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제정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완수하고 구 질서를 철폐
프랑스혁명 연구의 최근 동향을 이해하는데 매우 간편하면서도 훌륭한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5명의 필자가 쓴 일종의 공동보고서인데, 이들은 모두 프랑스 파리제1대학교에 있는 ‘프랑스혁명사연구소’ 소속의 연구자들이다. 

프랑스혁명은 단지 프랑스나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진정한 근대’의 출발을 알린 대사건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프랑스혁명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계사나 ‘근대성’의 인식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프랑스혁명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각자의 정치적 정체성의 형성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위상을 갖는다. 그렇기에 프랑스 정부는 이미 제3공화정 초기인 1880년대부터 당시 소르본대학교에 프랑스혁명사 강좌를 개설하고 주임교수를 임명하여 혁명연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왔으며, 세르나(Pierre Serna) 교수는 현재 그 강좌의 주임교수이며 프랑스혁명연구의 가장 주요한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프랑스혁명은 학문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상을 갖기에 특히 혁명 발발 200돌(1989)을 전후한 시기에 참으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파리제1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고전해석’의 진영에 맞서 영·미학계와 프랑스의 퓌레(François Furet)를 중심으로 ‘수정해석’ 진영이 형성되었다. 이 책은 이런 논쟁의 흔적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전해석의 새로운 담당자인 세르나 교수 등이 수정해석이 제기한 여러 논쟁점들을 열린 자세로 수용하여 프랑스혁명 연구의 새로운 합의의 틀을 만들려고 고심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시민적 평등을 위해 노예제를 폐지하고 공직에 누구든 오를수 있도록 권리의 평등을 실현하였다. 공채(公債)를 청산키 위해 교회소유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켜 광범위한 부의 再分配 를 이루었다.  부르주아들과 자영농들은 가장 큰 이득을 얻어냈고  소수의 농업 노동자들 도 토지를 살수 있게되었다.
 
아울러 교회 권력의 제한 과 수입원을 박탈한 국민의회는 성직자 민사 기본법을 제정하여 교회를 개편 하려 하였으나 , 교황과 성직자 대다수는 이 법을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국민의회와 교회는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논쟁과 더불어 폭력 발생을 부채질하였다.
 
앙시엥 레짐의 복잡한 행정체계는 헌법제정 국민의회에 의해 일소되었고, 그 대신 프랑스를 州, 郡, 區, 코뮌으로 나누어 선거로 선출된 국민의회가 다스리도록 한 합리적 체계를 구축했다.   법관은 선거로 임명되었다.
헌법제정 국민의회는 국왕과 의회가 입법권을 공유하는 立憲君主政 체제를 설립하려 했다.   만약 국왕이 새로운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면 이 입헌군주제가 가능 했었을지 도 몰랐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하여, 귀족주의자나 고문관에게 꼼짝 못하는 포로에 가까웠다.
1791년 6월 20~21일 그는 프랑스를 탈출하려고 시도 하였지만, 바렌에서 저지 당하고 파리로 소환되었다.
 
<프랑스와 유럽의 革命과 反革命>
 
프랑스에서의 일련의 사건들은 이미 수년전에 패배를 겪었던 네덜란드 연합왕국, 벨기에, 스위스 등지의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심어 주었다.  아울러 영국, 아일랜드, 독일, 함스부르크제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변화를 원하던 모든이 들이 프랑스 혁명에 공감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많은 반혁명 주의자들, 즉 귀족, 사제,  및 소수의 부르주아 등은 국내에서의 싸움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망명귀족"들 대다수는 프랑스 북동쪽 국경 근처에서 군대를 소집하고  유럽 군주들로 부터 지원을 모색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무관심 해ㅛ으나, 프랑스 혁명 국민의회가 국제법의 혁명적 원칙,
즉, 각 국민은 자결권을 가진다는 원칙을 천명하자 조바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비뇽 교황령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1791년 9월 13일 프랑스로 재통합되었다.  프랑스와 여타 유럽 국가들의 골은 깊어만 갔다.  외국에서 혁명을 지지하는 세력을 통칭해 "자코뱅주의자" 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1792년 4월 20일에 마침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戰爭, 國王處刑, 恐怖政治>
 
혁명전쟁의 첫번째 국면 (1792년 4월~9월)에서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연합군은 국경을 넘어 빠르게 파리로 진군하였다.  프랑스 혁명가 들은 국왕과 귀족들이 자신들을 배반하였다 고 믿고 1792년 8월 10일 국왕이 거처하던 튈르리궁전을 점거하고 국왕 가족들을 감금시켰다.   9월 초순 파리 군중들은  감옥을 습격해 투옥되어 있던 귀족과 사제들을 학살 하였다.
 
한편 혁명이 민족주의를 일깨움에 따라 의용군들이 끊임없이 군대로 몰려 들었다.   계속 후퇴하던 프랑스군대는마지막 힘을 다해 1792년 9월 20일에 발미에서 프로이센 군을 저지했다.   그리고 같은날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 가 소집되었다 .   이튿날 국민공회는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선언했다. 
 
전쟁의 두번째 국면 (1792년 9월~1793년 4월)에서 혁명군은 적국을 물리쳤다.  이어 프랑스는 벨기에, 라인란트, 사보이, 니스 주를 점령하고 이곳의 봉건제도를 폐지 하였다.  국내에서는 국민공회 내에서 파벌이 형성되어 프랑스에 부르주아 공화국을 건설하고 전 유럽으로 혁명을 확산 시키려는 "지롱드" 黨 과, 하층계급에  政治的, 經濟的 權力 을 더 많이 부여하되 혁명활동을 프랑스 국내에만 국한 시키려는 로베스피에르의 산악黨 (Montagnards)으로 분열되었다.   자롱드 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이16세는  국민공회의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3년 1월 21일에 처형 되었다.
 
