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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에서는 왜 원근법이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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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에서는 왜 원근법이 없었을까
근본적 질문 던지는 나형민 작가 그림손갤러리 전시
풍경화는 주체의 탄생에서 시작돼
스스로의 담론을 성찰하는 이성추구
  • 편완식 기자
  • 승인 2020.03.26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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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형민 작가의 전시(24일까지 그림손 갤러리)는 풍경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풍경이 자명하고 보편적이라는 인식은 의심해야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이다. 특정 계기를 거처야 개념(장르)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산수화에서 풍경은 대상을 그 자체로 보지 않는 가치나 관념이 내포된 세계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기능적으로는 중세 유럽의 도상화와 비슷하게 묶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의 표현일 수 밖에 없었다. 원근법의 부재야 말로 그 명확한 증거다.

그렇다면 배경을 더 이상 관념이나 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경을 하나의 대상 그 자체로 묘사 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나와 무관한 타자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대상을 바라보는 나는 내 주위의 외부적인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정도로 독립적인 ‘내적 인간’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내면의 탄생이고 풍경은 이 내적인 인간에 의해 발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형민 작가의 작업노트는 이런 인식을 엿보게 해준다 풍경속에 능(陵)과 보름달이 등장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두려운 대상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회피하고 영생불사, 불로장생 또는 죽음 이후의 부활의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존재도 영생할 수 없으며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한 줌의 흙으로 이루어진 능(陵)이란 삶의 한계이면서도 생과 사의 경계이다. 남양주에는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광릉, 유릉, 홍유릉 등 여러 능묘(陵墓)를 볼 수 있다. 이 왕릉에는 전통적인 수종으로서의 큰 소나무가 가득하여 인위적이지 않은 경건함을 풍긴다. 사철 푸르름을 머금고 있는 소나무는 절개의 상징이자 작가 작품의 제재로서 자주 활용되기에 왕릉은 때때로 방문하는 좋은 소재처이다. 특히 남양주 진건읍 사능리에는 소재로서의 겨울 노송(老松)의 이미지를 다수 채집할 수 있었던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의 사릉(思陵)이 있다. 그녀는 단종의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강등 된 후, 다시금 숙종 때(1698) 정순왕후로 복위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왕후에서 노비로까지 떨어졌으나 이후 다시금 복권되어 왕후로 되살아난 역사적 터전을 이번 작품의 주된 소재이자 재생의 함의를 담은 요소로 활용하였다. 재생(再生)이란 보통‘죽음 이후에 다시 태어난다(rebirth)’는 되살아남의 뜻으로 부활의 의미가 담겨있다. 사릉의 정순왕후의 육신은 비록 물리적으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후 다시금 단종 복위와 더불어 재생의 지평으로 부활하였듯이 재생이란‘의미 또는 가치의 되찾음, 되돌아감’으로서 복귀의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재생에는 마치 보름달이 가득 찼다가 사라지고 이내 다시 채워지듯이 순환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삶과 죽음, 내세와 외세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는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 또는 다른 세계로의 전환이다. 따라서 능(陵)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이(this) 세계에서 저(that) 세계로 또는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의 통로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언덕 앞 정자각(丁字閣)의 문은 두 세계의 사이에서 항상 열려 있다.‘

작품속에 불꽃도 등장한다. ”작품 지평에 자주 등장하는 불꽃으로서의 쥐불, 들불도 태움이라는 소멸을 통해 다시금 소생한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대보름날의 쥐불놀이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태워 외적 나쁜 것으로서의 들쥐, 해충, 잡초 등과 내적 나쁜 것으로서의 액운을 소멸시키고, 그 재가 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과 운명이 시작되듯이 재생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재생이란 소멸과 생성, 탄생과 죽음의 순환적 역사의 정점으로서의 문(門),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평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불꽃, 능, 보름달 등등의 주된 작품제재는 소멸과 파괴의 외적 이미지를 넘어 생명을 잉태하는 쥐불놀이와 같이 ‘소멸을 통한 정화’와 그로 인한 다시 태어남(再生)의 함의가 있다.“

이번 전시에는 랜티큘러를 통한 풍경작품인 랜티스케이프(Lentiscape)도 보여주고 있다. 랜티스케이프란 움직임을 통한 다원공간의 변환 또는 2차원의 평면 속의 심도 있는 공간감 표현이다. 이 공간과 저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시각적 일루전을 새롭게 구현한 시도다.

‘랜티스케이프(Lentiscape)’는 랜티큘러(Lenticular)와 랜드스케이프(landscape)를 합성한 작가의 조어(造語)다.동양화적인 랜티큘러 실험이다. 원근법의 서양 풍경화와 다시점 산수화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김우창의 ‘풍경과 마음’을 소환하고 싶다. 김 교수는  동양화가 ”인간의 지각체험에 확실하게 기초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우주론, 인간론, 사회철학 등으로 표출된 거대한 에피스테메(총체적 지식)의 체계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고, 이 체제가 만들어낸 세계는 적어도 그 근본적 통찰에 있어 오늘의 삶을 위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면서도 동양화의 미학이 세계독해의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다고 한계를 분명히 했다.

김 교수는 “그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가 서양이 만들어놓은 '근대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아직껏 이 세계에서 주인이 되지 못한 것과 관련있다”고 말했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이성의 원리를 나의 원리로 내면화하는 일’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직된 기계적 이성일 수는 없다. 자기 구원을 위한 조그만 실마리를 가진 이성, 스스로의 담론과 행위를 집요하게 성찰하는 이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주체의 탄생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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