게는 어떤 책임도 지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돈키호테 기사도의 제1 원칙은 ‘책임’이다. 그는 1권 8장 풍차와의 전투에서 산초의 만류를 뿌리치고 돌진한다. 풍차를 괴물로 생각하고 돌진했다가 날개에 받혀 처참하게 나뒹굴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 차라리 “마법사 프레스톤의 소행”이라고 둘러댔다. 돈키호테는 “산초, 네가 나를 말리지 않아서 실패 했어”라거나 “로시난테가 멋대로 뛰어나가서 다쳤다”며 하인이나 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는 않았다. 돈키호테에겐 비장함도 있었다.
반면, 피고인 윤석열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는 12.3 비상계엄 당시 야당 대표와 국회의장 등 주요 정치인에 대한 체포를 지시했던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윤석열은 끌어내라고 말한 대상이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회 인원”이었다며 제2의 ‘바이든 날리면’을 시전하며 국민들을 우롱했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패배에 대해 과할 정도로 의미를 부여하며 책임을 졌으나, 윤석열은 자신의 지시에 따라 실행된 내란에 대해 부하들의 기억을 탓하고 있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이라 믿고 돌진한 것이 ‘망상’이었다면,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해놓고 체포 지시는 안 했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위증’이자 ‘기만’이다. 자신의 입으로 뱉은 명령의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일국의 통수권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윤석열은 법정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는 재판에서 계엄군이 국회의원들을 체포하려 했던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 모든 책임을 현장 지휘관들에게 떠넘겼다. 국회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위헌·위법적 계엄 포고령의 작성자가 김용현 전 장관이라고 했을 때부터 윤석열의 남 탓, 부하 탓은 계속됐다. 그는 처음부터 ‘정치인 체포지시’는 ‘홍장원의 공작’이라며 책임을 전가했고, 국회 유리창을 깨부수고 물리력을 행사한 계엄군들이 오히려 시민들한테 폭행을 당했다며 항변하기에 급했다.
돈키호테는 괴물(풍차)과 싸우다 다쳤지만, 윤석열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 국민을 위협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시한 적 없다”, “아랫사람이 한 일이다”라는 법정에서 쏟아내는 그의 말들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풍차 괴물과 싸운 우스꽝스러웠던 돈키호테가 보여줬던 기사도 정신과 책임지는 모습이 피고인 윤석열에게 없다는 것은 그가 진짜 괴물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