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 안병하 평전 “경찰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

책을 들어가기전 안병하는..?

1980년 5월 18일 그날,

경찰은 피해자일 수 있을까? 공수부대와 경찰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

상급자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1980년 5월, 경찰도 시민과 함께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섰다.

그 맨 앞에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이 있었다.“

“풍부한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경찰의 시각에서 5.18을 새롭게 조명한 소중한 기록이다.”

_이철우(5·18 기념재단 이사장)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의 행적을 여러 기록과 증언을 통해 40년 전 그날로 재현했다.

경찰의 눈과 귀로 읽는 ‘새 것의 5.18’을 만나는 일이야 말로 이 책의 소중한 성과이다.“

_나의갑(광주전남언론인회 회장)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집필한 이재의 작가의 안병하 평전

『안병하 평전』은 풍부한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5.18을 경찰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서 싸운 광주시민들의 항쟁은 6월항쟁과 촛불혁명으로 이어져 한국 민주주의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5.18때 전남경찰은 상부의 거듭되는 강경진압 지시에도 불구하고 4.19때와 달리 시민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신군부의 무자비한 유혈진압 지시에 나름대로 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찰이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선 ‘그날’의 진실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특히 “경찰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는 신념으로 신군부의 강압적인 지시를 끝내 거부함으로써 시민과 경찰의 생명을 지킨, 당시 전라남도 도경국장 안병하의 이야기는 최근까지도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1980년 5월 17일부터 전남도청 최종 진압작전 하루 전인 5월 26일까지 안병하 당시 도경국장의 행적을 쫓아,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던 한 공직자의 용기와 깊은 고뇌를 평전으로 형상화했다. 무엇보다도 안병하 국장이 남긴 마지막 유고인 ‘비망록’의 행간에 시간과 공간을 덧입힘으로써 80년 ‘그날’의 진실을 경찰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소환한다. ‘광주시민의 목소리를 담은 5.18의 최초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고를 집필했으며,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한 이재의 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저자는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따르지 않은 안병하 국장의 행위를 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의 ‘불복종’에 비유한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파리의 모든 기념물 및 주요 건물을 남김없이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콜티츠는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파리의 황폐화를 막았고, 그럼으로써 파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소개

저자 : 이재의
1956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으며 전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조선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했다. 《광주일보》 ‘월간 예향’ 기자, 《광남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80년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했으며, 그해 10월 체포돼 1981년 8·15 특사로 석방됐다. 5·18 광주항쟁 최초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기록) 초고를 1985년 작성했고, 2017년 이 책의 전면개정판을 공동집필했다. 2000년 내외신기자들의 5·18 취재기 THE KWANGJU UPRISING (M.E. SHARPE)을 《뉴욕타임스》 특파원 헨리 스콧 스톡스(HENRY SCOTT STOKES)와 함께 편집하여 미국에서 펴냈다. 현재 5·18 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출판사 서평

안병하 치안감은 누구인가

안병하 치안감은 육사 8기로 군에 입문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등 안병하의 동기생들은 5·16 군사정변 당시 주력군으로 참여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 2개와 상이기장, 6·25 참전기장 등을 수훈했으며, 1962년 11월 총경으로 특채돼 경찰에 투신했다. 경찰 입문 9년 만인 1971년에 경무관으로 승진한 뒤 치안국 소방과장, 방위과장을 지냈고, 강원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을 거쳐 1979년 2월 20일 전라남도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무자비한 시위진압을 하자 여기에 맞서 경찰 무기를 미리 대피시키고, 상부의 강경진압 지시 등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다. 광주진압 하루 전인 5월 26일 그는 ‘직무유기 혐의’로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합동수사본부에 강제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8년을 투병하다 1988년 10월 10일 60세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유족들의 지난한 명예회복 과정을 거쳐 안병하 경무관은 2017년 경찰청이 처음 시행한 ‘올해의 경찰영웅’ 제1호로 뽑혔으며, 2017년 11월 뒤늦게 치안감에 추서되었다.

