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침략 ‘친일’ 어디까지 왔나? 민족공격 ․ 민족배재, 재판기록, 신문보도 의존하는 과거 언론자본이 매국친일적폐세력 사대했던 ‘항일운동’ 현주소

달서구의회 소회의실에서 민족역사강좌를 진행하는 언론인출신 강사 여은경 박사(전. 영남일보노조 초대 위원장)께서 열강하며 청강생께 일제와 결탁한 매국친일파 적폐세력 앞잡이 밀정의 악행 및 일본식민지시기 검찰 경찰 헌병이 저질렀던 강제 군대의 징병 강제 노동자의 노역 강제 여성의 위안부 등 만행의 근거를 제시하며 매국친일했던 인사를 폭로하는 모습 / ⓒ 문해청 기자
달서구의회 소회의실에서 민족역사강좌를 진행하는 언론인출신 강사 여은경 박사(전. 영남일보노조 초대 위원장)께서 열강하며 청강생께 일제와 결탁한 매국친일파 적폐세력 앞잡이 밀정의 악행 및 일본식민지시기 검찰 경찰 헌병이 저질렀던 강제 군대의 징병 강제 노동자의 노역 강제 여성의 위안부 등 만행의 근거를 제시하며 매국친일했던 적폐인사를 폭로하는 모습 /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지부장 이상술)과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상임대표 강창덕)는 15일 달서구의회 소회의실에서 여은경 박사를 초청하여 <친일 및 항일>에 대한 강의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우리에게 배반자가 멀리 있지 않다. 김구를 고발한 밀정이 임시정부 내에 있었다.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귀옥은 비행학교를 수료 후 자주독립을 꿈꾸었다. 그러나 일제는 향후 동향을 밀정을 통해 치밀하게 파악했고 밀정은 조선 내 도처에 깔려 있었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선교밀정은 밀약을 맺고 일본을 거점으로 선교사역하며 조선의 토양에 맞지 않는 농기구를 강요했다.

또한 식민지근대화론 적자생존을 주장하며 열강제국이 약소국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일제는 민족이란 단어를 조선의 문화생활에서 완전 제거하려고 성명을 일본식으로 개명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 동화주의 황도주의를 위해 일본여인을 조선남성과 결혼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달성공원 사창가는 최초 일본식유곽이다. 명창 박녹주는 근본이고 기생은 단순 접대부가 아니다. 민속문화를 알리는 예능인이다. 일본인을 접대해도 기생독립단 활동하며 민족의식과 기생도를 갖는 기생을 사상기생이라 한다. 대구 항일여성기생은 정칠성, 염농산(앵무), 유춘도 등이다. 이제 우리지역 항일운동은 우리가 찾아야 한다.

일본영주(쇼군) 가신, 밑에 가신이 세금을 거두어들인다. 메이지유신은 또 다른 가신을 모였다 일본은 미국에게 소총 2~3자루와 실탄을 구입했다. 1870년대 일본군인의 체형에 맞는 무라따소총을 개발했다. 일제는 대평농민조합 설립 후 공당(공산당)이라고 몰아붙이고 악질적인 매국친일파 경찰(헌병) 최석현, 서영출, 노덕술을 등장시켰다.

일제는 조선에 문화통치를 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3. 1 만세운동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강압적 경찰, 헌병통치하며 밀정과 매국친일파를 통한 상주기자단 총회 등을 지원했다. 이날 민주당대구 동물보호위원장 임미연씨는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조명하며 달성공원 고종 동상 및 친일 김울산 동상 철거 등 자주독립운동사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했다.

이어 김성연씨, 김승희 통신원, 여인성씨, 고경하 시인, 여은경 박사, 이상술 지부장, 권오엽 위원장, 대경타임즈 김진우 기자, 달서구의회 홍복조 의원 등이 참석했다.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와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 공동주최로 개최하는 민족역사강좌를 진행하는 강사 여은경 박사께서 참석한 청강생에 일제식민지시기 반역매국친일상황을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며 열강을 하고 있는 모습 / ⓒ 문해청 기자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와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 공동주최로 개최하는 민족역사강좌를 진행하는 강사 여은경 박사께서 참석한 청강생에 일제식민지시기 반역매국친일상황을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며 열강을 하는 모습 / ⓒ 문해청 기자

다음은 <우리 곁에 친일, 우리 곁에 항일> 강의자료 전문 요약이다. 일제는 자신이 통제하는 언론을 통해 우리민족의 항일, 저항을 선제적으로 ‘강도, 패륜, 파괴범, 주의자, 테러범 등’으로 규정했다. 이를 식민지 우리 민족대중께 알림으로 ➀항일을 범죄로 규정하는 한편 ➁일제의 법령으로 잔혹하게 처벌하여 우리민족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다.

