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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왕은 적의 장군에게 무릎을 끓었다, 47일의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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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왕은 적의 장군에게 무릎을 끓었다, 47일의 남한산성
김상헌의 자결은 사료속내용과 달라,.
  • 김현태 기자
  • 승인 2017.10.06 10: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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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太祖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조선의 인조임금

영화 ‘남한산성’이 개봉 이틀 만인 추석 당일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청나라 대군을 피해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 고립된 채 보냈던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치욕의 병자호란 당시에는 청나라로 끌려갔던 환향여(還鄕女)들이 1636년 淸의 장군 용골대가 이끄는 대규모 병력이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인조는 송파구 삼전도(三田渡)에서 그토록 경멸했던 오랑캐 청나라 왕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고 항복한다. 이른바 '삼전도 굴욕'이다. 김상헌(金尙憲)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主戰派)는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의 주장이 우세를 점하였다.

청의 공격을 피해 남한산성에 머물지만 인조와 신하들의 반목과 갈등은 계속된다.

"싸우고 지기키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다" 며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과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 이라며 주화론(主和論)을 내세운 이조판서 최명길. 두 대신의 반목에서 인조는 결정을 미루기만 하며 47 일 간 머물렀다,

삼전도비는 그것이 비록 치욕 스러운 것일지라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 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淸 太 祖

삼전도 굴욕은 조선이 중국(明나라)에 당한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을 형제국으로 여겼던 북방의 새로운 패권국 淸(만주족)에게 당한 일종의 '정치-군사적 보복'이란 점이다.

이에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홍익한 등 세 사람은 척화(斥和)의 주모자로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선양에서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척화의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결국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조정에서 이들의 충절을 기려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모두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의 역사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날 최명길, 김신국 등의 주화론자들은 항복문서를 청나라측에 전달하였다.국서의 내용은,그야말로 치욕스러운 내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册印)을 내 놓 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 서문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남한산성 서문. 인조는 이곳을 통해 수항단으로 나아갔다

영화 속 김상헌과 사료속 김상헌 비교해보니

김상헌은 대의명분을 내세워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하지만,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영화 속의 김상헌은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서 칼로 복부를 찔렀다. 그러고 쓰러졌다. 영화 속 김상헌은 그랬다.

그런데 실제의 김상헌(1570~1652년)은 조금 달랐다. 우선, 자결 시도 장면이 그렇다. 인조 다음 왕인 효종시대 역사서인 <효종실록>에 김상헌의 자결 시도를 담은 글이 수록돼 있다. 음력으로 효종 3년 6월 25일자, 양력으로 1652년 7월 30일자 <효종실록>에 수록된 <김상헌 졸기>(김상헌의 일대기를 정리한 글)를 보자.  

"성(남한산성)을 나가는 쪽으로 논의가 결정되자,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지었다. 김상헌은 울면서 찢어버리고, 안에 들어가 주상께 '군주와 신하가 맹세한 뒤 죽음을 각오하고 성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죽어서 선왕을 뵙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의견이 수용되지 않자, 68세 된 김상헌은 단식에 들어갔다. 6일간 음식을 들지 않았다. 자결 시도는 그 직후에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칼을 쓰지는 않았지만, 끈을 이용해 자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도 자결을 말릴 수 없는 쓸쓸한 방에서 시도한 건 아니었다. 옆에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결은 성공할 수 없었다. <김상헌 졸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목을 매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구해서 죽지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는 <산성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병자호란을 정리한 조선 후기 문헌 <산성일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조참의 이경여와 공의 자제들이 붙들고 지켜서 자결하지 못하게 하였다."

▲김상헌 묘소 입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있다.

영화 속 김상헌과 사료 속 김상헌

영화 속의 자결 장면에 이어, 살펴볼 게 더 있다. 김상헌이 열렬한 척화파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모든 순간에 자신의 신념을 철저히 지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병자호란 후에 정권에 대한 협조를 거부한 김상헌은 계속해서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외쳤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함께 치자"며 파병을 요청하자, 이때는 파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로 인해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남긴 시조가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라먀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귀국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예감을 시조에 담았다. 그처럼 비장했다. 그런 심정으로 청나라 수도 심양(션양)에 끌려간 72세의 김상헌은 형부(법무부)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받은 날은 인조 19년 1월 8일(음력) 즉 1641년 2월 17일(양력)이다. 1641년이면, 청나라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기 전이다. 이때는 만주 땅 심양에 청나라 수도가 있었다. 그래서 북경(베이징)으로 가지 않고 심양으로 간 것이다.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가 본국에 발송한 보고서 모음인 <심양장계>에 따르면, 그날 재판에서는 파병 반대뿐 아니라 병자호란 당시의 일까지 다루어졌다. 소현세자는 이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 형부 정문 앞에서 열린 공판에서 오고간 질의·응답은 이렇다. 원문 문장을 간추렸다.

