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佛家)의 수행은 궁극적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 만물은 항상 생사(生死)와 인과(因果)가 끊임없이 윤회(輪廻)하므로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이지요. 불가(佛家)의 수행은 궁극적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흔히 불법(佛法) 수행할 때 등장하는 것이 삼법인(三法印) 중의 하나인 제행무상입니다. 그러니까 제행무상은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는 뜻입니다. 제행무상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무상(無常)에 대한 실상은 마치 큰 코끼리가 발로 개미집을 사정없이 무너뜨리는 그러한 격이다. 코끼리는 개미집이 밟혔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시간의 신속함과 무상함은 사정을 두지 않는다.」

코끼리가 개미집을 밟는 데는 아무런 사정을 두지 않습니다. 코끼리의 눈에는 개미가 보일 리도 없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무상의 원칙, 무상의 굴레에 밟혀 나가떨어지는 것을 코끼리 발밑에 깔려 죽는 개미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개미의 비유는 너무나 적절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인생무상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숙명(宿命)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 변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운명(運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힘을 말하지요.

《맹자(孟子)》의 <만장편(萬章編)> 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莫之爲而爲者 天也 莫之致而至者 命也」“인위적으로 하려던 일이 아닌데 저절로 되는 것은 하늘(天)의 뜻이요, 원하지 않았는데 닥쳐오는 것은 운명(命)이 하는 일이다.” 운명론자들은 인간의 수명이나 삶의 궤도(軌道)는 초인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며, 인간이 아무리 의지적으로 노력하고 발버둥을 쳐도 결코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대로 자유의지론 자들은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뿐 미리 결정된 운명이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운명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유의지론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지요. 이를테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고 또 지구에서 태어나고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서울에 태어난 것, 그리고 이 혼돈과 위기의 시절에 태어난 것, 그것은 자유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시간과 공간은 자유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넘어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그렇다고 운명적인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만약 운명의 굴레 속에서 자신의 삶을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의지적인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숙명론으로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운명과 인과를 수용하면서도 그 불합리한 부분을 의지적으로 부단히 극복하고 바꾸어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숙명적인 존재에서 운명적인 존재로 거듭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운명과 숙명이 다른 점은 운명의 화살은 앞에서 오고, 숙명의 화살은 뒤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오는 운명의 화살은 막을 수 있어도, 뒤에서 오는 숙명의 화살은 막을 수 없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 앞에서 오는 운명의 화살을 막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둘째,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셋째,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자 한다면, 나의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해보는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나의 가치가 달라지고, 나의 운명이 바뀝니다. 성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의 특성은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며, <지성여불(至誠如佛)> 정신으로 초지일관하는 것이지요.  

탈무드에「이 세상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가? 어떠한 경우에도 배움의 자세를 갖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라 했고,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감사한 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또한 빌헬름 웰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기 보다는 감사에 정비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과 권세와 부(富)를 많이 쌓아 놓았다고 해도, 감사가 없으면 진정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마음은 지옥과 같고, 감사가 없는 가정은 메마른 광야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감사는 행복의 원료이며 풍요로운 삶의 재료입니다.

숙명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운명이야 능히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을 행복과 성공으로 바꾸는 방법은 바로 이 감사생활입니다. 내손으로 먹을 수만 있어도, 내발로 걸을 수 있어도, 내입으로 말할 수 있고, 내 눈으로 볼 수만 있어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제행무상이라 했습니다. 이제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허망한 재색명리(財色名利)에 몸부림치지 말고, 감사생활로 인생문제를 해결하면 어떨 까요!

단기 4352년, 불기 2563년, 서기 2019년, 원기 104년 12월 23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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