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도석사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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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도석사가의
  • 김덕권
  • 승인 2022.08.1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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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논어(論語)》<이인편(里仁編)>에서 공자(孔子)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럼 도가 무엇인데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까요? 도(道)란 곧 길로서 무엇이든 떳떳이 행하는 것을 이릅니다. 하늘에는 하늘이 행하는 도가 있고, 땅에는 땅이 행하는 도가 있듯이, 사람이라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 도가 있는 것입니다.

태어난 모든 생명은 언젠 가는 죽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지요. 또한 가을이 되면 잎이 떨어져야 이듬해 봄에 새싹이 돋아날 수 있듯이, 죽음은 새로운 삶을 위한 필수 과정이기도 한 것이지요. 즉 삶과 죽음은 구분할 수 없는, 맞물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이 세상에 많이 밝혀져 있으나, 이 모두를 요약하면 결국 삶과 죽음의 길을 벗어남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 정신의 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바른 길을 모르고는 인생을 잘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죽음은 가장 큰 변화로서 그 바른 길을 모르고서 죽음의 길을 떠나면 악도(惡道)에 떨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20년 간의 구도(求道) 과정에서 도달한 대각의 심경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전에 《일원상(○)》으로 상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원(一圓)이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원(本原)이고,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本性) 자리로서 생멸(生滅) 없는 도와 인과응보의 이치가 서로 바탕을 두어 한 기틀[相]을 지었다’라고 표현하셨지요.

저는 청년 시절엔 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길인지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 얼마나 인생이 고달프게 살았는지 말로는 다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제가 전생부터 불연(佛緣)이 있었든지 천만다행으로 《일원대도(一圓大道)》를 만나 40년을 도를 들었으니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지요.

그럼 왜 공자께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죽어도 좋다고 하였을까요? 도대체 ‘도’가 무엇이길래 죽어도 좋다고 하셨을까요?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도’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는 다릅니다. ‘도가’에서의 도는 불변하는 참된 진리,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를 의미합니다.

‘유가’에서의 도는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 규범, 가치 기준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저는 ‘도’를 일반화해서 《진리(眞理)》’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도를 들으면 죽어도 좋다’는 것은 진리를 깨우치고 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럼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일까요? 만물이 생기고 사라지는 사물의 이치요, 왔다가 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자연의 섭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유학자인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 1489~1546)’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가 지금 심경이 어떠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깨달은 지 이미 오래이니, 지금 내 마음이 편안하구나!”

장자(莊子)는 죽음을 앞두고도 초연했습니다. 그는 성대한 장례식을 계획한 제자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棺)도 만들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고, 내 시신을 산에다 버리라.” “땅 위에 놓아두면 까마귀와 솔개가 먹을 것이고, 땅 아래에 묻으면 개미들이 먹을 것이다. 이쪽 놈이 먹는다고 그것을 빼앗아 딴 놈들에게 주는 셈이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 장식으로 삼고, 별자리를 진주와 옥 장식으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삼으려 하니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려 하느냐?” 인도의 성자라 ‘라마나 마하라 쉬’는 죽음 앞에서 “아! 기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도를 깨친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超然)하거나 담담(淡淡)하게 맞이합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원리와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편안하지요.

어떻습니까? 결국 도란 ‘생과 사의 이치’에 벗어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진리를 깨치고 가면 좋겠습니다.

첫째, 생멸법(生滅法)입니다.

‘우주 만물은 인연 따라 나타났다(生)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滅). 하지만 이러한 생멸(生滅)이 그냥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어져 또 다른 생멸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연기(緣起)요, 무상(無常)이고, 공(空)이지요.

둘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낮과 밤이 나타나고 사라지듯, 우주 적 관점에서 보면 생(生)과 멸(滅)은 본디 없습니다. 생 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으니 이것이 도(道)요, 생이 있는 그 자리에 바로 사라짐이 존재하며, 멸이 있는 그 자리가 ’불생불멸의 세계‘입니다.

셋째,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입니다.

인과응보란 인과(因果)의 법칙, 곧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 말과 행동들은 인(因)이며, 이것들이 나중에 어떤 연(緣:조건)을 만나 그에 상응하는 과(果)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제 ’조문도석사가의’라는 말씀대로 도가 무엇인지 깨치셨는지요? 그럼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요? 저는 이미 죽으면 선산에 유골을 뿌리라고 유언을 해 두었습니다. 우리 지금이라도 도가 무엇인지 알고 가면 좋겠네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8월 12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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