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의 민주주의 진보운동의 선봉 살아있는 대구 2.28 학생운동 주역 장주효씨의 3.1운동 이야기

강사 장주효(전, 대구대 이사)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토요마당(대표 이우백)은 2일 하동에서 지난 16일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에 대한 찬반론> 발제(서양사 이정희 교수)에 이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대구 2.28 학생운동 주역으로 참여했던 강사 장주효(대구대 이사)씨가 강의했다.

토요마당은 대표(한맥리더십아카데미 대표) 이우백씨와 총무 김정수(대구대교수) 외 운영위원 약간 명과 자율적인 회원으로 구성되었으며, 현대판 아고라모임처럼 성문화된 모임의 목적과 사업 및 회원에 대한 특별 자격규정 없이 민주적 통상절차와 관례에 따라 2003년 10월 이후 15년 이상 매주 1회 토요일 함께하는 모임이다.

‘토요마당’은 대구지역(달구벌)의 건강한 진보 인사와 합리적 보수 인사가 친목으로 소통하고 공유하며 함께 삶의 다양성을 나누는 가운데 지역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기여하고, 평화통일시대를 열어가며 동시에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열린 시민사회공동체 구현에 이바지한다.

더불어 대구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국가사회의 발전을 위해 지역현안을 제의하고 공유하며 대안을 모색한다. 자유로운 주제 발표와 토론 방식의 공과를 바탕으로 보편적 가치를 증진,사회공동체 의식의 함양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보다 실효성 있게 기여함에 목적을  두고있다.

사업으로는 ▲ 시대정신을 구현할 비전 및 가치 창출과 정책 개발을 위한 사업 ▲ 지역과 시민사회 리더십 구축 및 건강한 리더양성을 위한 사업 ▲ 지역 내의 교류 및 연대를 위한 사업 ▲ 자기 계발 및 상부상조 등 회원의 발전 및 성장을 위한 사업 ▲ 기타 본 회 목적에 부합하거나 목적 달성을 필요로 한다.

이우백 대표는 대구 2.28 학생운동 주역인 장주효씨 강의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소개하며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독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료를 설명을 요약했다.

총무 김정수(대구대 교수) / 사진 = 문해청 기자

◇ 다음은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 전문이다.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우리의 이 선언은 5천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2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기 위한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우리 민족이 수 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받은 지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 입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아, 그동안 쌓인 억울함을 떨쳐 내려면 지금의 고통을 벗어던지려면 앞으로 닥쳐올 위협을 없애 버리려면 억눌린 민족의 양심과 사라진 국가 정의를 다시 일으키려면 사람들이 저마다 인격을 발달시키려면 우리 가여운 자녀에게 고통스러운 유산 대신 완전한 행복을 주려면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이천만 조선인은 저마다 가슴에 칼을 품었다. 모든 인류와 시대의 양심은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방패로써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 싸우면 어떤 강한 적도 꺾을 수 있고 설령 물러난다 해도 이루려한다면 어떤 뜻도 펼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이 1876년 강화도조약 뒤에 갖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을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 문화민족을 야만인 대하듯 하며 우리 오랜 사회와 민족의 휼륭한 심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가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바로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 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쫒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이 바라지 않았던 조선과 일본의 강제병합이 만든 결과를 보라. 일본이 우리를 억누르고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을 만들고 있다.

과감하게 오랜 잘못을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서로 재앙을 피하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울분과 원한에 사무친 2천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동양의 안전과 위기를 판가름하는 중심인 4억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또 중국이 일본에게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이가!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은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새봄이 온 세상에 다가와 모든생명을 다시 살려내는구나.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 화창한 바람과 따뜻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

온 세상의 도리가 다시 살아나는 지금, 세계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우리는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과 진리가 나와 함께 나아간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

질의하는 강보향 / 사진 = 문해청 기자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우리를 지켜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

세 가지 약속. 하나, 오늘 우리의 독립선언은 정의와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번성하며 살아가려는 민족의 요구이니 자유로운 정신을 드날릴 것이요 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멋대로 하지 마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을 세운지 사천이백오십이년 삼월 초하루(1919년 3월 1일)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성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이상 끝>

◇ 다음은 “독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요약이다. 독립의 정의는 남에게 의존하거나 속박 당하지 아니함과 나라가 완전 자주권을 가짐이며 개인이 한 집안을 이루고 완전히 사권(私權)을 생사함과 독자적으로 존재함이다. 또는 다른 나라에 의해서 다스려지거나 통치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남이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 도움을 받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을 삶을 살아가는 능력으로 밝혔다.

