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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전 대구 미 문화원 사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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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전 대구 미 문화원 사건이란
‘대구 미 문화원 폭발 사건 토론회’(2019.12.11)에 드리는 글
  • 강진욱 (변호사)
  • 승인 2019.12.11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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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자작테러
    
대구 사건은 우연히 발생한 일과성 사건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의 국가기관이 기획한 국가조작사건입니다. 수상한 물건을 들고 파출소에 찾아간 고등학생 1명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부터가 수상한 일이고(인터넷에는 이 사건을 ‘폭탄 투척 사건’으로 왜곡 서술하는 글이 넘쳐납니다), 이 사건 피해자들 누구에게도 ‘미 문화원 폭탄 테러’ 혐의가 적용되지 않은 채 대구경북 지역 진보.혁신계만 초토화된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대한민국 대표 고문기술자 이근안까지 동원해 수 십 만 명을 조사 대상으로 올리면서 사건의 배후를 조작하려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

[ASTA(미주여행업협회) 총회와 IPU(국제의회[원]연맹) 총회 등 ... 대규모 국제대회를 앞두고 ...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충격적인 중대사건 ... 주한 외국기관에 대한 테러 사건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 80년 12월 광주의 미 공보원 방화사건과 작년 3월 부산 미 문화원 건물 방화 사건 ... 이번에 폭발 목표로 대구 미국문화원을 ... 이같은 일련의 사건에서 범행의 목적을 추리해 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 과거 광주 미 공보원과 부산 미 문화원에 방화했던 범인은 극도로 의식화된 좌경의 젊은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이 택한 테러의 방법은 어디까지나 건물에 불을 지르는 단순한 행위 ... 이번 사건은 고성능의 시한폭탄을 사용 ... 좌경 학생의 능력 한계를 뛰어넘은 고도의 음모가 게재된 테러행위 ... 폭발물이 아주 정교한 공정을 거쳐 제조된 것 .. 시기적으로도 각종 국제회의를 앞두고 저지른 범행 ... 대공 용의점...](「경각심 일깨운 대구 사건 - 폭발물 테러범 철저히 색출해야」<경향신문> 1983.9.24)

사건 발생 이틀 뒤 나온 신문을 보면, 당시 전두환 정권은 대구 사건을 ‘광미방’(광주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나 ‘부미방’(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과 마찬가지로 ‘좌경 학생 운동권’의 소행으로 몰아세우면서(밑줄), 이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는 것처럼 조작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굵은 글씨).   

그런데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라는 단체는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전두환 정권이 짠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왜 이토록 끔찍한 자작테러를
   
그러면 전두환 정권은 왜 이런 끔찍한 자작테러를 저질렀을까? 먼저 미국이 광주에서의 학살을 방조해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사실로 인해, 미국(레이건 정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안정이 매우 불완전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미 1981년 초부터 자신들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국가안전을 해치는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치부하면서 조선(북한)이 배후에 있다는 식으로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하면 북괴는 올 들어 양대 선거 등 국내 정세에 편승, 간첩과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납치, 테러, 방화 등 폭력사태 유발을 기도하는 한편 각종 허위 사실을 조작, 유포해 민심을 교란시키려 ... 국가안전기획부는 또 지난해[1980년] 6월 서울과 부산을 비롯,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도청소재지에 대공상담소를 설치 ... ](<동아일보> 1981.1.27)

전두환 정권은 - 또한 미국은 - 이런 식으로 자신들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저항을 ‘북괴의 사주’인 것처럼 호도하는 여론을 조작했고, 이런 공작의 대미를 장식한 사건이 바로 대구 미 문화원 사건과 아웅 산 묘소 테러였습니다. 18일 간격으로 일어난 두 사건은 동시성과 순차성을 지닙니다.
   