1793년 봄, 혁명전쟁은 세번째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프랑스 군은 다시 패배를 거듭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은 동맹 (후일 1차 동맹으로 불렸음) 을 형성했고  이 동맹에 유럽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가담하였다.
프랑스는 벨기에에 이어 라인란트를 넘겨 주었고 연합군은 파리로 진격했다. 이러한 전세의 역전은 국내의 극단주의자들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 했다.
 
지롱드당 지도자들은 국민공회에서 겨났고 상퀼로트 (노동자, 수공업자, 소상인, 소자작농, 농업노동자 등) 들이 지지하는 산악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 (1794년 7월 27일) 반동때 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산악당은 지롱드당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부르주이들이었으나 이들은 상퀼로트 들의 압력을 받았고, 또한 적군에 대한 방어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과격하고 진보적인 경제, 사회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최고가격제 (정부가 상한가를 제한하는 것) 를 도입했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 했으며, 가난하거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국가보조금을 지급했고  교육은 자유롭고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망명귀족들의 재산을 징발하고 매각했다.   이 같은 특별조치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방테 반혁명반란, 노르망디, 프로방스에서 일어난 "연방주의자"들의 봉기, 리옹과 보르도의 반란 , 브르타뉴에서 일어난 "올빼미당" 등의 폭동등 일련의 반혁명 운동이 전개 되었다. 
 
그러나 저항은 공포정치로 분쇄되었다.     공포정치는 적어도 30만명 이상의 용의자를 체포하였고     이 가운데 17,000 명 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 당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죽거나 재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살해 당했다.   이와 동시에 혁명정부는 100만명 이상의 남자를 징집했다.
 
보충된 군대 덕분에 혁명 전쟁은 1794년 봄부터 네번째 국면에 접어 들었다.  플뢰리스에서 오스트리아 군에 대해 거둔 혁혁한 승리 (1794년 6월 26일) 에 힘입어 프랑스군은 벨기에를 탈황했다.  이 승리로 공포정치와 경제적 사회적 체제는 무의미해 보였다.  각종 제재를 주관했던 "청렴한 자" 로베스피에르는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에 국민공회에서 타도 되었고 다음날 처형당했다.
 
그의 몰락에 뒤이어 곧 최고가격제가 폐지고, 서부와 남동부 지방에서는 왕당파의 " 백색테러"가 자행되었다. 왕당파는 파리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혁명력 4년 방테미에르 13일 (1795년 10월 5일) 청년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격멸당했다.  며칠뒤 국민공회는 해산했다.
 
<總裁政府 와 革命의 擴散>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혁명력 3년 헌법은 5명의 총재들이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로 구성된 兩院 (입법원 이라고도 함) 에서 입법권을 갖는것으로 규정했다.  부르주아 공화정인 총재정부 체제는 전쟁을 통해  유럽전역에 걸쳐 혁명주의자들과 반혁명주의자 간의 투쟁이 지속되지 않았다면 평탄하게 발전할수 있었을 것이었다.   드러나 전쟁은 총재정부와 입법부 사이에 존재하던 적대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종종 새로운 적대감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런 분쟁은 혁명력 5년 프뤽티도르 18일 (1797년 9월 4일) 의 쿠테타 와 혁명력 8년 (1799년 11월 9일) 쿠테타로 종결되었다.  첫번째 쿠데타는 총재정부와 의회에서 왕당파를 제거했고,  두번째 쿠데타는 총재정부 자체를 폐지했다.  플뢰리스에서 승리를 거둔 프랑스군의 유럽 진격은 계속되었다.  라인란트와 홀란드가 점령되었고, 1795년에는 홀란드 토스카나 프로이센 스페인이 평화협정을 벌였다.
 
1796년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샤르테냐는 바로 항복했다.  오스트리아는 마지막으로 항복한 나라였다.  프랑스가 점령한 국가들 대부분이 "자매 공화국" 으로서 프랑스를 모방한 제도를 갖게 되었다.
 
유럽에 찾아온 평화는 혁명의 확산을 종결짓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총재는 혁명을 유럽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지롱드당의 염원을 물려받아 외국 쟈코뱅주의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1798~1799년 프랑스군은  스위스, 교황령, 나폴리로 진격해 각각 헬베티아, 로마, 파르테노페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영국 상륙을 기대할수 없었던 총재정부는 보나파르트의 요구에 따라 이집트를 점령 함으로서 인도의 영국 정부를 위협하려고 결정했다.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원정군은 몰타에 이어 이집트를 손쉽게 점령하였으나 원정군을 호위하던 함대가 1798년 8월 1일 아부키르만에서 호레이쇼 넬슨의 영국 함대에게 격멸당했다.
 
혁명의 진전에 불안해 하던 열강은 프랑스군의 참패에 용기를 얻어 제 2차 동맹을 결성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투르크, 영국이 참여한 이 동맹은 179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대승을 거두었고 프랑스군을 국경 밖으로 후퇴시켰다.  그뒤 프랑스로 돌아온 보나파르트는 군사적 배패로 실추된 정부의 평판과 자신의 커다란 명성을 이용하여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비록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끝났다고 선언 했지만 바로 자신이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전세계에 전파하게 되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득세 속에서 프랑스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리려고 애쓰는 학문적 고투의 현장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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