“독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언은 자유는 영혼의 산소이다. 자유는 주어질 수 없다. 그것은 성취되어야 한다. 독립은 행복이다. 진정한 독립과 자유는 다만 옳은 것을 행하는 대서만 존재할 수 있다. 민족성은 정치적 독립의 기적이다. 인종은 신체적 유추의 원리이다.

자유의 진정한 특성은 힘에 의해서 지탱되는 독립이다. 참지 못함(조급증)은 예속이 아니라 독립의 징표이다. 불의(不義)는 결국 독립을 산출한다. 독립은 정치적 개념이지 생물학적 개념은 아니다. 신(神)은 당신을 자유롭게 만들기로 약속했다.

신(神)은 당신을 독립(獨立)적이게 만들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독립은 명예(名譽)처럼 해변이 없는 바위 많은 섬이다. 독립(獨立)의 대가는 자주 고립(孤立)과 고독(孤獨)이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군가에 너무 많이 의지하지 마라. 왜냐하면 너 자신의 그림자조차도 네가 어둠 속에 있을 때 너를 떠난다. 라고 독립(獨立)을 규정했다.

◇ 다음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강사 장주효(대구대 이사)씨의 강의 내용 전문이다.

김주태 선생, 박찬석 총장, 감창덕 고문 , 이용수 선생 / 사진 = 문해청 기자

첫째. 3.1 만세운동 발단 배경과 요인은? 무엇인가?를 밝혔다. 3.1만세운동(기미독립만세운동, 기미혁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細流가 모여 大河를 이룬 우리민족의 최대 민족운동이자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 발단배경은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서거... 독살설으로 민심이 흉흉, 문상객 상경이 2월26일 3천명, 27일 6천명. 한편 신한국청년당 등은 “나라를 일본 놈에게 넘긴 자에게 무슨 조문이냐”

2) 거사준비는 (1) 상해에서 1918년 8월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 조동우 등이 중심되어 新韓國靑年黨 결성( 크레인 (Charles R .Crane) 조언) (2) 김규식 대표단 파리 강화회의 파견 (1918, 2,1-3.13 파리도착) 독립청원서 제출 시도: 일본의 반인륜적 무단통치의 실상 폭로 등 언론 및 외교활동_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 원칙’을 크게 기대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1차 대전 승전국들의 ‘잔치’성격이라 패전국 독일과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사이에 440개 조항이 체결됐다. 따라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도 패전국 독일에 속한 일부 식민지에만 적용되었을 뿐이다.

이에 승전국 일본, 프랑스 식민지에 속한 한국과 안남(越南)과 영국에 속한 이집트 등의 독립문제는 ‘국내문제’라고 거론조차 못함. 따라서 우리는 ‘베르사유 조약’을 ‘베르사유의 배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같은 베르사유 배반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만세시위운동의 추동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러나 시위운동에 참여한 일반대중들의 만세시위 물결은 그 해 말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일제가 시위대를 폭압적으로 진압하자 되레 운동력은 더욱 고양되어 무력적 투쟁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만주를 비롯해 러시아 연해주 일대 와 일본 등 해외 한인동포 거주 지역에서도 항일만세 운동이 가열 차게 추진됐다. 세계1차대전 종전에 앞서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결과 동구유럽권의 여러 나라 즉, 체코슬로바키아, 항가리, 폴란드 등이 독립선언을 했다.

이에 고무된 만주지역과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동포 한인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1919년 2월 대조선독립단을 결성하고 박은식, 조소앙 등이 기초한 ‘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했다.

여기에서“우리 해외독립군은 국내 동포의 위임을 받아 ‘肉彈戰爭 ’의 항일 독립전쟁을 벌릴 것”을 선언한다. 이와 거의 같은 해인 동년 2월 8일 동경유학생들이 ‘ 2.8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이것이 국내에 전해졌다.

