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斷食 목적을 갖고 먹지 않는 것), 단식투쟁=먹지않는 투쟁… 이 투쟁은 그래서 어린아이부터 사람들에겐 특별한 경우 특별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에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단식투쟁은 정국을 뒤흔드는 폭탄이 되기도 했다. YS의 단식, DJ의 단식, 우리 정치에서 단식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이뤄낸 결과 있는 단식투쟁이다. 특히 상대를 부끄럽게 하고 민심을 얻으면서 목적을 달성한 의미 있는 단식투쟁이었다.

1. 1983년 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 이어진 YS의 23일간 단식투쟁은 말 그대로 자신의 생명을 건 투쟁이었다. 1981년 전두환이 총칼을 앞세워 집권한 뒤 민주주의를 압박하는 정치를 벌일 때 상도동 자택에 연금된 YS는 민주회복과 직선제 쟁취를 내걸고 단식투쟁에 나섰다.

YS의 23일 단식이 끝난뒤 관련내용이 보도된 기사 중 갈무리
YS의 23일 단식이 끝난뒤 관련내용이 보도된 기사 중 갈무리

그러나 그의 단식투쟁은 전두환 정권의 보도 통제로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측근들의 노력으로 단식투쟁 사흘째인 5월 20일. 동아일보 2면 정치 가십난에 “최근의 ‘정세 흐름’과 관련, 정가 일각은 19일부터 신경을 쓰는 눈치”라는 암호문 같은 기사가 YS의 단식투쟁을 보도한 첫 기사였다. 그리고 이후 언론들은 ‘한 재야인사의 식사문제’라는 표현으로 동조했다.

하지만 YS의 단식투쟁은 전두환을 당황하게 했다.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을 보내 단식투쟁을 풀고 해외출국을 종용하다 YS를 서울대 병원에 강제로 입원을 시키기도 했다. 입원해서도 단식투쟁을 멈추지 않던 YS는 단식투쟁 23일 째인 그해 6월 9일 단식을 풀었으며 결과는 3차 정치해금, 자신의 가택연금해제였다.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적’을 굴복시킨 사례다.

2. DJ도 평민당 총재 시절인 90년 지방자치제 실시와 여권의 내각제 시도 포기를 요구하며 13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1988년 총선으로 국민은 신4당 체제와 여소야대 국면을 만들어 줬으나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3당합당이란 밀실쿠데타를 자행, 민자당을 탄생시켰다. 이후 거대여당이 된 민자당 대표 김영삼은 야3당 총재일 때 합의된 지방자치제를 하지 않으려고 차일피일 했다.

지방자치체 실시는 실상 1987 민중항쟁에 대한 답이었다. 그래서 1989년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야3당 총재가 여러차례 회담을 통해 합의했었다. 때문에 그해 자치법개정안 야3당의 공동 단일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이 법률안에 대하여 거부권 행사를 했다.

거부권 행사 후에도 야3당 총재는 회담을 열어 재차 합의했다. 그리고 결국 1989년 12월 15일 청와대 4자(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회담을 거친 뒤 12월 19일 정기국회 폐회일에 관계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 와중에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지방자치제 실시와 관련된 모든 합의를 파기, 법률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다.

이에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로 혼자 야권을 지키던 DJ는 1990년 10월 8일부터 10월 20일까지 13일간 지방자치제 실시를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극한 투쟁의 단식을 단행했다.

DJ의 단식을 보도한 기사 중 갈무리
DJ의 단식을 보도한 기사 중 갈무리

단식투쟁 중 당시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 된 YS가 병실을 찾아왔다.

DJ는 “나와 김 대표가 민주화를 위해 싸웠는데 민주화란 것이 무엇이오. 바로 의회 정치와 지자제가 핵심 아닙니까. 여당으로 가서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어찌 이를 외면하려 하시오”라고 말했던 사실을 DJ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YS가 다녀 간 후 DJ는 단식을 풀었다. 이후 여·야 간 밀고 당기는 정치협상 끝에 1990년 12월 6일 최종적으로 지방자치제 실시의 합의에 도달하였다.