현재 국민은 지사 ‧ 의사가 누구이며 항일행적은 어떠했는가? 대개 언론매체를 통해 알게 된다. 이것은 언론 매체가 가진 사회교육기능이라 할 수 있다. 언론학자는 현재 언론매체가 기술상 특성을 제외하고라도 대체로 언론자본 속성에 따라 보도내용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언론과 검찰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듯이 그 속성은 권력을 지향하며 대중을 지배하여 자기주장을 학습하도록 한다. 언론의 자기통제 규율은 그 시대 언론소비자(독자 시청자, 참여자)가 깨어있으면 선순환하거나 그것을 지향하지만 깨어있지 못하면 악순환하여 소비자를 지배하게 된다.

균형보도, 확인보도는 선순환 보도의 여러 규율 가운데 약간의 방법론을 가리킨다. 악순환하면 확성기보도(P/A, Public Address) 등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소비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 결과 소비자들은 ‘확증편향’에 빠져서 사실을 오해하고, 오해를 진실로 붙들게 된다. 확증편향을 가지는 악순환의 언론 프레임이 작동한 것이다.

일제식민지시대 조선에서 언론은 관변언론 조선총독부 기관지(경성일보, 매일신보, 경성방송국)과 민간언론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 시대일보 등이다. 조선인 발행 신문, 조선신문, 부산일보 등 일본인 발행신문으로 나뉜다. 관변 언론은 말할 것 없고, 흔히 ‘민족지’로 불린 조선인 발행 신문이나 일본인 발행 민간지도 조선총독부 문서과에서 통제했다.

또한 1930년대 말 군보도부가 통제하였다. 이는 일제가 전파하려는 내용만 일제가 식민통치하는 데 효과적 방향으로 보도내용, 방법, 대상을 선별했다. 이에 언론소비자의 알 권리는 애당초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언론소비자는 동원된 대상이었을 뿐이다.

식민통치자가 언론매체를 통하여 울리는 종소리(통제된 정보)에 식민지 조선의 우리 민족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기능을 하도록 요구되었다.

<우리 곁에 친일, 우리 곁에 항일> 우리 곁에 친일구도를 설정하고 친일로 우리민족을 내몬 주체는 ➀일제(일제기관, 일본인) ➁일제와 협력하거나 그 이상의 이해관계를 가진 조선인(우리 민족) ③국외자로서 조신과 조선인(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 피식민통치자임을 인정하고 입국한 세력 ‧ 직능자 ‧ 개인으로 대별할 수 있다.

③경우는 주로 서양 종교기관 관계자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하고 입국했다. 일제의 통치나 행정으로 조선이나 조선인이 피해를 보는 것을 ‘피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컨대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의 경우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등 당시 서양 선교사는 일제 학살행위가 인권에 위반된다는 점에서 만행 현장을 촬영하여 본국 선교부와 언론매체 등에 알렸다.

허나 조선인의 3.1운동이 합법적 저항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인의 주장은 현재까지도 일본은 조선침략을 침략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국민을 교육하고 있다. 일본의 대한제국 외교권 강탈 - 군대해산 - 경찰권 장악 - 재정권(과세권) 장악에 대한 대한제국 병탄 과정을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후발주자로서 뛰어든 일본이 주장할 근거는 열강의 침략관행을 주장뿐이다. 사회진화론, 즉 ‘적자생존’에 입각한 이 같은 식민지 쟁탈전은 제국주의 열강 침략주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 가진 계급을 위한 이론이 되어 가진 국가, 가진 계급의 권리는 누구도 저촉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현재도 사회진화론은 살아 있어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를 합리화한다. 이는 식민지경험 국가를 수탈하고 괴롭히는 이론적 근거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빈곤층 신분제가 살아 있는 지역에서는 하층민이 부유층 기득권세력에 반항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죄악시하는 이론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사 ‧ 독립투쟁사는 국가사> 이 이론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의 영토를 장악하고 통치권(주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일본이 장악하지 못한 것은 민족뿐이다. 일본은 조선민족을 없애기 위하여 황도, 황국신민화, 일시동인, 내선일체, 국체명징 등을 국시화 하여 강제적으로 시행했다.

이 경우 조선민족이 외세 일본에 저항하는 모든 형태의 투쟁과 저항은 정당한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 민족의 민족사투쟁은 조선은 합법적으로 일제가 소유하였다는 주장, 강제력에 정당하게 대항하는 수단이 된다. 고로 일제강점기 민족사는 그대로 우리민족의 독립투쟁사로서 국가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 곁에 친일 우리 곁에 항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다음 부딪친 최대의 저항은 3‧1운동이다. 일제는 3‧1운동 이전에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고 그들의 점령지로 삼았다. 이어 일본인이 3‧1운동전개과정을 그들 시각으로 정리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하겠다. 이는 일본인은 조선민족 3‧1독립운동에서 일본을 지키려는 시각으로 3.1운동사를 정리하고 있다.