1.2차 ‘광미방’과 1.2차 ‘부미방’사건(1980-1982)의 연장선상에서 대구 사건을 조작함으로써, 광주에서의 학살에 저항하는 국내 학생 운동권과 시민사회를 ‘북괴의 지령을 받는’ 좌경 용공 세력으로 몰고, 곧바로 ‘북괴가 광주학살을 응징하겠다며 전두환 대통령을 시해하려 했다’는 각본에 따라(<1983 버마> 참조) 아웅 산 테러를 자작했습니다.
   
또한 1980년대 내내 미국과 전두환 정권은 소련과 북한의 ‘궤멸’을 목표로 전쟁을 불사하는 고강도 압박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레이건이 소련을 향해 ‘악의 제국’(Evil Empire)라고 악담을 퍼붓고,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별들의 전쟁’(Star Wars. 우주무기개발 계획)을 선언하고, 전두환 정권과 공모해 자그마치 20만 병력이 참가하는 ‘팀스피리트 83’을 개시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구 사건 3주전 일어난 KAL 007기 격추사건(1983.9.1)은 미국이 우리 민항기를 소련 영공에 들이밀어 극비 군사시설을 촬영하다 소련 공군기에 의해 격추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져 있는 가운데 전두환 정권은 대구 미 문화원 테러사건을 조작했고(1983.9.22), 다시 18일 뒤에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을 조작했습니다(1983.10.9).
   
미국 레이건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이런 끔찍한 자작테러를 저질러 이 땅 남녘의 대북 적대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습니다. 레이건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이런 식으로 ‘남측의 대북 적대감’과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각각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으로 하는 남북분단체제를 고착화시켰습니다. 1983년은 레이건 정권과 전두환 정권이 이 땅에 분단의 쐐기를 깊숙이 때려 박은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대구 사건과 아웅 산 사건의 상관성

대구 사건과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의 상관성을 웅변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기 위해 조작한 또 하나의 간첩조작사건인 부산 다대포 간첩단 사건입니다. ‘우리 정보당국에 협조하고 있는 20년 전 고정간첩’이(?) 북한에 가짜로 무전을 쳐서 북한 공작선을 불러들여 일망타진했다는(?) 웃기는 간첩(조작)사건입니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전 국가정보원 해외담당 차장, 주영.주일 대사 역임)가 쓴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2013)에는 “간첩을 생포해 아웅 산 테러가 북괴의 소행임을 밝히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명령으로” 다대포 간첩 체포 작전을 벌였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소가 웃을 일입니다.

더 웃기는 것은 이들 ‘전두환 초빙 간첩’(?) 두 명이 - 전.두.환.이. 의.도.했.던.대.로. - “아웅 산 테러와 대구 미 문화원 테러는 북괴의 소행이다”라고 자백했다(?)고, 당시 대간첩대책본부가 떠들썩하게 기자회견을 한 것입니다. ‘전두환 초빙 간첩’ 체포 작전(1983.12.3) 엿새 만인 1983년 12월 9일이었습니다. 

[지난 9월[22일]의 대구 미 문화원 폭파 사건은 남파된 북괴 간첩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북괴는 버마 아웅산 묘소 암살테러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뒤부터 대남공작원들에게 실패 원인 분석 비판하는 교육을 하고 있음이 이번 부산 다대포 침투 간첩들의 진술로 밝혀졌다고[?] 대간첩대책본부가 9일 발표했다. 대간첩대책본부는 다대포 해안침투간첩 전충남과 이상규를 신문한 결과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 지난 10월 하순 원산 간첩해상안내연락소에서 훈련을 받던 중 무전장 박창식(27)이 “9월 22일 밤 전파 감청소에서 ‘대구 미 문화원 폭파 성공’이라는 무전 보고를 감청했다”면서 “우리 공작원이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고 폭로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11월 중순 원산 앞바다 황토섬에 있는 간첩해상안내연락소에서 지도원 서예화(45)로부터 “아웅 산 묘소 폭파 때 공작원 2명이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서예화는 또 아웅 산 묘소 뒷산에 수림이 많고 전망이 좋아 저격 장소로는 최적지인데도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나팔소리만 듣고 폭파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말하면서, 검거 후 서울엣 왔다고 진술했다가 혁명성 없이 이북에서 왔다고 번복 자백, 결국 배신했다고 범인들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전충남과 이상규는 이때 서예화로부터 ... 혁명성 없이 자폭하지 못한 것 등을 엄중히 비판하는 교육을 받았다는 것.](「생포 간첩 진술 “대구 미 문화원 폭파도 남파간첩 소행이었다”」<동아일보> 1983.12.9)

