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논쟁적 철학자 버틀러 97년작

▲ 혐오 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유민석 옮김/알렙·1만8000원

[뉴스프리존=안데레사기자] 그야말로 혐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혐오 발언’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했다. 낸시 프레이저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며 토론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주디스 버틀러는 이 책 『혐오 발언』에서 혐오 발언, 포르노그래피, 동성애자의 자기 선언, 십자가 소각, 국가 검열 문제 등 다양한 형태의 ‘상처를 주는 말’을 다룬다. 최근 대학가에서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카카오톡 단톡방 성희롱 사건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여성혐오 발언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보여준다. 혐오 발언은 여성뿐 아니라 외국인, 장애인, 특정 지역 등 대상을 국한하지 않고 자행된다. 특히 지난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기폭제가 돼 여성혐오를 비롯한 혐오 관련 논의가 급증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혐오 발언을 법으로 규제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규제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며 시민사회의 자정 기능을 강조하는 한편, 규제를 옹호하는 측은 ‘절제되지 않은 자유’의 파괴성을 강조하며 표현의 자유에도 얼마든지 제한이 가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젠더는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행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는 ‘젠더 수행성’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주디스 버틀러 교수(미국 UC버클리 비교문학과)는 『혐오 발언』을 통해 “혐오 발언을 법적으로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말을 비틀고 바꿔 저항하기

철학자 레이 랭턴과 법학자 마리 마츠다, 캐서린 매키넌 등의 학자들은 혐오 발언이 ‘그냥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닌 폭력이자 차별 행위라며 혐오 발언의 규제를 옹호한다. 혐오 발언이 수신자들을 열등하고 예속된 집단으로 못 박아 두는 ‘행위’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는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라는 개념이 전제돼 있다. ‘발화수반행위’란 언어 행위는 항상 발화자가 의도한 효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혐오 발언은 어떠한 예외도 없이 수신자에게 상처를 주는 효과를 수행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버틀러는 ‘발화수반행위’ 개념을 비판하고 ‘발화효과행위’(perlocutionary act)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발화효과행위’는 언어 행위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뜻하는 개념으로 혐오 발언이 반드시 수신자에게 상처를 주는 효과의 수행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혐오 발언의 효력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같은 혐오 발언과 상처 사이의 간극에 주목한 버틀러는 바로 그 간극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혐오 발언자가 애초에 의도한 맥락에서 탈피해 혐오 발언을 전유, 전복, 재배치함으로써 ‘저항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흑인에 대한 경멸적 용어인 ‘검둥이’(nigger)가 흑인 래퍼의 랩 음악 가사에 재배치되고, 동성애 공동체가 ‘퀴어’(queer)라는 욕설을 ‘퀴어 네이션’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함으로써 포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혐오 발언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흔히 혐오 발언은 권력을 가진 자가 이미 종속된 지위에 놓여있는 자를 재종속시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권력을 지닌 백인, 남성, 이성애자가 이미 종속적 상태에 있는 유색인종, 여성, 동성애자를 혐오 발언으로써 재종속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인종차별 발언을 비롯한 혐오 발언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버틀러는 혐오 발언자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이지 않다고 말하며 개별 화자에 대한 규제는 혐오 발언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 주장한다. 물론 혐오 발언의 역사성이 개별 화자에게 책임이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혐오 발언이 수신자에게 상처를 주는 이유는 개별 화자의 권력이 아닌 선행하는 관습의 반복을 통해 축적된 ‘말의 권력’ 때문이다. 즉 혐오 발언자는 혐오 발언을 창시한 기원적인 저자가 아니라 혐오 발언을 인용하는 파생적인 2차 저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혐오 발언자에게 처벌을 통해 책임을 묻는 것은 역사적 문제를 개별적 차원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버틀러는 또 국가권력의 편파성과 자의성을 이유로 들며 국가권력을 통한 혐오 발언의 규제를 경계한다. 가치중립성을 결여한 국가가 무엇이 혐오 발언인지 아닌지를 규정하게 된다면 권한 오용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이 같은 통찰은 민주화 이전 국가에 의한 사법 권력의 남용이 빈번했고, 현재에도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혐오 발언을 법으로 규제할 것이 아니라 전유, 전복, 재배치함으로써 혐오 발언에 저항해야 한다는 버틀러의 주장은 레이 랭턴, 리사 슈왈츠만 등의 학자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한다. 리사 슈왈츠만은 버틀러가 말하는 ‘혐오 발언의 재의미화를 통한 저항’이 쉬운 일이 아니라며 ‘퀴어’를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그는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오늘날과 달랐던 50년 전에 한 개인이 ‘퀴어’라는 용어를 단순히 재수행하거나 재의미화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을 거라고 지적한다. ‘퀴어’의 재의미화는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변화가 뒷받침돼 비로소 가능했다는 것이다. 버틀러의 논증을 악용해 “왜 반항하지 못하냐”라는 식으로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이 가해질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언어와 권력의 문제, 검열과 표현의 문제 등 다방면에 걸친 철학적 사유를 펼쳐 보이는 이 책이 현재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혐오 발언의 비틀기는 많이 시도된다. 그중에서도 8월 16일자 「슬로우 뉴스」의 ‘여성 상위시대’ 기사는 여성과 남성의 처지가 정반대로 뒤바뀐 가상세계를 그리며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여성 혐오 발언을 비틀어 제시한다. ‘여자는 목소리가 높으면 안 돼’와 같은 여성 혐오 발언을 ‘목소리 높은 남자는 공격적이고 위험한 남자’라고 되받아치는 식이다. 글쓴이는 ‘실화가 아닌 콩트일 뿐’이라며 글이 갖는 의미를 애써 축소한다. 그러나 버틀러에 따르면「여성 상위시대」는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닌 언어의 전유와 전복을 통한 혐오 발언에 대한 저항이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 대한 법적 처벌보다 언어의 전유와 전복을 통한 저항이 희망적이고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말로써 저항해야 한다.