일본인이 조선을 점령한 다음 파악한 최대의 난제는 조선민족이 당시 2천만 명에 달하는 민족구성원수이다. 소수의 일본인 점령자로 이 거대한 민족을 통제하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한민족을 일본민족과 동화시키고 한민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잡혼(일본인과 조선인을 결혼시킴) 언어를 빼앗는 것 역사를 빼앗는 것이다. 당시 매일신보 1915년 8월 14일자 3면은 일본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과 조선인 남성의 일본 이주 허용의 방법을 사용했다. 조선인 남성의 일본 이주는 1938년 이후 허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3‧1운동기에 일제는 자신의 소유권(재산, 행정, 유무형의 관리권과 관리물) 및 일본인에게 행한 우리 민족 저항에 대한 공격을 자위라고 규정한다. 일제가 명백히 우리 민족에게 가한 공격에 대한 변명을 회피하기 어려운 것은 진압이다. 또한 일본인과 3‧1만세운동 참가 조선민족민중이 맞닥뜨려 발생한 유혈 ‧ 파괴 등은 충돌로 규정했다.

일본인의 재산이 3‧1운동 참가 조선민족민중의 시위로 파괴된 것은 피해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이 일본인을 위문하는 행위, 조선민족에 철시(撤市)를 철회하도록 종용하는 행위 등은 기타로 분류하고 있다. 이 기준에 정당성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들의 이러한 분류에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합법이다. 조선민족의 저항은 무조건 불법이다.

저항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평화적이라야 한다는 논리를 적용했다. 국가 간 전쟁이 발발한 경우 강국은 무조건 약소국을 포격, 폭격, 사격 등으로 공격할 수 있다. 허나 약소국은 강대국에 대항하며 평화적 방법으로 맞서야 한다는 주장과 다름없는 것이다.

다음은 구체적 사항을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李昇燁,「3‧1運動期における朝鮮駐在日本人社會の對應と動向」(3‧1운동기에 있어서의 조선 주재 일본인 사회의 대응과 동향) 〈부표 : 3‧1運動期における在朝日本人の對應〉(3‧1운동기에 있어서의 재조 일본인의 대응)을 인용, 제시함)

우리 지역 3‧1 만세운동 <영주군의 만세시위>

3‧1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사의 노선을 혁명적으로 바꾼 역사적 사건이다. 경술국치 이후 3‧1만세운동에 이르는 10년 동안 우리 민족은 일본을 개화문명국이라는 환상으로 접했다. 한편으로 생활면에서 일본의 식민통치가 문명개화와는 거리가 먼 타민족의 혹독한 지배라는 것을 체험했다. 그러면서 자주독립국가 건설한다는 절박하고 순수한 국가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국가는 일본과 같은 제국이 아니며 대한제국 계승도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왕족이 독립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복벽주의가 아니다. 국민이 주인이 되어 함께 통치하는 공화주의를 지향하였다. 독립국가를 회복하는 길은 일제와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내에서, 국외에서 일제 저항이 시작되었고 그 봉화를 3‧1만세운동이 올린 것이다.

3‧1만세운동은 일제에 항거하는 행위로 민족사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을, 場市, 골목, 동아리에서 나름대로 기획 계획되고 실행됐다. 경북 영주의 3‧1만세운동은 어디서, 누가 시작했는가? 영주는 을미의병에서 풍기광복단에 이르기까지 의병투쟁의 중심지였다.

1907년에서 1910년 기간 동안 영주에서는 모두 33회에 걸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다. 이후 풍기에서는 채기중 등을 중심으로 한 항일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이 비밀결사가 풍기광복단(1913년 결성)이다.

의병적 조직인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대구 앞산 안일암에서 박상진이 중심이 되어 1915년 (음)1월 15일 결성)이 대구 달성공원에서 1915년 7월 15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가 총사령 박상진, 부사령 이석대, 이석대 사후 김좌진이 부사령 출범한다.

그러나 영주에서는 풍기광복단 이후 항일투쟁의 조직이 부재하여 3‧1만세운동과의 연결고리는 없다. 그 것은 영주에는 학통을 계승한 유림층, 향촌사회의 명문거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주에서는 항일 만세시위가 계획되어 1919년 3월 21일 영주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은 일어났다.

박인서와 오하근이 사전에 계획하였고 두 사람은 사돈 간이다. 영주장날의 3‧1만세운동은 비록 명문거족이 없는 곳이라도 을미의병에서 풍기광복단의 항일투쟁의 정신이 민중에게 파급되었음을 보여준다. 영주에서 두 번째 만세시위는 4월 4일 하리면(현재 예천군 하리면) 은산동 은산장날에 일어났다. 권창수 등 5명이 계획했다.

권창수는 만세운동 계획자 중 가장 나이가 적었다. 당시 권창수는 28세로 인근 장을 이동하면서 어물장사하는 인물이다. 나머지는 평소 농사를 지으면서 한학을 공부한 마을 식자층이었다. 영주애서의 세 번째 시위는 풍기면에서 일어났다.