북한에서 왔다는 무장공작원이 시한폭탄으로 어린 학생 한 명 죽여 놓고 ‘폭파 성공’이라고 무전을 쳤을까요? 또 그 무전을 받은 북한 무전장이 “우리 공작원이 성공했다!”라고 떠벌렸을까요? 이런 이야기는 대구 사건과 아웅 산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몰기 위한 전두환 정권의 각본일 뿐입니다. ‘간첩을 생포해 아웅 산 테러가 북괴의 소행임을 밝히라’는 전두환의 명령으로 시작된 매우 어설픈 각본!

전두환 정권이 대구 사건과 아웅 산 사건을 동시에 마무리하려한 정황도 있습니다. 사건 피해자들이 구금되어 있을 때 문화원 테러 사건 수사를 종결하면서 슬그머니 ‘북괴 공작원’을 들먹였습니다.

[대구시경찰청 수사본부는 1983년 11월 3일 ‘미문화원 폭파사건 수사상황 보고’를 통해 “관련 혐의자나 목격자를 발견할 수 없다”라며 “북괴공작원 2~3명이 직접 침투하여 폭파 후 복귀한 것으로 판단되어 더 이상 수사를 계속하더라도 성과가 없을 것으로 전망되므로 본사건 수사를 종결한다”고 밝혔다.](검찰, 내달 13일 대구미문화원폭파 누명 고문사건 구형 예정](「83년 대구미문화원폭파 누명 고문 재심」<뉴스 민> 2019.7.12)

전두환의 시대는, 정보당국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북괴 공작원 2~3’을 들먹여도 모두들 ‘그런가보다’ 하는 시대였습니다. 간특한 세력이 무지몽매한 우중을 속여먹는 시대!

1984 ‘대구 사건 시즌 2’
   
전두환 정권은 대구 미 문화원 테러를 조작한 뒤 이를 북한의 소행인 양 그럴듯하게 넘어갔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경찰과 정보기관은 ‘대구 사건 시즌 2’를 준비했습니다.

대구 미 문화원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1년 만인 1984년 9월 24일 ‘북한 무장 간첩 1명’(?)이 대구시 동구 신암동에 있는 ‘희민식당’과 ‘백합미용실’에 찾아 와 식당 주인 전갑숙 씨(29)와 종업원 강명자 씨(18)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미용실 주인 탁순애 씨(24)에게 총상을 입힌 뒤 인근 주민들과의 격투 중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사건. 전두환네 경찰은 그렇게 밝혔습니다. 이 ‘권총 간첩’이 흔히 간첩들이 휴대하는 ‘판건식 송수신기’와 벨기에제 브로우닝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무장 간첩이 대구 식당 주인과 종업원, 그리고 미장원 주인을 살해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권총을 마구 쏘아댔다던 자가 인근 주민들이 달려들자 스스로 자살할 이유가 있을까요? 사건의 해괴함은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희민식당 주인 전갑숙 씨 및 그와 함께 숨졌거나 다친 이들이 서로 알고 지낸 사이라며 이들에게 ‘숨진 간첩과의 연루’ 혐의를 씌우려 했고, 사건 발생 두 달 전 식중독으로 숨진 전 씨의 남편 김진한 씨(32)가 독살됐을지 모른다며 그의 시신을 꺼내 조사를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전두환네 경찰의 말대로 범인이 정말 간첩이었다면, 늘 그래왔듯이 ‘북괴 규탄 궐기대회’를 벌이면서 천.인.공.노.하면 될 일이지만, 숨진 자가 어디 간첩 같습니까? 도대체 전두환네는 ‘제2 대구 사건’으로 무슨 일을 꾸미려 했던 것일까요? 혹시 전두환 정권 시절 너무도 흔했던 간첩조작사건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그랬을 것으로 보이는 징후가 있습니다. <중앙일보> 기사.

