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은 기자 ] “정통성이 취약하고, 군부를 쉽게 복종시킬 수 있는 쿠데타 집권 세력과, 정통성이 확고하고 군부가 지배 대상이 아니라 설득 대상이었던 민간 정부 중에서 누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이처럼 월남파병과 한일협상만 봐도 박정희는 절대로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7일 “‘박정희주의’ 이념은 역사를 왜곡하고 현실을 오도하고 있다.”며 한국사회에 과도하게 뿌리내린 ‘박정희 신화’를 깰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했다.

소위 박정희가 독재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경제는 살리지 않았느냐는 ‘박정희 신화’는 자유한국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결정적 요소기도 하다.

이런 신화는 IMF 경제위기 이후 <조선일보>와 같은 족벌언론들이 부추기기 시작했으며, 결국 허위 과장된 ‘박정희 신화’로 탄생했다. 이같은 고도경제성장에 대한 향수는 이명박근혜 정권 탄생으로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신화’는 박근혜 국정농단 이후 그보다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자한당의 굳건한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니 자한당이 ‘중범죄자’ 박근혜를 버릴 수 없는 이유고, 태극기모독단을 적극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친박세력들이 여전히 큰소리치는 이유기도 하다.

이종걸 의원은 “자유‘한국’당은 나라를 팔아먹고 자유‘외국’당이 되어도 30%의 지지는 받을 것이란 말이 있다. 그 기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노선과 업적에 대한 무비판적인 지지심리가 존재한다. 5.16쿠데타가 58년, 사망한지 40여년이 되지만, 박정희는 여전히 현실정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우파 정치인”이라며 만들어진 ‘박정희 신화’가 여전히 굳건함을 언급했다.

 5.16 군사반란이 ‘한국이 시작된 출발점’이라느니 ‘박정희의 기적의 리더십이 없었으면 한국은 잘 돼도 태국 정도일 것’이라고 우긴 <조선일보>의 시각과 관련해, 이 의원은 “동의할 수 없다”며 “5.16 쿠데타가 없었어도 현대적인 발전국가의 기틀이 잡혔을 것이고, 군부독재 리더십이 없었어도 한국경제는 고도성장했을 것이고, 박정희가 없었어도 오늘날 대한민국은 가능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일수교를 위한 한일협정은 시작부터 굴욕이라는 비난을 사야 했다. 이종걸 의원은 정통성이 없는 군사정권이 아닌 정통성이 있는 민간정부였다면 훨씬 유리하게 협상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KTV

그는 박정희 정권 초기 1960년대를 언급하며 “경제사 연구에 따르면,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로 발전하려면 지본의 ‘본원적 축적’이 필요하다. 한국경제에서 본원적 축적의 앙대 재원은 ‘한일국교정상화’에 따른 대일청구권 자금과, 월남파병(베트남 파병)에 따른 경제적 대가로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일수교와 월남파병은 애초엔 없었는데, 박정희의 의지나 결단으로 성사된 것이 아니다.”라며 “1960년대 초반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한국에서 누가 집권하건 반드시 해야 할 것이었고, 미국 원조가 없었다면 붕괴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은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박정희가 아닌 누구였어도 할 수밖에 없던 일이라고 언급했다.

이 의원은 “즉. 한일수교와 월남파병은 시간문제였을 뿐 결국 어느 정권이라도 응해야 했다. 그렇다면, 당시 박정희의 공과는 미일로부터 얼마만큼의 반대급부를 끌어냈느냐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럴 때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정권의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미국 일본에 많은 양보를 했어야 했기 때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국민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몰래 모두 잠든 새벽에 군을 이끌고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였던 만큼, 더 많은 것을 미국과 일본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집권초기 박정희는 ‘화폐개혁’ 대실패와 정치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벌어진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워커힐호텔·파칭코·새나라자동차) 등으로 거센 비난을 사고 있었다.

“대일청구권 협상은 상대에게 박정희가 쥔 패가 다 읽히는 게임이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이후 온갖 탈법을 동원해 대통령이 됐지만, 집권 몇 년이 되도록 경제개발 자금 부족 등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신악(新惡)이 구악(舊惡) 보다 더 하다는 원성이 자자했고, 1967년 재선도 녹녹치 않은 상황이었다. 정권을 잃으면, 박정희는 쿠데타와 집권 후 부정부패·불법행위로 큰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권재창출에 사활을 걸어야했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줄 개발자금이 절실했다. 뻔한 사정을 아는 일본은 ‘청구권’ 금액을 낮출 수 있었다. 만약 민간정부가 협상주체였다면, 박정희보다 유리하게 협상을 타결했을 것이다.

베트남 파병에 참여한 군인들에겐 수당이 얼마 지급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장병들의 전투수당 대부분을 착복&#54720;다는 논란이 매우 짙다. ⓒ 노컷뉴스

“월남 파병에 대해서도 그가 대한민국 국익을 위한 최적의 협상가였는지를 근본적으로 따질 수 있다. 박정희에게 월남파병은 미국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서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내어 쿠데타로 집권한 태생적인 정통성 부족을 해소하고, 파병에 따른 경제적 급부도 제공받는다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이득이 있었다. 박정희에겐 큰 이익이었지만, 한국 전체로 보면 대차대조표가 달라진다. 당시 정통성이 확실한 민간정권이 집권했다고 가정해보자. 민간정부라면 미국 측에 파병을 하려면 군부가 설득되어야 하고, 위험한 배트남 전장으로 가려면 미국은 대가를 더 지불해야 한다는 요구를 더 강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월남파병과 한일협상만 봐도 박정희는 절대로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없다”며 “민주당이 중도적 국민에게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박정희 바로알기 논쟁을 제대로 해서 박정희에 대한 과대평가와 신화화를 깰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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