하리면 만세시위 이후 4일째인 4월 9일로서 역시 풍기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가 계획되어 실행되었다. 풍기면민과 인근 봉현면 농민들이 주도하였다. 주도자 8명 중 안용호라는 인물은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와 경제적 약탈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제가 부과하는 과중한 세금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조국독립의지를 굳히고 있었다. 4월 9일 만세시위는 백여 명의 군중이 참여했으나 일본군 헌병분견소 대원들이 출동하면서 해산당했다. 주도자 3명이 끌려가는 것을 본 다른 주도자들과 군중들은 2차로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네 번째로 일어난 영주 만세시위는 4월 11일 장수면 호문리에서 일어났다. 호문리 마을 서당에서 공부하던 청년 5명이 마을 앞산(웅곡산)에 올라가 만세를 고창하면서 일어났다. 웅곡산은 산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낮은 구릉이지만 마을 앞을 지나는 큰길이 환히 보이는 산이다.

지나가는 행인사람과 주변 논밭에서 농사짓는 주민들에게 만세시위를 알리기 좋은 곳이다. 영주군의 3‧1운동은 세 곳은 장날에 일어났고, 한 번은 마을서당 청년들이 주도하여 마을 앞산에서 일으켰다. 주도자들 중 학맥을 거론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고, 한학, 마을 서당 공부를 하면서 농사짓고, 어물장사를 한 인물들이다.

영주군의 4회에 걸친 3‧1만세시위는 당시 전 조선을 움직인 만세운동의 작은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생, 상인, 학생들의 조직적인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런 핵심층이 없던 지역에서도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은 우리 민족에게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식을 28세로 깊이 심었다.

영주에서는 을미의병에서 1913년에 이르는 항일 의병접전의 투쟁 정신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유식자층, 명문거족이 없었지만 이런 작은 마을 지도자들의 활동이 장터에서, 작은 산에서 대한독립의 기틀을 닦아나간 것이다.

일제식민지 강점기 대구의 서문시장 풍경이다. 지금의 동산동 일대이며 대구의 3.1운동은 3월 8일 대구 중심가인 옛. 달성군청에서 서문시장에 이르는 대로를 중심으로 전개했다 /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연구원 여은경 박사 제공
일제식민지 강점기 대구의 서문시장 풍경이다. 지금의 동산동 일대이며 대구의 3.1운동은 3월 8일 대구 중심가인 옛. 달성군청에서 서문시장에 이르는 대로를 중심으로 전개했다 /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연구원 여은경 박사 제공

<달성군 대명동의 만세운동> 대구의 3‧1운동에 대하여서는 이미 다수의 연구 실적이 발표되었다. 대구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 경 서문외시장 일원에서 계성‧대구고보
학생 수백 명이 선두에서 대열을 형성했다.

그 가운데 이만집 목사 등이 주도하여 제1차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을 제1차 학생봉기라고 부른다. 다수의 서문외시장(큰장) 상인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제1차 봉기였다. 시위대는 서문시장을 출발, 대구경찰서 앞~종로거리~중앙파출소~달성군청 앞 삼각지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일경과 일본군 80연대가 기마대, 착검 태세로 저지한 가운데 무차별 구타, 체포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시위행진은 할 수 없게 됐다. 이날 1차 봉기에서 주모자와 시위대 157명이 체포됐다. 시위 참가 학생들 가운데 계성학교 학생을 비롯하여 약 150명(일본 군경 기록에는 약 100명으로 기록)은 3월 9일 재봉기를 위하여 달성공원에 모였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강제해산을 당했다.

이어 학생들은 재봉기를 계속 모의, 3월 10일 남문외시장(새장=덕산정시장) 장날에 재봉기하기로 하고 봉기를 위한 준비작업을 이어갔다. 약속된 3월 10일 남문외시장에는 경계하는 일본군경이 수가 장군보다 더 많았다. 이날 철통같은 봉기 차단 작전을 벌였다.

이때 학생들은 변장하고 장터에 도착, 약속된 시각인 오후 4시30분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한국독립만세’를 우렁차게 불렀다. 장꾼 수백 명이 이 2차 봉기에 가세했다. 당시 법원판결문에는 100여 명, 도장관 보고문에는 200여 명으로 기재됐다. 이 날 체포된 주모자와 군중은 모두 65명에 달했다.

이것이 계성‧대구고보 학생의 제2차 봉기이다. 제1차 봉기에는 당시 대구고보 학생이던 이상화. 백기만이 준비단계에서 계성학교 학생을 규합하여 합동거사를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제1‧2차 봉기로 일대 타격을 입은 일제는 대구고보‧계성‧신명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후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은 지하에서 비밀조직으로 분산적으로 전개되어 각 지방으로 확대, 연결됐다. 대구의 제1‧2차 봉기에 이어 이번에는 대명동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대명동봉기’라고 부른다. 1919년 일제는 조선민족이 한반도 곳곳에서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하자 전 방위적으로 민족운동 탄압을 개시했다.