【대구=이용우·도성진 기자】대구 무장간첩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26일 밤 경북의대 부속병원에 입원 치료 중인 백합미용실 주인 탁순애 양(24)으로부터 [강조]범인이 사건 발생 1시간 45분 전인 낮 12시 10분 쯤 미용실에 나타났다가 돌아갔으며 하오 1시 55분 쯤 두 번째 나타나 범행했다는 진술을 방아 탁 양을 비롯, 죽은 전갑숙 씨(29·희민식당 주인)와 강명자 양(18·종업원) 등 3명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 집중수사를 펴고 있다. 경찰은 또 사건발생 2일 전인 22일 하오 4시쯤 희민식당 인근에 있는 대한가스 주인 김 모 씨(31)가 식당에 가스를 배달하러 갔을 때 [강조]범인과 비슷한 인상의 2O대 청년과 50대 남자가 전·강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진술에 따라 [강조]범인이 며칠 전부터 피해자들과 접촉해 온 것으로 보고 있다.](「“범인 1시간 전에 다녀가” 대구 간첩사건 중상 입은 미용실 탁 양 필담증언」<중앙일보> 1984.9.27)

사건 발생 직후 인근 목격자들에 의해 ‘수상한 사람들’ 또는 ‘간첩 같은 사람들’로 묘사될 남정네들이 미장원과 희민식당을 기웃거렸다는 말이지요(물론 이 진술도 전갑숙 씨 등에게 간첩 연루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조작됐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북괴, 지하 간첩망 구축 시도’와 같은 큰 그림을 그리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향신문> 글(「대구 간첩 사건, 포섭 실패 따른 만행 - 공작 거점 삼으려다 정체 탄로」1984.9.27)도 이런 추리를 뒷받침합니다,

[경찰은 자살한 무장간첩은 단기 활동의 임무를 띤 공작원으로 숨진 두 여인과 피격당한 탁양 등 3인을 공작거점으로 삼으려다 실패하자 그들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27일 밝혔다. 이에따라 경찰은 피해여인들의 주변과 그동안의 행적에 대한 수사에 전력을 쏟고 있다. ... 강 양을 제1의 포섭대상으로 택했던 간첩이 ... 강 양이 간첩인 자신의 신분을 눈치채고 신고하려했거나 자수를 권유했기 때문 ... 전갑숙 여인은 강 양의 살해현장을 본 목격자로서 제2의 피해자로 추정 ... 간첩이 탁 양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 것도 강 양을 살해한 후 범인이 누루라는 것을 탁 양이 알게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인 것으로 추정 ...]

범인이 정말 ‘간첩’이라면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위 글은 완전 소설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경찰과 안기부, 보안사, 검찰과 재판부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숱하게 많이 만든 ‘간첩조작사건’ 모두 그런 소설에서 출발했습니다.
   
다음 글을 보면 의구심은 더 깊어집니다. ‘대구에서 발생한 이상한 무장간첩 침투사건’이란 제목의 인터넷 글. 2014년 10월 29일 ‘일베’ 사이트에 처음 올라왔고, 2015년 1월 18일 ‘세상의 각종 정보’ 라는 블로그에 옮겨진 글입니다.
   