이 무렵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선우혁을 파견, 이승훈 등 국내인사들과 접촉했다. 동시에 천도교도 1919년 1월 20일 경부터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과 비밀모임 후 손병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원칙, 곧 운동의 대중화, 일반화, 비 폭력화를 정하고 대표단을 선정했다.

남상대(민화협) / 사진 = 문해청 기자

둘째. 민족대표 선정과 운동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는가?를 밝혔다. 3.1운동하면 흔히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이 종교계 대표가 떠오르지만 처음부터 이들이 대표로 선정된 것은 아니다. 본래는 당대 대중적 지명도가 높았던 인사들, 한규설, 박영효, 윤용구, 윤치호 등이 대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같이 고사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은 예외 없이 종교인 (천도교계 15인, 기독교계 16인, 불교계 2인)으로 구성됐다. 또한 다른 이유는 일제의 무단 통치에 대항한 전 민족적 전 계층적 저항의 ‘불길’이 요인이었고 이는 33인 대표 중에 양반계층은 한사람도 없다.

3.1 만세운동과 같은 전 민족적인 비밀거사의 준비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는가? 천도교 측이 제공(5천원, 당시 교당 건축성금으로 1백만원 비축) :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여자들은 삯바느질 품삯을 모은 돈이다. 사실 말씀이지 기미년 독립운동은 천도교 돈이 아니었으면 되지 않았을 것이다.”(주옥경, <독립선언 반세기의 증언>, 신인간, 1969년 3월호)

이렇듯이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은 국상을 당한 백성들이 스스로 궐기한 민중운동이다. 그 추동세력도 특정한 종교계가 아닌 종교계연합, 연대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그러나 지도부가 종교계로 한정되어 운동력이 ‘나이브’했던 점도 없지 않았다.

셋째. 시위첫날의 모습 그리고 민중들은 왜 나섰나?를 밝혔다.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 중 29명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김병조 불참)이 태화관에 모여 최남선이 초안한 독립선언서를 이종일이 낭독했다. 이어서 최린이 일제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의 사실을 통보하고 잇달아 곧 경무총감부에 구속됐다.

한편 탑골공원에 모인 대중들은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곧 시가행진에 돌입. 윤치호는 그날의 광경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술했다.

“거리를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광장(지금의 종각 앞 사거리)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이 시위와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회관(YMCA)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곧 바로 군인, 기마경찰, 형사, 헌병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김상태 역,“윤치호 일기” (1919-1943), 77-78쪽; 윤경로,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 개정증보판, 434-435쪽).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라는 윤치호의 소회는 당시 누구보다 국제적 역학관계와 일제의 통치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솔직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당시 지도급 인사들은 ‘독립 무망론’, ‘독립운동 무용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역사진행과 발전이 당시대 지식인들의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예언과 우려의 시대인식을 뛰어 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었다. ‘3.1거사’ 역시 그러한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후 시위 불길은 마른 들풀에 불을 댕기듯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고경하, 이미정, 최창희, 박정희, 마태식 기자 / 사진 = 문해청 기자

이후 한인이 거주하는 세계 각국 도처로 ‘불꽃’이 확산됐다. 그해 3월 초부터 5월 말까지 계속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수를 일제측이 50명 이상이라고 제한했다. 참가자가 연인원으로 200여만 명이 넘었다고 추정했다.

이렇게 많은 수가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무단 통치로 예를 들면 기포성산(碁布星散)과 같은 헌병경찰제등의 횡포 등이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넷째. 3.1정신과 역사적 의의는?를 밝혔다. (첫째) 자주독립정신은 <3.1 독립선언서> 첫 대목은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이 정신은 현재 분단시대, 다시 말해 주변 열강의 역학관계 아래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할 때 자주독립의 3.1정신은 기리 계승할 것임

(둘째) 자유민주정신은 <독립선언서>에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함’이며 ‘오직 自由的인 精神을 發揮할 것’이라 천명했다. 즉 자주독립국을 세우려는 근본목적은 “조선인이 본래부터 지켜온 自由權을 지켜 왕성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려한다“(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는 말은 곧 자유와 민주정신을 담보하지 않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은 3.1정신이라 할 수 없다.