이때 교풍회, 자제단, 자위단 등의 조직적 탄압, 회유에 대하여서는 보론에서 다룸) 일제가 이렇게 장기 탄압책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까지와 같이 헌병경찰제에 의지한 무단통치하이다. 일본은 조선민족의 아래로부터 봉기를 막지 못한 데 따른 패착 분석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제는 1차적으로 조선민족과 그 내부의 협력자를 달래기 위하여 이른바 ‘문화정책(문화통치)’를 ,표방했다. 이러한 외견상 변화를 일제의 식민통치방식 전환이라고 보는 것은 단견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는 헌병경찰체제를 폐지하고 헌병과 보조원 다수를 경찰조직(보통경찰제)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1부‧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 제도를 실시했다.

한편으로 이를 위한 경찰력을 대폭 증원했다. 조선민족에 대한 감시망을 한층 촘촘하게 옭아매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그 같은 방향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대명동 봉기는 일어났다. 대명동 봉기는 대구 학생 봉기가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달성군 지역은 수성들, 범어들 외에 화원 지역에 일인들이 대거 동척 이민으로 들어와 있었다. 1919년 4월 15일 대구 대명동 소재 공동묘지(당시는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대구부 소속 공동묘지. 지금의 대명동 구 대구대학교 터를 포함한 곳으로 추정)에는 최경삼(崔敬三, 대구수 수정(壽町-지금의 중구 인교동)의 사망한 이녀(二女) 제례가 있어 약 50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이날 오후 5시 30분 이곳 수성면 대명동에 사는 강윤옥, 장용암 2인은 공동묘지 북쪽 즉 대구로부터 현풍으로 통하는 도로상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때마침 군중의 동태를 순찰하던 조선인 형사 오진태(吳鎭台)에 의해 강윤옥이 체포되고 장용암은 도주했으나 후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의 나이, 주소, 직업은 다음과 같다. 강윤옥(姜潤玉 30세 紐(뉴-끈)제조업) 경북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 장용암(張龍岩 26세 농업) 경북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이 두 사람은 재판 결과 5월 6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강윤옥은 징역 8개월 형을 언도받았고, 장용암은 6월 26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4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장용암은 공소(控訴)를 제기했으나 기각되었다.

이들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대구 대명동 공동묘지 만세사건에서 드러나는 것은 당시 조선민족으로 어디서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것이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묘지 제례 자리는 일반적으로 엄숙해야 하는 곳인데도 군중 50여명이 모였다는 것은 최경삼의 딸이 어떤 연유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날 적어도 그 자리가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울분을 표출하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였음을 시사한다. 즉 조선 사람이 모이는 곳은 장터이든 묘지이든 만세를 부를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명동 대구부립 공동묘지는 우리 곁의 작은 항일 공간이었던 것이다.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남문외 봉기>

서울의 3‧1운동 소식이 경북 달성군 공산면 동화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들에게 전파되어 일어난 것이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남문외 봉기’이다. 상당한 지역의 만세운동에 개신교계 인물이 관련된 것과 달리 이 봉기는 불교 학림 학생들이 연락, 모의, 실행에 참가한 점에서 주목된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불교를 지배하기 위해 본말사 제도를 시행하여 친일불교 기반조성에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불교 중앙학림 학생 윤학조(25세)는 3월 23일 고향인 공산면으로 내려와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권청학, 김문옥 등을 만나 민족독립을 위하여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도 궐기할 것을 종용했다.

이 결과 권청학 등 학림 학생들은 공산면 백안장날을 이용, 봉기할 것을 고려했다. 백안 장터는 규모가 작아 효과가 적을 것이란 윤학조의 권고로 봉기 장소를 대구부 한 복판인 대구 남문외(덕산정) 시장에서 봉기를 결정했다. 윤학조의 권고를 받은 김문옥, 권청학 등 학림 학생은 3월 28일 지방학림 학생 전원을 동화사 심검당에 모았다.

“신문기사를 보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내 각지에 있어서는 이미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들도 조선민족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선독립만세운동을 발의했다. 학림학생 전원이 찬동한 가운데 봉기일은 3월 30일, 봉기장소는 남문외 시장으로 결정되었다. 학생들은 준비를 위해 3월 29일 대구에 있는 동화사출장소 김상의(金尙儀) 방(方)으로 가서 유숙하면서 준비물을 제작했다.

태극기를 백포로 제작, 장대에 매어 달고 약정한 장소에 잠입했다. 장꾼은 이미 장터를 메웠고 약속한 오후 2시경 장꾼 3천여명(판결문 약 2천명)으로 불어났다. 학생은 장 복판에서 준비해간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일제히 ‘조선독립만세’ 고창(高唱)을 했다. 이어 학생들이 시위대선두에 서서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급보를 받은 일본 군경이 총검으로 군중을 위협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동화사 지방학림 주모 학생 13명 전원이 체포됐다. 체포된 학생 주모자는 다음과 같다. 이성근 19세 김문옥 20세 이보식 20세 김종만 21세 박창호 19세 김윤섭 20세 허선일 23세 이기윤 21세 권청학 21세 이들 9명은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각각 징역 10개월 형을 받았다.

