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영배(械盈杯)를 아십니까?

조선 중엽 평안도 의주 땅에 임상옥이라는 장사꾼이 살았는데 인삼을 비롯한 무역상으로 조선의 손꼽히는 갑부가 된 인물로서 꽤 오래 되기는 했지만 거상 임상옥이라는 TV드라마로 소개되어 인기리에 방영된 적도 있습니다. 그는 1779녀에 출생, 십대 후반부터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불혹의 나이에 최초로 우리나라 인삼 무역권을 독점했습니다. 당시 이조판서에 재임하던 박종경(朴宗慶)의 정치적 후원이 큰 작용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임상옥은 천재적인 장사꾼 수완으로 국내에 상당히 알려진 그는 1821년 조정에서 특별히 파견하게 된 변무사(辨誣使), 즉 외교사절단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사절단 가운데 통역을 맡은 중인(中人)들은 인삼 같은 고가품을 현지인에게 팔아 막대한 이득을 챙기던 시대였습니다. 장사 수완이 뛰어난 임상옥 또한 사절단에 들어간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라 엄청난 양의 인삼을 가져갔습니다.

어떤 나라 제품보다 약효가 뛰어난 국내산 인삼은 고려 때부터 중국인에게 최고 인기상품으로 고가에 거래되었답니다. 임상옥이 중국에 갔을 때 중국 상인들은 고려인삼 값을 내리려 불매운동을 벌이며 농간을 부렸는데 교묘한 방법으로 와해시키고 평소 값보다 수 십 배에 해당하는 고가로 전량을 팔아 수백 배 이득을 남겼답니다. 귀국 후 그의 기지를 높이 평가한 조정은 종2품에 해당하는 전라감영 중군으로 임명했으나 정중히 거절했답니다.

그는 나이 50이 넘자 돈 버는 일에 물러나 자선사업가로 변신했습니다. 수재민 등 기민구제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한 때 곽산 군수를 거쳐 1835년 사신(使臣)을 보좌하는 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물러나 빈민구제에 힘쓰는 한편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답니다. 평생 지은 시를 간추려 묶어낸 적중일기(寂中日記)와 그의 저서 가포집(稼圃集)이 전해오고 위 내용은 조선 제 24대왕 헌종 실록, 1835년 6월 26일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하를 다 사고도 남을 만큼 큰 부자였던 임상옥도 흐르는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어 어느덧 환갑을 맞게 되었습니다. 평안감사를 비롯해 수많은 귀빈을 초청하고 큰잔치를 준비하며 자신의 생일잔치에 쓰기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달빛처럼 희고 고운 백옥 술잔을 이름난 도공에게 특별히 주문해왔습니다. 잔치가 시작되고 주인공인 임상옥에게 자식들이 조선팔도에서 최고의 명주(名酒)로 소문난 감홍로(甘紅露)를 한잔 가득 따라 올렸습니다.

술잔에 술이 가득 채워지려는 순간 웬일인지 술잔의 술이 사라지고 또 따르면 없어지자 할 수 없이 술잔을 바꿔서 잔치를 마쳤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임상옥이 그 술잔을 가져오게  한 다음 물을 부어보니 신기하게도 술잔에 물이 가득 차려고 하는 순간 바닥으로 새어나가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사스러운 물건이라 생각하고 술잔을 깨버렸는데 깨진 조각에 작은 글씨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계영소원흥동사(戒盈所願興同死 乙卯 四月 八日 分院 禹明玉) 풀이하자면 “가득 채워 마시기를 경계하라 너와 함께 죽는다, 을묘년 사월 팔일 분원 우명옥” 대략 이런 뜻으로 해석 됩니다. 4월 8일은 바로 임상옥의 환갑날이었으니 괴이하게 여기고 특별히 주문한 술잔을 만든 도공을 수소문해 알아보니 당대에 이름을 떨치던 우명옥이라는 도공이 제작했으나 그는 4월 8일 밤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는 것입니다,

강원도 홍천지방에서 제법 뛰어난 솜씨로 질그릇을 만든다고 소문이 난 우삼돌이라는 자가 도자기 굽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경기도 광주 땅을 찾아갔습니다, 천부적인 재주를 타고난 삼돌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최고의 도예기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만든 도자기는 몇 개월 전부터 예약을 해야 겨우 구입할 수 있었으며 그가 만든 그릇들이 궁궐에 진상하게 되자 그의 스승은 삼돌이를 명옥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해주었습니다.

우명옥의 뛰어난 기술과 명예를 시기하는 주변 무리들은 온갖 수단으로 술과 여자에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끝내 주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우명옥은 폐인이 되어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그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지난날 어리석음을 뼛속 깊이 후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심혈을 기우려 무엇인가를 제작했는데 바로 임상옥이 사용했던 계영배(械盈杯)라는 술잔이랍니다.

술잔 중앙에 탑처럼 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예쁜 꽃송이를 앉혔으며 기둥 속에 또 작은 관을 꽃송이 바로 밑까지 연결한 다음 술잔바닥으로 통하게 만들었습니다, 술잔에 술이 가득차면 마치 꽃송이가 물위에 두둥실 떠있는 것처럼 보여 환상적입니다. 그러나 잔속에 채워지는 술이 밖으로 연결된 관 높이보다 더 높아지게 되면 사이핀(sipnon)원리에 의해 술이 바닥으로 흘러 나갈 수 있도록 만든 술잔이랍니다.

내일 모레가 민족의 대 명절 설날입니다. 명절 때마다 술 때문에 일어난 큰 사고가 메스컴을 통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들뜬 분위기에 자칫 과음하기 쉬운 명절, 금년 설에는 건전한 음주문화로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친지 모두가 행복한 웃음꽃이 만발하기를 기원하며 밝아오는 무술년에는 꼭 소원 성취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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