(셋째) 인류공영의 평화정신은 <독립선언서>에 “조선의 독립은 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이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중국 또한 몽매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東洋平和로 世界平和와 人類幸福에 필요한 階段’ 다시 말해 향후 한.중.일 3국이 동양평화를 이룰 때 인류행복, 인류공영의 평화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안중근, <東洋平和論>과 맥을 같이함)

(넷째) 우리 민족이 나아갈 비전제시를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來하도다.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投射하기 始하도다”에 잘 나타나 있듯 또 하나의 3.1 정신은 우리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희망과 꿈과 비전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음침한 옛집(古巢)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흔쾌(欣快)한 復活’의 빛을 향해 힘차게 나가자”는 희망찬 꿈과 비전 제시했다.

끝으로 ‘혁명정신’은 3.1 운동의 결실로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태동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여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체를 민국공화제(民主共化制)라고 했다.

이는 과거 황제가 통치하던 ‘帝國’에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인 ‘民國’ 곧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나라를 세움, 한 마디로 ‘帝國에서 民國으로’의 역사발전은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다.

◇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의의를 밝혔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주공화제로 출발했다. 상해 독립임시사무소에 모인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들은 1919년 4월 10일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꼬박 하룻밤을 새워가며 국호를 제정하고 헌법을 만들고 정부 수반을 선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송필경 원장, 고경하 시인, 이미정 극단예전 / 사진 = 문해청 기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이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 1조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정체이자 국체이며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제헌의회라 할 수 있다.

<임시헌장 및 임시헌법 10조개 조항 중 중요조항> 1조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로 함. 3조 :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 5조 : 대한민국의 인민으로서의 공민(公民)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음. 8조 :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 조항 때문에 여운형등은 참가하지 않음)

9조 : 생면형, 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폐함. 10조 :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년 내 국회를 소집함. 대동단결선언문 (1917) “경술년(1910) 융희황제(순종)의 주권포기는 즉 아(우리) 국민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이니 아(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주권)을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고로 이천만의 생령(국민)과 삼천리의 구강(국토)과 사천년의 주권은 오인(우리)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요 상속할 터이니, 오인(우리) 동지는 이에 대하여 불가분의 책임이 중대하도다.”

대동단결선언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고조선 이래 ‘사천년의 주권’이라는 고유주권설을 창안하고, ‘황제주권포기 국민주권수수’설을 창안하여 우리 민족의 대동단결기관으로 재외 동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했다.

둘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통치활동을 했다. 영토도 없고 국민도 많지 않은 임시정부였지만, 임시정부 수립 직후부터 국내 의 장악에 나섰고 그 주된 역할을 초대 내무총장 안창호 중심으로 추진했고 연통부(聯通府)와 교통국을 설치운영, 군자금모금 등이다.

셋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외교활동을 했다. 임시정부 초기 대외적인 외교활동에 주력. 1918년 11월 조직된 신한청년당, 1919년 2월 초 김규식을 파리로 보내 국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국민당정부 수립 이후에도 일본의 견제에 쫓긴 중국정부의 소극적인 정책으로 협조체제를 마련하지 못하다가,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본격적인 외교와 협조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미국에 대해서는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국 의회와 정계에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러시아에 대한 외교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레닌(Lenin)에게 요청하여 200만 루불의 자금을 지원 받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가장 큰 외교 업적은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일제 패망 이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 받는 성과를 올렸다. 김구 주석과 외교부장 조소앙의 노력으로 카이로 영수회담에 참석하는 중국대표 장개석의 동의를 받았다.

또 장개석의 열성적인 지원으로 미국대표 루즈벨트와 영국대표 처칠의 양해 아래 얻어진 성과였다. 비록 ‘적절한 절차 (in due course)’라는 경과 조치를 두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중 식민지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을 보장 받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허노목,이헌태 등대화 / 사진 = 문해청 기자

넷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을 했다. 동시에 1919년 말부터 군사 활동 계획을 수립. 상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군사간부 양성 작업에 나섬. 육군무관학교는 1920년에 1기 19명과 2기생 24명을 졸업시킨 뒤 재정적 어려움으로 폐교되었다.