이들이 공소를 제기한 결과 대구복심법원은 대구지방법원과 같이 징역 10개월을 언도했다. 이들은 모두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어린이 만세운동>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영화운동을 일으킨 기억할만한 선구자적 인물로 몽재 이원식(李元式)이 있다. 영천한의원 원장의 조카로 한의생, 양의사로서 의업에서도 개척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영덕 병곡 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 생활한 이원식은 일제의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 구금 - 석방을 거듭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구의 영과회 회원이기도 했다. 진귀한 우리고서, 의서를 다량 구입, 연구한 서지학자, 동의학자로서 활동했다. 대구에서 코레아영화제작소를 설립, 영화제작이란 문화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한 인물이다. 그는 해방 후 10월 영화공장으로 개편했다. 해방 후에는 대구평의회(대평) 소속 의무노조위원장으로 칠성동에 의원을 설립했다.

서민(실비) 및 노조원(무료) 의료보장사업에 앞장섰다. 3‧1운동과 관련, 주목할 부분을 그의 친필 연보(年譜)에서 발견했다. 연령과 사항은 1913년 2월 19일(정월 초십일)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읍 성내동 151번지에서 소지주에 한방의였던 이경진(李璟鎭)의 4남 호영(浩英)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아버님은 미남 개화인이었다.

1919년 7월 3‧1 때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따라다니다가 혼이 났다 1921년 9월 은해사 부근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천재시동이란 칭찬을 받았다. 1922년 10월 4월 1일 영천 공립보통학교 1학년 입학(담임선생 이우백(李雨栢)이 미남 동생과 예쁜 누이는 마진(痲疹) 폐렴으로 죽고 무녀독남이 되었다.

1923년 11월 홍수 직후 멱을 감다가 격류 와중에 돌입직전 구출됐다(十死十生의 一) 6월 10일 「일본기념일」행사로서 시가행진하다가 어느 다리 밑에 숨어 일장기를 찢어버렸다가 벌을 받았다. 겨울 빙상(氷上)에서 놀다가 어름구멍에 빠져 흘러가다가 구사일생 구출됐다(十死十生의 이(二) 이우백은 관립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훈도로 근무하다 조선민보대구(일본인이 경영했던 신문사) 기자였다.

1940년 말 조선총독부는 ‘언론사 1도 1사’ 방침으로 대구일보와 조선민보가 합병해 ‘대구일일신문’으로 창간됐다. 그 신문사의 기자였다. 해방 후 ‘대구일일신문’이 ‘대구시보’로 제호를 변경 후 발행하자 그 신문의 간부를 역임했다. 대구의 제1차 학생봉기에서 대구고보 학생이었던 백기만, 이상화가 계성학교 학생들과 합동으로 만세운동 거사를 준비했다.

청소년 때 만세운동 뿐 아니라 친일협력자, 친일행각자, 항일지사를 만나는 것은 그의 일생에서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다. 이상화, 백기만 등의 생애를 통해서도 그 점은 확인됐다. 이원식은 어린이 시절 만세운동 행렬을 따라다닌 경험. ‘일본기념일 2월11일 건국기념일(建國記念の日)에 총독부 황민화교육에 따라 학생들 시가행진 때 참가한 경험. 어느 다리 밑에서 일장기를 찢어버린 경험은 이원식을 일제 저항인물의 토양이 됐다.

이원식은 조선일보에 조선인으로 민족을 일깨우는 글을 연속 발표, 영과회 4회 미전(美展)에 출품 및 만경관의 박민천과 함께 영화운동(박민천 시나리오, 김유영 감독, 이원식 설립 코레아영화제작소(이원식, 박민천, 김해생) 제작(원작 박민천 ‘낙동강’, 개제 ‘황혼’, 최은희 출연)을 한 것, 노동야학교 운영 등 훗날 민족문화운동의 씨앗 구실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원식은 이외 조선일보에 ‘광명은 빈민촌에서’(교육론 제창, 1930. 8. 29.) 기고, 조선일보사 주최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문자보급운동에 참가, ‘한글원본’을 배포하고 문맹퇴치운동에 적극 참가실천으로 수상 등 일제가 외면한 민족교육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다만 백기만, 이상화, 이원식 등 인물이 작고했다. 당대에 항일운동을 한 인물의 관련 자료가 여러 사정으로 압수, 소각 등 일실(逸失)된 것이 많다.

이에 생애사를 민족운동사 차원에서 적절히 조명하기가 쉽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관심 있는 후학이 과제로 삼을 일이다. <농민운동 탄압> 항일운동으로 일제의 수탈이 집중된 농업 분야와 관련, 일제가 농민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상주의 농민운동과 관련하여 일별했다.

