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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시지불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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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시지불견
  • 김덕권
  • 승인 2017.05.2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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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불견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시지불견(視之不見) 청지불문(聽之不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로「視之不見 聽之不聞 搏之不得 此三者 不可致詰 是謂道紀」라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 얻지 않고도 잡은 듯 알 수 있는 것. 이 셋은 이치로 따질 수 없는 경지를 말함이니, 이것을 일컬어 도(道)의 기원이라 한다는 뜻이지요.

 

시지불견은 눈으로 보기는 하나 마음속에 그림자가 남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텅 빈 마음이나 욕심 없는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면 눈에는 보이지만 마음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 심(煩惱心)으로 사물을 보면 그 사물에 마음이 끌려 착심(着心)이 되고 악업(惡業)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거나 이해관계로 거북한 사람이 맞은편에서 오는 것을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발길 돌리는 바로 그 순간 저의 마음에는 그 사람이 자리 잡게 됩니다.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우리 중생은 그래서 피 경(避境)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고 듣고도 못보고 못 들은 척 하고 마음을 돌리는 공부가 피 경이 아닐 런지요.

 

그러나 마음이 동할까 경계를 피하는 피 경공부가 초기 마음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하지만 피한다는 자체가 이미 마음이 동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요? 보고 듣되 연상(聯想) 작용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이 바로 불 견이요 불문입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순간 인식작용이 발동되기에 상(相) 없이 보고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행문(修行門)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줄 알고, 들리지 않아도 들을 줄 알고, 만져보지 않아도 아는 경지가 되어야 도(道)가 무엇인가를 깨칠 수 있는 입구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정도의 경지에 들려면 지식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기희생, 겸손과 솔선수범, 사회적 책임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것이 갖추어져 있는 사람을 우리는 깨어있는 사람 즉, 불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눈앞의 적은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동물적 본능만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더 나은 공동체적 삶의 지혜를 아무리 말하여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잡아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이 개벽(開闢)된 물질만능의 시대, 물질의 획득만을 인생의 의미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는 먹이를 낚아채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귀다툼의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공동체적 이익을 설명하여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그런 사람은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공금을 횡령하는 사람들, 종교적 목적으로 걷어 들인 돈을 공사 구분 없이 가로채는 사람들, 사람들의 순수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의 치부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앞에 놓인 먹이를 혼자 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맹수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동물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의 그러한 행동은 순수한 개체보존본능의 발로일 뿐인데 비해 인간의 그 모습은 보존본능을 떠나 더 많이 갖겠다는 욕심의 추한 모습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동물은 행동만 있을 뿐인데 비해 인간은 잔머리를 굴리는 추악한 행태도 서슴없이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만인이 행복하게 사는 이상향(理想鄕)이 보일 리 없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진정한 자유, 해탈(解脫)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눈이 없고 귀가 없는 사람은 감옥에서 사는 것과 하등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두 스님이 여행 중에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거만한 부잣집 사람들은 저택에 있는 많은 방 대신 차가운 지하실의 비좁은 공간을 내주었습니다. 딱딱한 마룻바닥에 누워 잠자리에 들 무렵, 노스님이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는 그 구멍을 메워주었습니다. 젊은 스님이 의아해하며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대우하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노스님이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날 밤 두 스님은 몹시 가난한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집의 남편과 아내는 그들을 아주 따뜻이 맞아 주었습니다. 자신들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대접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방을 내주어 두 스님이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농부 내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밭을 갈아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하나밖에 없는 암소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은 스님이 화가 나서 노스님에게 따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부잣집 사람들은 모든 걸 가졌는데도 도와주셨으면서,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정성을 다해 우리를 모셨던 저 농부의 귀중한 암소를 어떻게 죽게 놔둘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노스님이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부잣집 저택 지하실에서 잘 때, 나는 벽 속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지. 나는 벽에 난 구멍을 봉해서 그 주인이 금을 찾지 못하게 한 것일세. 그러나 어젯밤 우리가 농부의 방에서 잘 때, 저승사자가 농부의 아내를 데려가려고 왔었네. 그래서 농부의 아내 대신 암소를 데려가라고 했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

 

큰 공부는 정(定)도 없고 동(動)도 없습니다. 진여(眞如)의 묘한 체(體)는 생(生)도 아니요 멸(滅)도 아닙니다.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공(空)이로되 공도 아닙니다. 또한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기로는 바깥 없는 데까지 포함하고, 가늘기로는 안 없는 데까지 들어가며, 광명수량(光明壽量)과 대기대용(大機大用)이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치기로 공부하면 홀연히 깨치는 한 소리에 허다한 영묘(靈妙)가 다 스스로 구족(具足)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는 ‘시지불견’ ‘청지불문’의 경지에 들어보면 어떨 런지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5월 22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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