미주에서는 군무총장이던 노백린이 재미동포 김종림의 지원으로 1920년 2월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비, 비행사를 양성하여 공군을 창설되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삼아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과 연계하여 독립전쟁을 전개되었다.

이 결과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 군무부산하 조직, 또한 서간도의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대. 대한독립군비단. 대한독립단 등을 통합하여 광복군총영을 조직하고, 1924년 초 군무부 직속의 육군주만 참의부 설치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는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중경에 도착하기 1년 전인 1939년 11월 서안으로 군사특파단을 파견하고 이후 중국정부와 교섭, 중경에 도착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공동작전을 수행, 인도. 버마전선에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작전에 나섰다. 또한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 훈련하여 미 전략첩보국과 합동으로 공작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한인청년을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시키고자 계획하였다. (장준하, 돌벼게).

다섯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열투쟁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가운데 특이한 점은 義烈鬪爭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의열투쟁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역사 발전과 변혁, 혹은 민족 독립과 해방, 나아가 인류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무력투쟁방법이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임정이 의열단투쟁에 나섬.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한중 양민의 갈등을 일거에 해소하고 독립운동에 화기를 불어넣기 위해 특무공작을 계획, 임정 직속의 의열투쟁 조직으로 한인애국단을 결성, 특공작전을 펼쳤다.(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살 의거, 동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이봉창, 윤봉길 의거로 중국 인민들의 오해도 풀려 한중 양민이 항일 연대투쟁을 구출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나아가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가 재인식하게 됨은 물론 국내외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조시켜 독립운동이 활기를 띠게 만들었다.

◇ 다음은 대한민국 100년의 의미를 밝혔다. 2019년, 내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00주년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대내외에 공표한지 100년이 되고, 또 ‘왕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대전환을 이룬 지 100년이 된다는 얘기다.

이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의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립은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고 선 이래 대한제국까지 우리나라는 군주(왕)가 주권을 갖는 전제군주국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립으로 주권은 우리 국민 모두가 갖고, 주권을 가진 우리 국민 모두가 화합하여 정부를 세워 나라를 운영하는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독립운동시기에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의 꿈과 국민주권의 이상을 담아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민은 노예 상태에 빠져 있고, 주권은 빼앗기고, 영토는 강점당한 그야말로 척박한 땅 위에 희망의 나무를 심은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것을 근대국가의 조건을 따져 국민, 주권, 영토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므로 ‘근대 국가와 정부’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자기비하라 하겠다.

고경하, 이미정, 최창희, 박정희, 마태식 기자 / 사진 = 문해청 기자

더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3.1독립선언과 독립만세 혁명의 결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15 광복의 그날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우리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지도기관으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보장받기 위한 외교활동,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일본군과 직접적인 무장투쟁, 동포 자제들을 위한 민족교육,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인도와 정의를 부르짖은 의열투쟁이다.

나아가 국내외 동포들을 아우르며 민족독립의 날을 열어갔다. 이 같은 가시밭길 독립운동의 역정에는 온갖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민족독립을 포기한 적도 민주국가의 길을 버린 적도 없었다.

한편 일제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군을 창설하였다. 바로 한국광복군이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연합국과 합세하여 싸웠다.

중국국민군의 대일 항전을 지원하고, 영국군을 도와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미국 OSS(전략첩보국)과 연합으로 국내 정진작전을 추진한 것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동은 3.1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26년간이라는 장구한 인고의 고통을 견디며 독립투쟁을 벌린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그 사례를 찾기 어려운 우리 민족사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라 하겠다. <참고>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로 (7차례) 상해;1919.4ㅡ항주;1932.5ㅡ진강;1935.11ㅡ장사;1937.11ㅡ광주;1938.7ㅡ유주;1938.10ㅡ기강;1939.3ㅡ중경;1940.9

◇ 다음은 백범 김구의 투쟁 140년사를 밝혔다. 첫째. 왜 백범을 연구하나? 올해는 白帆 金 九선생이 탄생한지 142년이 된다. 지금 새삼스럽게 백범 선생을 연구해야하는 것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를 기리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까닭이 있다.

