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누나

며칠 전 제 104 주년 3.1절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3.1절 하면 누구보다도 생각나는 분이 유관순 누나입니다. 그 유관순 누나의 장렬한 순국(殉國)이 우리의 가슴을 저미기 때문이지요.

유관순(1902~1920):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1902~1920)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1902~1920)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여기 그 유관순 열사의 ‘면언(名言)’이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일본의 재판 받을 당시 했던 말씀이지요.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 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처벌할 권리도 없다.』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그런데 제 104주년 3·1절인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 대사관 인근에서 제 1,585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가 열린 그때, 인접 장소에서 보수단체가 일장기를 흔들며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고 하네요.

그런가 하면, 세종시 한 아파트에 걸린 일장기가 전 국민의 공분(公憤)을 사는 가운데 내건 당사자는,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경축사 내용을 ‘옹호하기 위해 일장기를 내걸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3.1절 일장기가 내건 후 하루가 지났지만, 지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세종 시민의 공분은 더 커지며, 항의로 각 동 단지에 플래카드 태극기로 동참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글쓴이는 “장난이라고 보기엔 섬뜩하며, 아파트 이웃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 놀랐다.”

“세종시는 전국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은 곳으로 부끄럽다. 각 단지 대표들이 적극 동참, 한 달 동안 국기 게양을 하자는 의견이 있다. 참여 부탁한다.” 라고 제안했습니다.

답글을 단 글쓴이는 “교훈 얻어, 이제 꼬박꼬박 태극기 잘 걸려 한다. 이번엔 본보기로 한 달 간 걸려고 한다. 다 같이 해주십시오” 라고 옹호했습니다. 또 태극기 한 달 계양 의견에 대부분 “너무 좋은 의견이다.” 라는 글 일색이었고 다른 글쓴이는 “늦었지만, 태극기 사러 간다. 한 달 간 걸겠다.”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장기를 내건 이들의 일본인 주장에 대해, 해당 아파트 관리 사무소는 입주자 카드에 “일본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라고 밝혔지요. 그런데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3.1절 기념 사에서, 이례적으로 과거사 문제 언급 배제와 일본과의 파트너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또한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일본에 침략 당했다는 표현도 나왔으며, 일본 정부는 이를 즉각 환영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직도 이렇게 친일파가 준동(蠢動) 하다니 요? 피가 끓어오지 않으신가요!

유관순 누나는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 시 병 천 면에서, 유중권, 이소제 부부의 둘째 딸로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1916년, 이화 학당 보통과 고등 과정에 입학. 1919년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아버지 유중권 선열(先烈)은 일제 헌 병의 총 검에 찔려 숨지고, 유관순 누나는 왜 경(倭警)에 체포 당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됩니다.

징역 3년 형을 받았으나 법정 모독 죄가 추가되어 7년 형으로 늘어나고, 교도소 안에서도 시위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에 신음 합니다. 그 후, 일제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결국 옥사(獄死)합니다.

유관순 누나의 옥사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지만, 일제는 고문 사실이 드러날까 봐 인도를 거부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플레이(Lulu E, Frey)’ 교장은 국제 여론에 호소하며, 시신 인도를 요구한 끝에 그 시신을 넘겨받았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시신은 아주 끔찍하였습니다. 손톱과 발톱이 모두 다 뽑혀 있었고. 코와 귀가 잘려 나갔으며, 머리카락이 가죽 째 뽑혀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두 팔과 두 다리와 머리와 몸통이 따로따로 잘려 여섯 토막(六屍)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10월 12일 시신을 넘겨 받고, 이틀 뒤 서울 정동 교회에서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이태원 공동 묘지에 안장 했습니다. 하지만 무덤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무덤조차 유실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시 계획에 의한 일제의 공사로 이태원 공동 묘지의 유골을 미아 리로 이장 하면서 유골이 없어지게 되는데, 이후 유관순 누나의 유골은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 나라를 찾기 위해 맨몸으로 일제에 항거 하셨던 순국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애국 열사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3.1절 하루 만이라도 경건한 자세로 보내면 어떨까요?

3.1 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았던 선열들의 헌신을 추모하며, 우리 3.1절엔 유관순 누나를 더욱 그리워하는 날이 되면 참으로 좋겠네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3월 7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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