5월 15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방문

“거 참, 어제는 박관현이라고 하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날 찾아 왔는데 그 친구 참 똑똑합디다. 날더러 학생 시위를 허락해달라는 거요.”

책은 5월 15일,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과 안병하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박관현이 경찰국장실로 찾아간 것은 15일 오전 10시 무렵이다.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어요. … 경찰국장과 만나서 나눴던 이야기와 반응을 자세히 들었는데 상당히 놀랐습니다. 당시 안병하 국장은 우리의 제안에 대하여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도청 앞 집회를 평화적으로만 진행한다면 경찰이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어요.”

전남대 총학생회 기획실 책임자의 증언이다. 안병하 국장은 1970년 박정희의 ‘3선개헌’으로 정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시기에 서대문 경찰서장으로 근무했다. 그가 근무하는 동안 당시 학생시위가 빈번했던 신촌지역에서 시위로 인한 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아서 주목을 받았다. 그만큼 강압적인 시위진압보다 평화적인 ‘시위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위현장에서 경찰 지휘관은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상황에 신속하게 대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시위대와 정면으로 충돌하기보다는 분산시켜 가급적 폭력상황으로 번지지 않도록 시위상황을 미리 관리하는데 중점을 뒀다. “시위는 학생들의 정치적 의사표현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가는 시위대를 쫓지 말라

당시 시위진압에 참여했던 기동중대장들의 증언을 보면 “안병하 국장은 시위 시민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항상 안전수칙을 준수하며 도망하는 시위대를 쫓지 말고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쓰라”고 당부했다. “안 국장은 공격 진압보다는 방어 진압을 우선시 했고, 진압을 하되 꼭 방어 진압을 강조”했으며 “특히 시위 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쫓지 말라”고 지시했다.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한 배경에는 시위진압에 대한 안병하 국장의 평소 신념이 깔려 있었다.

안병하 국장과 전두환의 만남,
- 미망인 전임순 여사의 증언으로 전두환의 광주 방문 밝혀져

지금까지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과 재판 과정에서 5.18 당시는 물론 그 전에도 광주를 방문한 사실이 없었으며, 헬기 기총 사격 사실도 모두 부인했다. 그러나 책의 저자는 안병하 국장의 미망인 전임순 여사의 증언을 통해 전두환의 광주 방문을 확인해주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더 분명해질수록 계엄사령부가 어떤 강력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 순간 안 국장의 뇌리를 퍼뜩 스쳐가는 불길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날짜는 분명치 않지만 며칠 전 전남 도청에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다녀갔다. 전두환의 전남 도청 방문은 극비리에 진행됐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알지 못했다. 막강한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그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안 국장은 그날 도청에서 전두환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안병하 국장이 학생 동향 등 계엄업무에 대한 보고를 했다. 전두환이 도청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전 사령관은 안 국장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선배님, 조만간 서울 오시면 저에게 한번 들러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좀 있으니….”(41-42쪽)

저자에 따르면 지금까지 5.18 관련 공식문서 어디에도 그 시기에 전두환의 광주방문 사실은 찾아볼 수 없다. 전두환의 5.18 당시 행적은 아직도 비밀에 싸여 있기 때문에 미망인의 증언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계엄군, 경찰에게도 폭력 행사 증언

광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의 폭력과 만행은 여러 증언과 사진을 통해서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과 공수부대 사이에 있었던 긴장과 충돌에 대한 이야기는 드물다. 과연 경찰과 공수부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나? 저자는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내용과 전남지역 각 경찰서의 1980년 상황일지 등을 통해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5.18당시 공수부대와 경찰의 대립을 소개한다. 경찰에 무기가 있었다면 공수부대와 교전이 벌어질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은 험악했다는 것이다.

