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은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 가는 과정”, 퍼포먼스식 그림그리기... ’몸을 불러온 그림‘

이건용 작가 /갤러리 현대
메를로-퐁티의 몸철학에 충실한 이건용 작가 /갤러리 현대

[서울 =뉴스프리존]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화가는 모름지기 자기 앞에 현전해 있는 평면에 무언가를 그리지만, 저는 화면을 제 앞에다 놓고 제 신체가 허용하는 것만큼만, 화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선을 그리는 겁니다. 그것은 제가 평면을 보고 그 위에 무언가를 의식이 지시하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제 팔이 움직여서 그어진 선을 통해서, 내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몸을 소환한 그림그리기로 이름을 알린 이건용 작가가 20일부터 7월 3일까지 이탈리아 베니스 팔라초 카보토(Palazzo Caboto)에서 전시를 갖는다. 갤러리 현대가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마련한 전시프로젝트다. 팔라초 카보토는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탐험가 지오바니 카보토(Giovanni Caboto)가 아들 세바스티아노 카보토(Sebastiano Caboto)와 함께 1480년대 후반까지 거주했던 생가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최근 주력하는 회화 연작 ‘바디스케이프(Bodyscape)’를 보여준다. 1976년 처음 발표한 이래 무수한 회화적 실험으로 변신해온 ‘Bodyscape’의 가장 현재의 모습에 집중한 전시다. 제작 과정 영상, 그동안 작가가 펼친 퍼포먼스 아카이브 영상도 함께 공개될 예정이다.

‘Bodyscape’ 연작은 신체, 장소, 관계에 대한 이건용만의 독창적 미학과 사유의 정수가 담겼다. 작가가 신체를 제한한 상황에서 간단한 선긋기 동작을 수행하며, 화면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회화의 가장 기초적인 언어인 선긋기를 신체의 지각과 존재의 확인이라는 철학적 사유로 확장한 작업이다.

서양철학사에서 오래된 변방이었던 몸을 화두로 철학의 역사를 새로 쓴 스피노자, 니체, 그리고 메를로-퐁티를 연상시킨다.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정신과 의식을 일종의 종교처럼 믿어온 철학의 역사 자체를 비판했다. 몸과 외부의 자극에 대해 지각하는 신체, 인간이 외부와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관계 자체에 집중한 것이다. 몸을 사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과의 대화이자, 세계와의 소통이다. 몸을 몸답게 앎으로써, 나를 나답게 이해하는 몸철학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상호 작용’의 현상임을 강조한다. “나의 화면 속의 선은 밖에서 들어간 것이지 내부에서 이루어진 것이거나 구성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평면상에 선을 긋거나 임의의 흔적을 만드는 행위는 사용된 매체인 연필·물감, 기타 신체 행위가 어떤 상태로 화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어지거나 섞이거나 흘러내리거나 함으로써, 화면과 이것들의 상호간에 작용한 만큼 드러나는 현상으로서 발견될 것이다.”

그는 1976년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S.T 그룹전에서 아홉 가지의 ‘Bodyscape‘ 연작 중에서 일곱 가지를 ‘그리기의 방법(The Method of Drawing)’이라는 타이틀로 발표했다. 이후 작가는 나무판과 펜, 연필 등 단순한 재료를 택해 몸의 움직임과 그 흔적을 화면에 명료하게 기록했다. 회화적 표현보다는 ‘선 드로잉’에 가까운 엄격하고 절제된 시각화에 중점을 두고, 스스로 측정기가 된 듯 제한된 신체의 조건을 부여했다. 키, 양팔과 다리의 길이 등에 따라 신체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고, 손이 닿는 만큼,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만큼 이동하며 마치 수행하듯 천천히 선을 화면에 남기며, 스스로 표현의 자유를 엄격하게 통제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 나아가는 과정”이라 설명한다.

1980년대 들어 작가는 다양한 색상의 아크릴 물감과 붓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회화적 표현을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1990년대 ‘Bodyscape’ 연작은 삶과 문화, 역사에 대한 작가적 인식과 해석을 주제로 삼은 ‘인간항’ 연작과 긴밀하게 결합한다. 한 화면에 ‘Bodyscape’의 방법론과 민족 문화사적 기호들이 중첩되면서 총체적인 회화로 진화한다.

2000년대 ‘Bodyscape’ 연작의 화면은 사회적 이슈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지하철의 여성,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장소 등의 사진을 캔버스에 프린트하고, 그 위에 ‘Bodyscape’의 방법론을 펼쳐 예술가의 신체-장소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소통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문제의식을 심화한다. 2010년대 들어 ‘Bodyscape’ 연작에서 작가는 신체를 제약하는 방식과 화면의 크기를 변주, 변형된 형태의 ‘Bodyscape’ 시리즈를 완성한다.

이건용 작가는 화면을 눈으로 마주하고 머리의 생각(개념과 아이디어)을 손으로 옮겨 그리는 전통적인 회화 방법론을 과감하게 폐기한다. 미술가로서 ‘그리는’ 행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성찰한다. 그에게서 ‘그린다’는 행위는 ‘신체의 표현’을 재설정하는 작업이었다. 신체가 지각자요 표현자가 되는 것이다.

작업방식이 퍼포먼스를 보는 듯하다. 화면의 뒤에서, 화면을 등지고, 화면을 옆에 놓고 선을 긋기도 하고, 때론 손목과 팔꿈치를 부목으로 고정하고 이를 하나둘 풀면서 그리기도 한다. 다리 사이에 화면을 놓거나, 화면을 코 앞에 둔 채 양팔을 활짝 벌리고 붓질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깨를 축으로 삼고 반원의 선을 긋거나 온몸을 축으로 거대한 반원을 만들거나, 두 팔과 다리를 위아래로 점프하듯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날개 형상의 선을 만들기도 한다.

이건용 작가는 194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만 여 권의 장서를 읽으며 문학, 종교, 철학, 인문학에 일찍이 관심을 가졌다. 배재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듣게 된 논리학 수업을 통해 현대철학을 접했다. 이를 통해 홍익대 재학중 실존주의, 현상학, 언어분석철학에 눈떴고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 많은 부분을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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