저자소개저자 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Excitable Speech: A Politics of the Performative, 1997)은 미국의 철학자, 퀴어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61·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가 언어·발화와 관련해 쓴 중요 저작. 영국 언어철학자 존 랭쇼 오스틴, 루이 알튀세르를 경유한 버틀러의 수사학을 소상하게 밝힌다. ‘혐오의 시대’를 맞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또다시 뜨거운 비평적 담론을 촉발할 만큼 논쟁적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사회적 성을 가리키는 ‘젠더’가 원본 없는 문화적 전략이며 반복, 모방이라는 주장(<젠더 트러블>)을 한 바 있다. <혐오 발언>에서도 그는 발화자가 말을 반복할 뿐, 원저자가 아니었음을 강조하며 말의 권력을 해체한다. 알렙 제공

버틀러는 이 책에서 다양한 형태의 ‘상처 주는 말’(injurious speech)을 설명하면서 혐오 발언 규제, 반포르노그래피 논증, 군대 내 동성애자의 자기선언, 국가 검열 등의 논쟁을 검토한다. ‘혐오 발언’(hate speech)은 책의 핵심인데, 특히 버틀러가 여러 페미니스트·반인종차별주의 이론가들의 주장을 설명하며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이 중요하다.

버틀러가 거론한 이론가들은 혐오 발언이 ‘그냥 말’이 아니라 ‘언어적 따귀’라고 본다. 폭력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며 차별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반포르노 활동을 펼친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가 일종의 혐오 발언이며 여성을 종속적 위치에 두면서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버틀러는 “포르노그래피의 권력은 효력적이지 않다”며 차별·혐오적 ‘말’이 곧바로 상처가 되며 행위로 연결된다는 점을 의심한다. 혐오 발언은 강자의 차별을 정당화하고 약자들을 발언하지 못하도록 침묵시킨다(레이 랭턴)는 대부분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다.

저서 (총 23권)주디스 버틀러 퀴어 이론의 창시자이자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적 이론가. 1956년에 태어나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자랐다. 1984년 예일 대학교 철학과에서 프랑스 철학에서의 헤겔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7년 박사학위논문을 바탕으로 첫 책 『욕망의 주체』를 출간했다. 그리고 1990년 『젠더 트러블』을 출간하며 학계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섹스/젠더의 이분법을 허물면서 기존 페미니즘 정치학에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스스로 레즈비언임을 밝힌 바 있는 버틀러는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보부아르, 크리스테바, 프로이트, 라캉, 이리가레, 위티그, 데리다, 그리고 푸코에 이르기까지 유명 철학자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논의했다. 이 책은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1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인터넷상에 국제 팬진(fanzine) ‘주디!’를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슈퍼스타로 만들었다.버틀러는 1999년 미국 학술지 『철학과문학』에서 ‘최악의 저자’에 뽑힐 만큼 난해한 글쓰기로 악명이 높지만, 다양한 학술 분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오늘날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로 인정받고 있다. 2012년에는 ‘정치이론, 도덕철학, 젠더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아도르노상을 수상했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이론가이자 여성주의 이론가 중 한사람’으로 평가받는 버틀러는 최근에는 시오니즘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국가폭력에 반대하는 유대인 행동주의자로서 당면한 쟁점들에 대한 글쓰기와 집단적 행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그녀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언제나 탁월한 문학적 수사를 경유해서 구체화된다. 그런 면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성찰성은 시적 문장들과 만나면서 인간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슬픔을 전염시키는 기이한 장면을 드러낸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수사학 및 비교 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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