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비스 신드롬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방관자(傍觀者)를 말합니다. 즉, 어떤 일에 자신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 곁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제노비스 신드롬 이란 구경꾼 효과, 대중적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홀로 있을 때보다 주위에 사람이 많이 있을 때, 책임감이 분산돼 개인이 느끼는 책임감이 적어집니다. 1964년 뉴욕의 한 아파트 앞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한 젊은 여인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수차례나 강도의 칼에 찔린 그녀는 30여분 동안을 누구든 도와달라고 애타게 소리쳤지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시각 38명'이나 되는 이웃들이 창문 너머로 그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경찰에 신고조차 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나 아니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와주겠지,’ ‘괜히 나섰다 피해를 입을 수 있어’ 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엄청나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노비스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옆에서 누가 죽어가도 방관하는 차가운 사회(the cold society)의 상징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은 ‘도요타 상사 살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실제 도요타상사 회장을 척살(刺殺)한 사건이었지요. 노인들을 대상으로 7,500억 원을 횡령해 피해자가 만 명이 넘은 일본 사상 최악의 사기 사건으로 불리는 ‘도요타상사 사건’의 주모자인 ‘도요타 상사 회장 나가노 가즈오’가 1985년 6월 18일 연행되는 장면을 방송국을 통해 전국으로 생방송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당시 회장의 거주지 앞에 약 30여 명의 기자들이 연행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모여 있었지요. 이때, 갑자기 두 명의 사나이가 “도요타 상사 회장을 죽이러 왔습니다.” 라고 외치며 아파트의 유리창을 깨고 회장의 집 안으로 침입, 살해를 한 후 걸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기자들을 포함하여 30여 명의 목격자들은 범행을 지켜보기만 하였습니다. 당시 회장을 살해한 두 명은 8년 징역을 부여받았지요. 이 사건 역시 방관자 효과의 사례 중 하나로 언급 되고 있습니다. 방관자는 이렇게 정의가 사라진 메마르고, 각박한 사회를 나타내는 못된 신드롬이 아닐까요?

물론 우리가 세상의 모든 어려운 사람을 다 도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걸어가는 ‘인생길’에 어려운 사람을 만난다면, 외면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본적인 도리일 것입니다.

《논어(論語 》 <위령공편(衛靈公編)>에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공(子貢)이 물었습니다. “한마디 말로 평생 동안 실천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 남에게 행복은 주지 못할망정 불행은 안겨 주지 말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불가(佛家)에서는 단순히 남을 배려하는 ‘서(恕)’의 차원을 넘어 그의 행복까지 기원하라고 가르지요. 그것이 바로 자애심(慈愛心)입니다. 자애심에 대해 명상수행 가 ‘파멜라 블룸’은 『자비의 힘』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른 이들이 행복을 경험하고 행복의 근원을 찾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자애심이다.”

모든 존재는 행복을 갈구하지만 그것을 이루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능한 한 많은 행복을 얻고 행복의 근원을 찾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자애심인 것입니다. 심지어 『숫타니파타』에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 하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바로 이것이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모습이 아닌가요?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는 저 태양보다 다습고 밝은 힘이 있나니, 그러므로 이 자비가 미치는 곳에는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이 녹아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하며, 잔인한 마음이 녹아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변하며, 인색하고 탐내는 마음이 녹아서 혜시(惠施)하는 마음으로 변하며. 사상(四相)의 차별심이 녹아서 원만한 마음으로 변하여 그 위력과 광명이 무엇으로 가히 비유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우리중생들은 그러한 부처님의 대자대비 속에 살면서도 그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메마르고 각박한 이 세상에 <맑고 밝고 훈훈한 부처님의 자비훈풍>을 불리기 위해 태어난 것이 우리 ‘덕화만발’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코로나 19 팬데믹이 지금 절정을 향하여 치닫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선판국이 20일 앞으로 다가 와 여야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 영향 탓인지 가뜩이나 메마른 세상이 이제 더욱 차갑게 얼어붙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럴 수록에 덕화만발 가족만이라도 차가운 방관자에서 벗어나, 더욱 ‘맑고 밝고 훈훈하게’ 적극적으로 이 사회에 뛰어들어야 하지 않을 까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2월 2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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