2014년에 누가 이런 글을 처음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글 내용이 사건 당시 신문에 언급된 수준을 넘는 것으로 보아 경찰의 수사보고서를 보고 쓴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글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사건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점이 있다. 지난 1982년, 부산의 고신대생들은 광주사태당시 계엄군의 유혈진압에는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주장, 미국 측의 책임을 묻는다는 이유로 부산의 미국 문화원에 방화를 저질렀는데, 전[갑숙] 씨는 당시 부산 미 문화원 인근에서 오복식당이라는 상호로 식당을 운영했다고 한다. ... 이후 대구로 이사하여 현 희민식당을 운영 ... ]

전갑숙 씨가 대구 미 문화원 사건(1983.9.22)과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1982.3.18)과 현장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살해된 이유도 그 때문일 수 있습니다. 위 인용문에서 이어지는 글.

[지난 84년 7월 4일경 남편 김진한 씨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돌연사 ... 수 차례 구토와 복통을 일으킨 후, 식당의 여종업원 강명자 양이 사준 약을 먹고 곧이어 숨졌는데, 전갑숙씨는 이를 단순한 사망사고로 치부하고 경찰이나 소방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김 씨의 묘를 개장해, 김 씨의 위장 내 내용물과 기타 분비물들을 확보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조사를 의뢰하였으나, 간첩사건과의 연관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위 인용 부분은 전두환 정권이 전갑숙 씨와 지인들을 상대로 간첩조작사건을 꾸미려 했다는 의구심으로 이어집니다. 복통으로 사망한 이의 시신까지 꺼내 위 내용물과 기타 분비물 성분까지 조사한 것도 간첩사건 조작을 위한 각본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요? 위 인용문에서 다시 이어지는 글도 이런 의구심을 뒷받침합니다.

[... 무장간첩. ... 그가 지니고 있던 수첩에는 왜 여자들의 번호가 쓰여 있었을까? 수첩에 쓰인 번호의 주인들은 사회 요인이나 엘리트층이 아닌 일반 여공들이었다. 왜 그가 남한에 침투했는지, 또 정치계 요인이나 남한 내 사회 지도층이 아닌 “남조선”의 “인민”이었던 이들을 공격목표로 삼았는지, 그 세 여성과 탁순애, 식당의 여주인 전갑숙, 간첩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져 있지 않다.]

사건 당시 중앙일보는 위 ‘권총 간첩(?)의 수첩’에 대한 의구심을 다음과 같이 해소해 버렸습니다. ‘권총 간첩(?)의 수첩’이 아니라 강 양의 수첩이라는 식으로.

[간첩 소지품 중에서 발견된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은 강명자양의 것으로 강 양이 마산제과점에서 근무할 때 사귀었던 친구들의 전화번호이며 이 수첩은 간첩이 강 양을 살해한 뒤에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범인 1시간 전에 다녀가” 대구 간첩사건 중상 입은 미용실 탁 양 필담증언」<중앙일보> 1984.9.27)

그러면 대구 미 문화원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년 뒤에 대구 미 문화원 인근에서 이런 해괴한 사건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로서는 당시 전두환 정권이 북측(북한)의 화해와 협력의 손길을 뿌리칠 이유를 찾기 위해 이런 사건을 조작하려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건이 일어난 때가 바로 남측(남한)에 대홍수가 발생해, 북측이 수재물자를 지원하겠다고 제의한 상황이었습니다.

[[강조]‘수재물자’가 운위되고 있는 시기에 북괴 무장간첩이[??] 무고한 양민을 살해하고 시민과 격투하다 자살한 사건은 북괴의 극악무도한 폭력성을 다시금 드러낸 것으로 경악과 분노를 ... 무장간첩이 소지한 권총은 지난해 10월 9일 북괴가 버마 암살만행을 저질렀을 때 범인들이 사용한 권총과 같은 종류의 것 ... 압수된 40여 점의 간첩용 소지품으로 미뤄 이 무장간첩은 폭파 살상 납치 등 테러공작 임무를 띠고 최근 침투한 것으로 판단되어 ... 그들이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과 때를 같이 한 것 ... 북괴의 대남전략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무력적화통일 ... 이는 대남 폭력혁명 전략으로 표출된 북괴의 간단없는 대남 도발 양상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 ]([강조]‘수재 물자’ 직후의 무장간첩 출현<경향신문> 1984.9.25)

흔히들 전두환 대통령 각하가 통크게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였다고들 알고 있지만, 전두환은 그리 통이 큰 인물도 아니었고 북측의 제의를 선뜻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지못해 받았습니다.  