(첫째) 백범의 생애는 시간적으로 한민족의 근대화가 진행된 과정, 즉 외세에 의한 개항과 일제의 침략 및 남북의 분단과정과 일치하고 있다. (둘째) 또 백범 개인의 생애 가운데 이렇게 한민족이 맞닿았던 조건과 그 반응이 전체적으로 함께 담겨져 있다.

(셋째) 뿐만 아니라 백범의 생애 가운데 우리 민족의 주체적 발전의 방향이 새겨져 있다. (넷째)그리고 백범이 맞닿았고 넘어서려고 몸부림쳤던 그 문제들이 기본적으로는 지금도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더구나 백범이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풀기 위하여 행동하였던 방식에서 전형적인 한민족의 몸짓을 찾을 수 있다는데서 다른 어떤 개인의 연구와는 다른 뜻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의 투쟁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째) 동학혁명에 가담한 반봉건 투쟁 (둘째)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독립해방 투쟁 (셋째) 분단냉전체제에 도전한 자주 통일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각 단계는 민족적 현실 전개의 각 단계와 대응하고 있다.

박진관 기자 / 사진 = 문해청 기자

둘째. 반봉건 동학무력혁명에의 가담했다. 백범의 가계는 한 때 양반계층에 속하였기는 했지만 몰락하여 압박과 빈곤 속에 허덕이던 상민 출신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부패한 조선말엽의 봉건제도로는 자기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조의 마지막 과거에 응시했으나 몸소 그 부패상을 느끼는 것으로 끝내 낙방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백범은 18세 때 동학에 들어가 곧 소년 접주가 되어 동학2세 교주인 海月를 만나려 報恩으로 갔다. 이 때 이미 全捧準은 혁명을 일으켰고 이때까지 혁명에 무력가담을 하지 않고 있던 백범이 속해 있던 東學北接도 혁명에 가담할 것을 결의했다.

황해도로 돌아 간 백범은 곧 斥洋斥倭의 깃발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켜 왜병이 섞인 관군과 무력대결을 하며 동학혁명에 가담했다. 이처럼 백범이 공적생애의 첫발을 동학혁명에의 가담으로 출발했다는 것은 매우 눈 여겨 보아야 할 사실이다. 동학은 반봉건 반외세의 근대화운동에서 민중을 토대로 삼고 있었다.

그 운동방향이 상류층을 바탕으로 하고 있던 두 줄기“開化派”나 “斥邪派”의 반동적 측면을 거부하고 전진적 측면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즉 개화파의 진보적 측면은 받아들이되 의존적 측면은 거부하였고, 척사파의 자주적 측면을 받아들이면서 수구적 측면은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이미 백범은 뛰어난 군사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이처럼 무력투쟁의 방법을 택하였던 것 또한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훗날 백범은 기독교에 관계하기도 하고 승려 생활을 한 적도 있으며 또한 교육운동이나 정치단체 활동을 투쟁방법으로 삼은 적도 있었다, 동학혁명에 무력투쟁으로 몸을 일으킨 사실은 그에게 중요한 점이며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셋째. 臨政의 反日帝武力單體化 백범은 그 뒤 일인 장교를 타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아 감형이 되었다가 탈옥하여 전국을 유랑하기도 하고,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신교육운동과 新社會라는 종합지에도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합병으로 국내에서 反帝運動이 발붙일 땅이 없게 되자 上海로 건너가 임정에 가담하였다. 백범의 임정활동은 3.1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臨政의 法統을 主席으로 최후까지 유지하였다는 것 말고 임정을 抗日武裝 투쟁단체로 변화시겼다는 데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범이 임정을 맡은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및 해방까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굳혀져 국내외의 항일투쟁은 명맥을 이어나가기조차 어렵게 되고 더구나 일제의 萬寶山事件 조작을 비롯한 이간책으로 중국국민에게도 동정을 얻지 못한 극히 고립무언에 빠진 때였다.

이럴 즈음 백범 김구는 尹奉吉, 李奉昌의사 등의 暴熱屠倭 전략으로 안팎의 관심을 모음으로써 빈사에 빠진 항일독립운동에 새 힘을 불어넣게 되었다. 조국에 있던 동포들은 독립운동의 건재를 알게 되었고 중국국민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으며 美洲 등지의 동포도 다시 독립운동을 돕게 된 전기가 된 것이다.

