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역사의 새벽, 인류는 ‘생각’의 첫머리에서 이 문제와 맞닥뜨렸을 것입니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개의 학자는 죽음이란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 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삶이란 무엇인 가를 규명하지 않고는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있을 수 없다.” 라고도 하고, “죽음의 세계란 인간의 경험 영역, 지각(知覺)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본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 다.”고도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해석에 특히 자기 식의 독단을 많이 개입 시킵니다. 각자 자신의 안경을 통해 죽음을 보는 것이지요. 죽음에 대한 통일된 답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인생에서 중대 문제이고,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며, 또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말을 맞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형태도 가지각색입니다. 천 수를 누리고 기력이 쇠진 하여 저절로 여러 기능이 멈추는 자연 사가 있는가 하면, 아직 창 창 한 나이에 뜻하지 않은 원인이 생겨 죽음을 맞는 우연 사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오래 사는 것[壽]을 가장 큰 행복으로 삼았고,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고종명(考終命)이라 하여 오 복의 하나로 꼽았지요. 하지만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 규정한 철학자도 있고, “산다는 것은, 무덤을 향하여 한발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소설가도 있습니다.

몽테뉴(Montaigne, M.)는 그의 『수상록(隨想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곳곳에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자유를 예측하는 일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 종을 잊고, 죽음의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해방시킨다.」

어쨌든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되고 단 한 번 혼자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끝 막음이지요. 누구도 피하지 못하고 거부하지 못하며, 전신으로 맞아 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대종경(大宗經)》 <천도품’(薦度品)>에서 죽음에 대한 법문을 내려 주셨지요. 「범상한 사람들은 현세에 사는 것만 큰일로 알지 마는, 지각이 열린 사람들은 죽는 일도 크게 아나니, 그는 다름이 아니라 잘 죽는 사람이라 야 잘 나서 잘 살 수 있으며, 잘 나서 잘 사는 사람이라 야 잘 죽을 수 있다는 내역(內譯)과,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조만(早晩)이 따로 없지마는,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 죽어 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여야 죽어 갈 때 바쁜 걸음을 치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나이 40이 넘어 생사를 연마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착 심 두는 곳 없이 걸림 없는 마음을 늘 길들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생사가 거래(去來)인 줄 알아서, 생사 초월하는 마음을 길들여야 합니다.

셋째, 마음에 정력(定力)을 쌓아서, 자 재(自在) 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넷째, 평소에 큰 원력(願力)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핵폭탄 발명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찬가지로 ‘도학 문명’도 생사를 해결하는 데까지 이르렀지요. 이제 우리도 매일매일 생사를 연마하는 시간을 정하고, 끊임없는 적공(積功)을 들여야 생사 대해(生死大海)를 무난히 건널 수 있지 않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세월입니다. 우리는 세월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우리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모래 시계’이지요.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세월입니다. 세월은 오늘도 우리를 데리고 어디인지 로 떠납니다. 어느 누가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다시 한번 음미하게 해줄 수 있을까요?

아직 역사상 세월의 물결을 타고 떠난 자가 돌아온 적이 없습니다. 수많은 왕후 장상(王侯將相)도, 히틀러도 나폴레옹도 레닌도 모택동도 그리고 여타 독재자들도 이제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돌고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권력이나 재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생사가 대사(生死大事)인지도 모른 채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지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5월 5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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