[치안본부는 25일 전국 경찰에 대공경계령을 내리고 “전 경찰은 가동 병력을 총동원, 국가 주요 시설 및 보호시설과 역, 터미널, 접객업소 등에 대한 경계활동을 강화하라”고 특별 지시했다. 경찰은 [강조]대구에 침투한 무장간첩은 오는 29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개장식 등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 취약지역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 불순분자 색출에 전력을 쏟도록 지시했다.](전국 대공 경계령<경향신문> 1984.9.25)

<덧붙여서> 아웅 산 묘소 테러범 강민철은 안기부 요원?

앞에서 1983년 11월 3일, 전두환 정권은 ‘북한 공작원 2-3명’을 언급하며 대구 사건을 종결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는데, 바로 11월 3일은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의 범인이라는 강민철이 버마 수사 당국에 “나 북한에서 왔소”라고 진술을 번복한 날이기도 합니다.

버마 수사당국이 아웅 산 묘소 테러의 책임을 북한에게 돌리기를 꺼려하는 상황에서 강미철의 진술 번복을 통해 사건이 북한의 소행으로 ‘정리’된 날, 대구 미 문화원 사건의 책임을 북한 공작원들에게 돌리면서 사건을 종결했다는 사실은 두 사건이 동시에, 같은 조직에 의해 조작됐을 개연성을 시사합니다. 강민철의 자백(?)을 받는 과정이 매우 수상했습니다.

강민철은 처음에는 자신이 서울에서 왔다고 주장했고, 이 때문에 버마 수사당국은 1983년 10월 17일 중간수사결과 발표 때도 북한을 배후로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매우 당황했고, 바로 다음날인 10월 18일 안기부 대공수사국 성용욱 국장(훗날 감사원 사무총장, 국세청장 지냄)과 한철흠 과장을 급히 버마로 보냅니다. 이들 둘은 10월 25일 강민철과 만나 ‘너 어떻게든 살아야 할 것 아니냐’는 이상한 화두를 던지며 강민철로 하여금 진술을 번복하게 했습니다(<1983 버마> 참조).

버마 아웅 산 사건이 당시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임을 웅변하는 스모킹 건이 있습니다. 2010년 9월 <월간조선>에 등장한 국정원 문건 한 장이 그것입니다(위‘강민철 인적사항’사진).

안기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이 1998년 11월 작성한 이 문건에 아웅 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의 사진 두 개가 실려 있습니다. 하나는 1998년 11월 국정원 요원들과 만났을 때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놀랍게도 ‘83.10 사건 당시 모습’입니다.

아웅산 테러리스트의 ‘사건 당시 모습’이 어떻게 국정원 문건에 등장할 수 있을까요? 북한에 있다는 강민철의 가족들이 또는 북한 당국이 국정원에 줬을까요? 탈북자들이 갖고 왔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이 사진은 강민철을 작전에 투입한 조직이 아니면 보유할 수 없는 사진입니다. 국정원이 사건 발생 이후 27년 만에 처음 공개한 이 사진은 아웅 산 사건이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임을 웅변합니다. 또한 한국 정부 측은 2005년 8월까지 강민철과 계속 접촉했으며, “(안기부) 파견관이 의약품과 소액의 영치금을 (버마)교도 당국을 통해 지원”했습니다. 우리 정부 또는 정보당국이 강민철 옥바라지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 또한 강민철이 안기부 - 또는 기무사 또는 정보사 - 요원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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