“공수대의 만행을 지켜보던 경찰 간부 한 사람은 충장로 주변 골목길에서 서성이는 시민들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 게 걸리면 다 죽는다”면서 울먹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광주경찰서에서는 사복을 입고 계급장도 달지 않은 보안대 요원이 서장실에 들어가 안하무인격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며 지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경찰국 작전과장이 공수대원에게 폭행을 당했고, 광주경찰서 경비과장도 강경진압을 말리다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광주경찰서 직원들은 공수대원들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갖게 되었다. … 광주경찰서 청옥파출소에 근무하다 시위진압에 동원된 경찰 신○○와 광주경찰서 안○○은 “만약 경찰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공수부대와 교전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경찰이 공수부대의 거친 행위에 얼마나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증언이다.(76-77쪽)

경찰은 공수부대의 투입을 요청하지 않았다!

1980년 전남경찰국에서 작성한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에는 경찰이 군에 최초로 병력지원을 요청한 것은 단 두 차례였다.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작전으로 인해 시내 상황이 악화된 다음 날인 ‘19일 오후’ 경찰이 시위 군중에 포위되었을 때 긴급히 7공수에게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 최초다. 그러나 『전두환 회고록』에서는 ‘전남경찰국의 요청’으로 계엄군이 시위진압 전면에 나섰다고 사실을 왜곡한다. 이 책은 『전두환 회고록』의 거짓 주장을 경찰의 시각에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안병하 국장은 17일 자정을 전후해서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 2개 대대가 배치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적지 않은 규모의 공수부대가 한밤중에 전남대와 조선대 운동장에 은밀하게 진주한 것이다. 광주에서 마지막 학생시위는 하루 전인 5월 16일 밤 10시경 경찰의 보호 아래 횃불행진으로 평화롭게 마무리 됐다. 학생들은 당분간 더 이상 시위를 하지 않기로 경찰국장인 자신에게 약속까지 했었다. 기록에 따르더라도 신군부의 5.17 조치 이전까지 서울이나 전주, 대구 등지와 달리 광주에서 폭력시위는 없었다. 그러나 계엄당국은 5.17 이전 광주 학생시위가 혼란스럽고 폭력적이었다고 반복해서 거짓 사실을 강조하면서 계엄군 투입의 명분을 만들어냈다.

유족의 완전한 명예회복, 언제나 가능할까

5.18이 역사적인 평가를 거쳐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안병하의 행적은 역사의 오래토록 뒷전에 묻혀 있었다. 5.18 이듬해부터 전두환 정권은 경찰을 앞세워 망월동에 묻힌 희생자들의 묘지를 강제로 이장시켰다. 강제이장을 거부하던 5.18희생자 유족들의 반발은 고스란히 경찰에 대한 원망으로 쌓여갔다. 그런 상황에서 안병하 국장의 유족은 명예회복을 위해 치안본부, 보훈처 등 온갖 군데를 돌아다녔지만 누구하나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세상의 무관심에 상처받고 그 억울함이 한이 되었다. 고문으로 인한 사망을 인정받아 보상금을 받고, 국가보훈처에 광주민주유공자로 등록되는 과정, 그리고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고 마침내 보훈처 순직 인정,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기까지의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안병하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꼽아본다.

“첫째, 신군부 잔존세력의 지속적인 5·18 왜곡 속에서 안병하는 ‘직무유기를 한 경찰지휘관’으로 폄훼되어 왔다. 둘째, 5·18 이후 치열하고 지난한 민주화과정에서 경찰은 과거 군부독재시절과 별다른 차이 없이 정권 수호의 파수꾼 노릇을 했고, 경찰의 본분에서 벗어난 행태에 대하여 국민들의 불신이 널리 퍼져 있었다. 경찰 수뇌부는 정권의 눈치를 보며 5·18을 거론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안병하 국장과 그의 가족들을 외면했다. 6월항쟁을 불러왔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정치사찰 등 해서는 안 될 인권침해 사건들을 당연하게 여겼다. 정권의 이해에 따라 경찰력 집행이 자의적으로 이뤄지는 흐름이 지속됐던 것이다. 셋째, 광주시민들 역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안병하 국장의 역할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당시 5·18 분열공작에 경찰이 앞장섰고, 이 과정에서 5·18 기간 중 형성됐던 광주시민의 경찰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233쪽)