상주군 대평농회 조직과 관련하여 경찰에 체포된 채홍국 대평농회 사건을 당시 신문보도에 의거하면 다음과 같다.

상주군 이안면 이안리 거주하는 상주 대평농민조합원 채홍국은 상주청년동맹원으로 조직된 MI당 야체카 책임자란 혐의로 검찰에 검거되었다. 이어 조사를 받고 불기소 처분됐지만 상주경찰서에서 다시 검거하여 조사했다. 상주 대평농민조합 신영철 등 5명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으로 넘어간 뒤 상주경찰서가 경북경찰의 지휘를 받아 혈안이 됐다.

‘최 경부’는 악질적인 매국친일파 고등경찰 최석현이다. 상주군 이안면 이안리에서 대평농민조합을 결성하자 검찰과 경찰이 상주와 문경 등 북부지역 농민운동 ‧ 청년운동을 봉쇄하기 위해 공산당조직으로 몰아갔다. 그 이유는 조선중앙일보 1928년 4월 26일 4면 기사처럼 대구지방법원 검찰국이 불기소 처분한 뒤 석방하지 않고 고등경찰이 재 검거 후 조사하는 상황에 유의 할 수밖에 없다.

대평농민조합 사건 보도는 일종의 여론몰이다. 일제 검찰 경찰 배경에는 조선총독부가 지주를 지배함으로 농촌과 농업 및 농민을 지해하는 방식을 농민조합원이 수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 목표는 조선의 농업을 지배하여 안정적으로 저가의 쌀을 일본 본토에 공급하는 데 있었다.

이에 농민조합이나 농민운동은 총독부가 목표달성의 방해꾼으로 인식하고 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휙으로 저가의 조선미를 일본으로 반출했다. 1930년대 중후반부터 국가총동원령으로 미곡을 공출하는데 총력을 기울인 조선총독부는 농민생활의 안정 ‧ 향상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실의 조선농민은 대개 소작농, 자소작농으로 지주와 소작계약을 통해 소작권을 인정받아 농사를 짓는 형편이다. 지주의 소작료는 대개 농비를 소작인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생산량 50%, 지주에 따라 70% 요구하는 실정이다. 이 같은 고율 소작료 징수가 가능한 것은 조선총독부가 지주조직인 지주회를 지원했던 이유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농민조합을 탄압하는 방편으로 총독부 지원 조선농회를 활용했다. 조선농회는 관변농업조직으로 총독부 비호아래 권력과 자금으로 자발적 농민활동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에 대하여 특히 조선인 발행 민간지는 1920년대에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농민, 농업문제 관심을 기울였다.

그 배경에는 각지에 조직된 지방기자단이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1930년대를 넘어가면서 일본인 발행 신문이 지방으로 보급망을 확장함에 따라 지방기자단은 일본인신문 지국장 영향력에 크게 의존했다. 그 결과 지방기자단은 특수한 경우나 지역을 제외하면 대개 지방지국장 교류장으로 신문보급수단으로 문화행사(영화관람회, 소인극 개최 등)를 마련했다.

조선총독부 방침에 따라 국방헌금 ‧ 비행기헌납운동을 위한 언론 캠페인을 펼치는 방향으로 관심영역이 옮아갔다. 아무리 조선총독부라 하더라도 언론이 감시할 경우 활동에 제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언론이 총독부에 협조하는 매국친일환경이 조성되면서 조선민중의 실생활은 근본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관에 대한 통제가 사라지거나 약해지고, 대신 조선민중을 동원하려는 관의 압력이 날로 높아가는 상황은 일제에 대한 저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조선총독부는 내지 일본인을 조직화 조선민중 동태를 감시 탄압하는 한편 조선인 사이에 협력조직을 만들고 밀정을 운영해 밀고를 받았다. 양면으로 일제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세력을 말소하려 했다.

만주에서 조선인 무장독립부대를 타격하기 위하여 일제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편성 운영했다. 이런 경험으로 일제는 한반도 내 교풍회, 자제단, 자위단 등의 동(정, 町) 총대 조직을 통해서 일제에 반대하는 세력을 발붙일 여지를 없애려 했다. 이는 <우리 곁에 친일 아닌 우리 안의 친일세력>이다.

상주 대평농민조합이 탄압을 받을 당시 상주기자단의 조직과 활동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상주기자단 발회식 거행> 조선신보朝鮮新聞1929년 9월 20일자 경상북도 상주지역을 취재권으로 하는 상주기자단의 활동내용은 이 보도에서 보여주는 대로 각 신문사의 지국장을 회원으로 하는 지역언론인교류회의 성격을 띤다.

