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일의 시사직격] 구태의연한 이산가족 상봉제안, 진전을 원하면 그만한 '카드'도 꺼내야

북쪽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망향의 설움을 달래왔던 추석이 또 이렇게 지나갔다. 고향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역사가 돼버린지도 오래다. 전쟁의 총소리와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태어난 세대도 어느덧 노년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이제 망향자(望鄕者)들의 고향은 그들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으로 분단 70여 년을 맞았다. 목 놓아 부르짖어도 고향은 대답이 없다. 해마다 추석이면 갈 수 없는 고향 대신 망향제를 찾는다. 망향제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실향민 노인들의 모습에는 세월을 이겨낸 그리움과 슬픔이 묻어있다. 

같은 이유로 망향제를 찾는 이산가족들이 있다. 북향민(北鄕民)들이다. 법적 용어로는 북한이탈주민,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다. 실향민(失鄕民)들과는 다른 시대에 다른 이유로 고향을 잃었지만 모두 실향민들이다. 망향제 앞에 선 실향민과 북향민, 이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다. 증오와 그리움에 번민하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줄 이는 국가뿐이다. 하지만 올해도 고향에 남은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추석을 지나보냈다.

추석연휴 전인 지난 8일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북한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당국자회담을 제안했다. 하지만 추석이 지난 오늘까지도 북한은 답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관련 답은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으로선 답을 보낼 하등의 이유를 못 찾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통일부 이산가족등록현황에 따르면 이산가족 신청자는 올 8월 현재 13만 3654명이다. 이 중에 생존자는 4만 3746명(33%)이며, 80세 이상 고령자는 2만 9035명으로 66.4%다. 이산가족 상봉이 우리로선 시급할 수밖에 없다. 남북대화나 교류 등 관련 사업에 이산가족 문제가 우선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북한이다. 

광복절 경축사를 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출처=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이 구체화 되려면 그만한 카드도 내놓아야 한다. (출처=연합뉴스)

고령의 나이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 세태를 감안하면 우리는 급한 게 사실이다. 정치문제와 무관하게 망향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는 당면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도 우리의 입장일 뿐이다. 북한 입장에선 이산가족 상봉은 전혀 시급한 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은 계층사회다. 계층을 타파하는 것이 그들이 도입한 맑스주의의 사상적 토대였지만 결국 김일성 가문은 독재체제 유지를 위해 계층화를 선택했다. 생존을 위한 저들만의 봉건제인 것이다. 북한정권은 주민들을 핵심군중(핵심계층), 기본군중(동요계층), 복잡군중(적대계층)으로 분류하고 계층이동 사다리를 철저한 출신 성분으로 견고하게 만들어 놨다. 여기서 이산가족들이 적대계층에 속한다. 그러니 북한의 입장에서 이산가족 상봉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사업인 셈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래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남북갈등 상황에서 권영세 통일부 장관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당국회담에 답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아마 권영세 장관도 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제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안은 잘 한 일이다. 북한의 대응과 무관하게 우리는 꾸준히 교류를 제안해야 한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정책적 판단들이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 당국회담 제안은 사실 의례적인 메시지에 불과했다. 북한의 반응과 무관하게 추석이니 해야 하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북한이 응답할 것이라고 여겼다면 정무적 판단에 꽤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경일 작가

그렇다면 이산가족 상봉 제안에 응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선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북한이 대화의 장에 나올 수 있도록 계산해볼 수밖에 없다. 남북 간에 대화는 주고받는 게 없이 이뤄지는 게 하나도 없다. 북한이 자신들에게 득이 되는 게 없는 이산가족 상봉에 선뜻 나설 리는 만무하다. 북한의 입장에선 이산가족 상봉은 충분히 득이 되는 게 있을 때에야 내놓을 수 있는 카드다. 지금처럼 남과 북이 대결적 구도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는 한국정부의 이산가족 상봉 제안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이 담대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담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책 보따리에서 의례적으로 꺼내는 추석용 이산가족 제안이 북한에 전달이 안 되는 건 당연한 결과다. 아쉽게도 우리가 이산가족 상봉을 얻어내려면 더 큰 카드를 꺼내야만 한다. 진짜 담대한 카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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