안병하의 ‘비망록’에 담긴 진실

“계엄사 통제를 받는 치안본부 등 윗선에서는 광주 현장에 있는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 같다는 낌새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순간 안 국장은 한 가지 원칙을 자신의 마음속에 분명히 세웠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경찰의 본분을 끝까지 잃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4.19 때처럼 경찰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다고 결심한 것이다.”(91쪽)책의 ‘부록’에 수록된, 사망 직전 혼미해져가는 의식을 붙들고 안병하 국장이 남긴 마지막 유고 ‘비망록’은 ‘안병하 정신’의 정수를 담고 있다. 그것은 곧 경찰에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한 헌법 정신이기도 하다. 부당한 정치권력이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해 경찰을 이용하려 할 때 지휘관의 임무(responsibility)와 책임(accountability)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책 사러가기]

‘전두환 회고록’ 거짓 주장 낱낱이 밝힌 <안병하 평전> 출간
지은이 이재의 “경찰이 전두환 쿠데타 세력 잔혹한 유혈진압 거부한 찬란한 역사 기록”
[프레시안 /박호재 기자(=광주) / 2020-04-25)]
지난 2017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가면을 쓴 사탄 또는 성직자가 아니다”고 표현해 사자명예훼손죄로 오는 27일 전두환은 광주 재판에 참석해야 한다.

이날 오후 2시 광주지법 법정동 201호에서 열리는 전씨의 재판을 앞두고 시민사회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이뿐만 아니라 ‘전두환 회고록’의 상당 부분이 “거짓과 왜곡으로 채워져 있다”고 밝히는 <안병하 평전>(이재의 지음)이 출간을 앞두고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평전에서 밝힌 증언들은 고 안병하 치안감(당시 경무관)이 5·18 당시 광주전남지역 치안 총괄 책임자로서, 항쟁 현장의 상황과 전두환 신군부의 움직임을 경찰 진압작전 보고와 내부 정보망을 통해 속속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전두환 회고록’이 거짓 주장으로 왜곡돼있음을 밝히고 있음은 물론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평전을 집필한 작가 이재의는 “전두환 신군부는 당시 광주학살이 안병하 도경국장이 전남경찰의 초기 진압 실패에 따라 시위가 폭동으로 확대된 것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강변하며 “책임을 경찰에 전가하는 시도가 전두환 회고록은 물론 군부가 작성한 각종 기록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덧붙여 이 작가는 고 안병하 치안감의 육필 비망록에 근거해 평전을 집필하면서 “당시 안병하 도경국장이 지휘한 광주전남 경찰은 계엄사의 강경진압을 거부한 시민의 편이었고, 광주 시민들 또한 경찰의 안위를 오히려 걱정하는 등 경찰의 편이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회고록'은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민의 분노를 촉발시킨 7공수여단의 광주진입을 5월 18일 2시 안병하 도경국장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평전은 이 내용은 조작된 사실임을 증언하고 있다.

평전이 인용한 전남경찰국 작성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사항’ 문건에 따르면 경찰이 군에 최초로 병력지원을 요청한 것은 단 두 차례였다. 첫 번째는 5월 18일 2시 경이 아니라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작전으로 시가지 상황이 악화된 다음 날인 19일 오후, 경찰이 격앙된 시위군중에게 포위되면서 긴급히 7공수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두 번째 요청은 20일 저녁 무렵에 이뤄졌다. 시위대가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도청으로 밀려오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5·18 시민항쟁 기간을 통틀어 경찰은 그렇게 단 두 차례 군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전두환 회고록’은 또한 곳곳에서 공수부대 투입 책임을 안병하 국장에 떠넘기고 있다.