조선에선 척화론, 청 앞에선...

공판이 끝난 뒤 형부는 김상헌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청나라 제3대 황제 순치제는 따르지 않았다. 순치제는 청나라 태종의 아홉째 아들이다. 황제 즉위 후에 순치(順治)란 연호를 썼다 해서 순치제로 불린다.

인조 20년 1월 6일자 즉 1642년 2월 4일자 <인조실록>에 따르면, 순치제는 "김상헌을 조선 의주에 감금하라"고 선고했다. 그러면서 청나라 사신들이 의주에 들를 때마다 김상헌의 상태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김상헌의 신병을 조선에 넘겨준 것이다. 처벌의 강도를 낮춘 것이다.

같은 해 1월 9일자 <인조실록>에는 김상헌이 자신의 의주 도착 사실을 인조에게 보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반청 활동으로 청나라에 다시 끌려가기는 했지만, 김상헌에 대한 최초의 재판은 그렇게 결말을 맺었다. 조선 의주에서 금고형을 사는 쪽으로 종결된 것이다. 김상헌이 청나라 형부에서도 척화파의 소신을 보여주었다면, 형량과 처벌 방법은 분명히 세졌을 것이다.

당시에는 김상헌을 포함한 척화파 인사들이 매우 많았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김상헌을 척화파의 대명사로 평가하는 것은 그가 자기 신념을 철저히 지켰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김상헌은 조선에서는 철저하게 척화파로 살았지만, 청나라 사법부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모든 순간에 신념을 지킨 건 아니었던 것이다.

몽골이 중국 왕조인 남송을 침략했을 때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끝까지 충절을 지킨 문천상(1236~1282년)이란 인물이 있다. 문천상은 칭기즈칸의 손자인 황제 쿠빌라이칸의 전향 권유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조선 정부가 채택한 <김상헌 졸기>에서는 "세상의 논객들은 문천상 이후로 동방에서는 오직 김상헌 한 사람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며 김상헌을 높게 평가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에 기초해 김상헌을 평가한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김상헌의 조선 행적만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의 청나라 행적까지 종합해서 김상헌을 좀 더 면밀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색(水色)과 환향녀(還鄕女)

수색이라는 지명은 이 일대가 한강하류로서 옛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생리계, 수색계, 수암리계, 학암리계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지다. 수색리라고 불리워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55년 4월18일 행정동사무소가 설치될 때에는 타동은 지역과 인구가 마땅치 않아 합하거나 양분되기가 일쑤였지 만수색동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색동사무소 하나였다.

관내 옛지명으로는 까치고개가 있는데 앞에서 설명한 증산동 의 까치 고개와 같다.

지역적으로 한강하류에 위치한 수색동은 옛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으로 물치, 무르치라는 우리말에서 음이 변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수색, 수생리로 표기하였다.

수색로와 접하고 일산,행신 지구등 신도시의 관문에 위치하고 인접지역은 동북에 증산동이 위치해 있고 남쪽에는 상암동과 성산동 중동이 차례로 이어져 있다.

서쪽은 종래 경기도 고양시와 시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지난 75년 개편으로 교외선 철로를 따라 구분되었기 때문에 철로서쪽은 고양시와 시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신사동이 접하여 있다.

여기서 교외로 나가는 경의선, 교외선 철도 정차역인 수색역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색은 상세지역으로 확정되어 앞으로 신촌이나 영등포같은 부도심으로 육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특성있는 생활권으로 바뀌게 되며 이웃 상암지구 개발과 함께 21세기를 준비하는 지역개발, 문화생활을 즐기고
• 남을 생각하는 마을로 가장 잠재력있는 신흥지역이다.
•수색동 관내 옛 지명을 알아보면 까치고개가 있다.

송파구 석전동의 삼전도비(大淸皇帝功德碑)

협약에 따라 청군은 1월 28일부터 포격을 중지하고 소수의 복병만을 산성 주변에 잔류시킨 다음 주력군들을 외곽으로 철수시켰다.
화의의 방침이 정해진 뒤에도 김상헌, 정온, 윤집, 오달제 등 척화파들은 국왕의 출성(出城)을 반대했지만,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 5시~7시) 무렵 세자 및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서문을 빠져나와 청태종의 지휘 본부가  있던 삼전도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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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주철 2017-10-11 21:57:21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새로운 역사적인 사실을 깨닫게 해준 영화로 출연자들의 명품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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