조직적 항일투쟁이 불가능한 정세 아래에서 이러한 테러 투쟁으로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뜻 깊은 일인 것이다. 그 뒤 중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일제와 독일에 대하여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41년 12월 9일 對日宣戰 45년2월 對日獨宣戰)

광복군의 조직을 강화하여 연합군에 가담,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半島奪還戰에 참여할 것을 꾀했다. 아마도 이러한 백범의 소망이 이루어졌다면 한민족은 훨씬 다른 위치에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고, 美蘇의 점령이나 분단을 극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넷째. 反 兩極體制 自主統一운동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1938년)에 식민지의 세력은 지구상 육지면적의 32.6%, 인구는 세계 총인구의 33.1%에 달하였다. 여기에 중국과 같이 반식민지 상태에 있는 나라를 합친다면 제국주의 압박 아래 있던 나라와 사람은 더욱 많았다고 하겠다.

따라서 2차 대전의 연합군 승리는 한편으로서는 반제국주의 세력의 승리로도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했으며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미 사상적으로 좌 또는 우로 기울어져있는 일부 세력은 각자 그 나름으로 사태를 판단하고 전망하였다.

우익은 미국의 승리로 받아들이고 좌익은 소련의 승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우익이 미군의 진주를 환영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좌익도 소련의 진주를 찬양하였다. 오직 白帆만이 남북을 분할한 외세의 군사적 진주는 곧 정치적 진주로 굳어질 것을 내다보고 우리를 해방시켜준 은인의 수중에서 다시 해방되어야 한다고 갈파하였다.

아마도 2차 대전 뒤의 미소양극 체제를 후진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대한 장애로 파악한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보편화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로는 세계민족주의자 가운데서도 선구자적인 인식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미소양극체제를 우리의 독립발전에 대한 모순으로 파악한 백범은 우리의 분단이 또한 외세에 의한 것임을 명백히 하면서 분단과 외세를 극복하는 통일과 독립이 또한 하나의 길임을 일관하여 주장하였다.

“통일이 없으면 독립이 없고 독립이 없으면 통일이 없다”는 말은 백범의 해방 이후의 전 정치활동을 요약해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특히 분단이 몰고 올 사태에 대한 전망은 지금도 주목해 마땅하다.

즉 백범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다시 찾은 어머니와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이제 그 아들과 남편을 다시 전장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토요마당 참석자들 / 사진 = 문해청 기자

或曰 南征 或曰 北伐 하지만... 이 전쟁은 동족의 피를 팔아 倭敵을 살릴 뿐이다”(48.2. 3천만에 泣告함)고 한 말은 과연 그 뒤 정세의 발전이 이러한 전망을 어떻게 증명해 주었는가를 상기할 때 섬찟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 뿐이라. 대중의 기아와 가정의 離散이 있고 동족의 相殘까지도 오게 된다”(48.2. 24남북회의에서의 연설)고 銳利하게 앞날을 분석한 백범이기도 했다.

이러한 백범이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구차한 안일을 구하여 單選單政에 협력할 수 없다”(3천만에 泣告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남북협상이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은 백범의 말대로 “실패가 있다면 전민족의 실패요, 성공이 있다면 전민족의 성공”(48년 4월, 20會談차 北行을 떠나며)이 아닐 수 없었다.

白帆의 해방 이후의 활동을 일러 비현실적이라고도 평가한다. 물론 정치를 권력 장악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유가 있다고도 하겠으나 그 자신은 그러한 현실론을 “一進會式 현실주의”(48년 3월 20일 越南동포에게)라고 단정하였다.

남북협상도 실패하고 남북 양쪽에서도 單選單政이 들어선 뒤에도 백범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통일열망은 성장할 것“이라고 하면서 통일운동을 계속하였다. 만년에 백범 김구가 즐겨 쓰던 글귀는 하나같이 사명당의 시였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며 모름지기 비틀걸음을 말지니 오늘 내가 가는 발자취 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蹹雪夜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踖 遂作後人程 오늘 우리의 문제와 백범 김구 선생이 몸으로 새겨둔 이정표를 다시 생각해 본다. (경북대학보 ,1976,4,1.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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