<상주기자단 연예회> 부산일보釜山日報 1934년 8월 21일자 <상주기자단 총회> 매일신보每日申報 1935년 2월 13일자 <상주기자단 정기총회> 매일신보每日申報 1935년 7월 25일자 <상주기자단 회합>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4년10월 6일자 조선중앙일보 등 보도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지국장이 신규로 가입하는 것을 기존 회원들이 허락하고, 회비는 2원으로 하는 것을 정했다. 그렇다면 기존 회원은 거의 일문신문 지국장이 맡아온 것을 확인해주는 문서이다.

결정사항과 관련 사례는 회비납입의 건, 함창수영대회의 건, 시사에 대하여 군수서장 방문의 건, 역원 개선을 안건으로 냈다. 정기총회 또는 회합 형식의 알림에서 이런 성격의 의안이 처리된다는 것은 이 회합이 적극적으로 보도와 관련한 일을 한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주기자단 총회> 부산일보釜山日報 1935년 7월 24일자 <상주기자단 정기총회>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5년 9월 8일자 등 상주세무서장의 초대연이 있다는 것이나 회장의 자택에서 회합을 하는 것 기자단 단장과 임원이 일본인이라는 것은 전형적인 취재원 언론사 유착관계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일이다.

<상주기단 국방헌금>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8월 9일자는 상주기자단이 국방헌금을 납부했다는 기사다. 중국 침략기의 일본은 필요한 전쟁비용마련을 위해 국방헌금, 비행기(애국기 헌납)를 식민지에서 거둬들이거나 헌납 받는 사업이 절실했다.

상주기자단은 조선총독부의 의사를 미리 알고 자신(언론인)이 국방헌금을 납부하는 것을 보도함으로써 독자들과 일반 신민이 국방헌금을 하도록 선전 유도했다. <상주기자단 주최 점촌수영회> 매일신보每日申報 1936년 8월 2일자 <상주수영대회> 내 16일로 연기 매일신보每日申報 1936년 8월 12일자 등은 경상북도 상주지역에 수해가 발생하자 수해의연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또는 회사 수입을 올리려고 수영대회 개최 기사이다.

<상주기단 주최 구제소인극 성행> 매일신보每日申報1934년 8월 24일자 또는 <경상북도 상주군 수해구제소인 연예대회 개최> 慶尙北道, 尙州郡水害救濟素人演藝大會開催 조선신문朝鮮新聞1934년 8월 26일자연예회(소인극 공연 등)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1920년대 상주기자회(기자단) 등에서 행정기관 비판이나 사회성 있는 보도는 여기에 예시한 기자단 취재에서 찾을 수 없다. 이 같은 지방기자단의 구도에서 이들이 할 일은 부 ‧ 군(행정도 內 시, 군)이 필요로 하는 사항을 홍보하거나 보도관제 기관(조선총독부 문서과, 조선군 보도부)의 방침을 전달하는 일이 전부였다.

경찰이나 검찰에서 나오는 사건보도는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한 인물은 앞의 채홍국 대평농민회 사건 보도에서 보듯 일반 독자들이 ‘위험한 인물’로 알도록 ‘불량배 / 테러범 / 공산당 / **주의자 / 폭도 / 비도’ 등 용어를 구사하여 최대한 일반인으로부터 배제 분리 고립시키려 했다.

경상북도 상주군 수해구제명인 연예대회 개최 조선신문 1934년 8월 26일자 /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연구원 여은경 박사 제공
경상북도 상주군 수해구제소인 연예대회 개최 조선신문 慶尙北道, 尙州郡水害救濟素人演藝大會開催 朝鮮新聞 연예회(소인극 공연) 개최를 알리는 조선신문 기사 1934년 8월 26일자 /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연구원 여은경 박사 제공

기자단의 일본인 임 ‧ 역원은 비록 그들이 언론사 관계자라고 하여도 일본의 이익을 지키는 선에서 활동했다. 그들 조선 내 일본인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조금이라도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인물은 ‘자위’ 수준에서 통보 통지했다.

그러나 국권을 강탈당한 식민지 사람들에게 특히 국권회복을 위하여 다방면에 걸쳐 투쟁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통지 통보는 그대로 ‘밀고’가 된다. <우리 곁의 친일세력>인 것이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로부터 무기를 대여 받고 ‘진압’ 차원에서 조선 민족을 대할 때 그들은 무장한 일본 군경과 다를 바 없다.

상주기자단의 경성일보, 매일신보, 부산일보, 조선신문 등 지국장, 기자들은 일본의 이익을 위하여 조선 농민, 조선 노동자, 조선의 총후(후방) 주부와 여성을 ‘보도’라는 명분으로 그 생산물의 염가 제공, 공출, 동원(노동자 ‧ 정신대 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날 <우리 곁의 친일 우리 곁의 항일> 무엇이 문제인가? 강좌를 맡은 강사 여은경 박사는 “우리 곁의 매국친일세력인 일제식민지시기 그들은 일제를 위한 조선 민족 위의 또 다른 권력기관이었다”며 이제 우리는 과거의 외세의 그릇된 역사를 반성하고 새롭게 참 된 역사를 재정립 할 것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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