이에 대해 이재의 작가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광주학살을 통해 계획된 쿠데타 음모에 따라 정권을 강탈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경찰의 진압 실패 때문에 군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평전은 또한 당시 전두환 신군부에 합세한 군 장성들이 이미 정권이라도 잡은 것인 양 국가 위계질서를 무시한 극도의 하극상을 보여줬다고 밝히고 있다. 80년 5월 25일 고 최규하 대통령 서리가 광주를 방문했을 때 일화를 평전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대통령의 광주방문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요청해서 이뤄졌다. 도청 진압작전을 앞두고 계엄사가 최선을 다했다는 명분을 쌓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을 수행한 사람들은 계엄사령관 이희성, 내무부장관, 보사부장관, 건설부장관 등이었다…최규하 대통령이 연단에 섰는데 밑에 앉아 있던 하급 장군들이 다리를 꼬고 담배들을 피우고 있었다”

훗날 안병하 국장은 아들 안호재에게 “당시 하급 장군들의 안하 무인격인 그 모습을 보고 정권장악을 획책하는 군부의 쿠데타라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평전은 80년 5·18 당시 경찰과 광주시민이 서로를 보호해주려고 노력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안병하 국장의 아들 안호재는 “죽음을 눈앞에 둔 아버님이 광주시민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못 전하고 떠날 것 같다”며 “거듭 안타까운 심정을 자신에게 고백했다”고 말했다.

5월 21일 오후 경찰이 도청에서 철수를 시작한 당시 상황을 기록한 평전에 따르면 안병하 국장이 아들 안호재에게 마지막 유언인 양 그러한 아쉬움을 토로한 까닭을 잘 알 수 있다.

도청안에 주둔하던 경찰병력 철수는 21일 오후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된 직후부터 이뤄졌다. 계엄군의 발포상황을 지켜보던 안병하 도경국장은 오후 3시경 경찰의 퇴각 결단을 내렸다. 공수부대 저격수가 도청 옥상과 인근 수협과 농협 등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조준사격을 하면서 시위대의 금남로 진입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시민들도 총기로 무장한 채 도청을 향해 조여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나주와 화순경찰서 쪽에서 탈취한 무기를 싣고 광주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도 시시각각 들어왔다. 도청 안에는 경찰들이 1,500명 정도, 도청 주변에는 500명 가량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안 국장의 지휘로 이미 무기는 인근 군부대 등으로 이미 옯겨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칫 비무장 상태에서 격앙된 무장시민들을 맞아야 할 국면이었다.

[안병하 평전]을 집필한 이재의 작가ⓒ안병하 기념사업회
[안병하 평전]을 집필한 이재의 작가ⓒ안병하 기념사업회

평전은 당시 철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도청에서 경찰이 철수할 때 맨 먼저 나간 사람은 나주경찰서장 김모 총경이었다. 그가 부대를 이끌고 도청 담장을 넘어 가는데 시민들이 다리를 잡아당겼다. ‘시민에게 붙잡혀서 이제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던 순간 곧바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경찰복장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며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민간인 옷으로 갈아 입혀줬다. 김 총경은 무사히 제2집결지인 광주비행장에 갔을 때 혹시 탈출하던 중에 희생자가 있느냐고 물어봤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따귀 한대 맞은 사람이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평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광주경찰서 이 모 정보과장도 똑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경찰서를 경비하고 있다가 21일 오후 5시경에야 철수했다. 그때 광주경찰서 정문 앞에서 총을 든 시위대들이 포위하고 있었으나 사복으로 갈아입고 빠져나가는 경찰을 도와주었다. 한 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당시 경찰과 시민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안병화 평전>을 집필한 작가 이재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2017, 창비)를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공동 집필했다.

작가는 책 표지에 “경찰은 시민을 향해 발포할 수 없다”는 부제를 달았다.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종용을 거부하고 광주시민의 생명을 지킨 고 안병하 치안감의 ‘위민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 집필에 나서게 된 근본 동기였음을 밝히는 대목이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계엄군은 시민들을 ‘섬멸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경찰에게도 이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안병하는 대통령 앞에서 경찰은 시민들의 형제, 가족, 이웃도 있을 텐데 어떻게 무기를 사용해 시민들을 진압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밝히며 ‘안병하 정신을 기렸다.

고 안병하 치안감은 80년 5·18 당시 전남도경국장에 재임하면서 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신군부의 강경진압 지휘를 거부한 이유로 해직되고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은 후 그 후유증으로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88년 사망했다.

정부는 2017년 11월 안 국장을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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