이어 이 합의에 의해 불안전하지만 1991년 3월 기초의원 선거와 1991년 6월 광역의원 선거를 치른 다음, 박정희 쿠데타 후 중단되었던 대한민국 지방의회가 31년 만에 부활했다. 또 나아가 1995년 6월 27일 전국에서 실시된 지방의회 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뽑는 선거까지 이어지면서 김대중의 단식투쟁은 대한민국을 지방자치국가로 만들어 냈다.

3. 그러나 이번 황교안 대표의 단식투쟁은 본인이 “목숨을 걸었다”고 하지만 상당수가 그 진정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자유한국당 당권파 외에 당내 비주류는 물론 여당, 또 다른 야당, 그리고 일반 국민들까지 아마도 본인의 단식논리보다 ‘황제단식’ ‘경호단식’ ‘이동단식’의 논란에만 관심이 많다.

청와대 앞과 국회로 이동하면서 진행 중인 황교안 대표 단식
청와대 앞과 국회로 이동하면서 진행 중인 황교안 대표 단식

왜 그럴까? 이는 그가 ‘목숨을 건’ 단식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역사의식과 정치발전과는 동 떨어진 자신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란 평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주변에서 나오는 각종 소식들이 그의 단식을 ‘투쟁’이라기보다 ‘희화화’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영양제단식’ ‘경호단식’ ‘이동단식’ 등 ‘황제단식’ 논란도 있다.

우선 그의 요구사안인 한일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인 지소미아 연장 건은 우리 국민도 정부도 사실상 별 유익이 없는 사안이다. 앞서 그에 대한 협약이 체결될 때부터 지소미아는 국민적 반발이 심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살피느라 졸속으로 체결한 흔적들이 있다. 이에 대해 황 대표 본인도 21일 아침 현장 최고회의에서 “미국의 요구 때문이었다”라고 발설한 바 있다.

그래선지 협정을 맺어 양국이 서로 군사정보를 교류하고 있었음에도 일본은 우리를 우군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 배상판결을 이유로 ‘안보상의 문제’를 들어 우리의 주력수출품인 반도체 소재 3종의 수출규제를 필두로 우리를 화이트리스트국가에 제외, 스스로 우방의 지위를 포기했다. 따라서 우리도 우방이 아닌 적국에 우리의 군사정보를 넘겨 줄 하등의 이유가 없다.

황 대표가 지소미아를 한일간의 문제가 아닌 한미간의 문제로 침소봉대 하지만, 현재 한미간은 또 주한미군 주둔으로 인한 방위비 분담금 500%인상 요구로 동맹이 흔들거리는 상황이다.

미군의 한국 주둔이 한국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막중하다. 그러나 이는 분명하게 말하면 한국의 이익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의 이익과는 별도로 미국의 군사적 이익에 기인한 바도 크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의 인계철선이 한반도 휴전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미국이 미군의 한반도 주둔으로 한국만 이익을 본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주둔비의 분담이 필요하지만 이는 일정한 선이 지켜져야 한다. 이런 상황이므로 황 대표가 “한미일 3각 동맹에 필요하므로 지소미아를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선뜻 많은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 외 그가 주장하는 공수처 설치 반대, 연동형비례대표제를 가미한 공직선거법 처리 저지 등도 마찬가지다. 현재 국민여론은 공수처 설치와 연동형비례대표제를 가미한 공직선거법 개정에 대한 찬성 여론이 반대여론에 비해 높다. 대략 65% VS 35%수준인 것으로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야당 대표의 단식 조건은 거의 전부가 반국민적이란 애기가 된다.

여기에 또 자신의 당 내에서조차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영양제 주사 논란과 당직자 당직이란 경호논란 등 불필요한 논란만이 지금 황 대표의 단식을 회화화로 이끌고 있다.

그래서다 황 대표는 더 이상 정국을 시끄럽게 하지 말고 단식을 푸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의 주장인 목숨을 건 단식이란 슬로건은 이미 영양제 주사에서 빛을 잃었다. 목숨을 건 단식은 앞서 언급한 YS와 DJ의 단식이 보여줬던 결기가 함께해야 한다. 그런 결기도 없이 일회성 정치적 이익을 위한 단식에 나섰다가 실패한다면 그가 원하는 총선 승리는 물론 대권에 대한 꿈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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