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業報)란 무엇일까요?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삼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삼생의 인연》이라고 해서 《전생》과 《현생》과 《후생》이 톱니바퀴처럼 업보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업보(業報)란 행위[業, karma]의 결과(報, VIPāka)로서 받는 것을 불가(佛家) 용어로 과보(果報)라고도 하지요.

그럼 인과응보에 관한 예화(例話)를 들어 볼까요?

옛날 양무제(梁武帝 : 464~ 549)는 불교를 황실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숭불 정책을 펼쳐 황제보살(皇帝菩薩)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 양무제가 국사(國師) 지공(志公) 스님에게 자신의 전생을 알고 싶다고 했으나 스님은 말하기를 꺼립니다.

그러자 양무제는 다시 간절히 청하면서 “제자는 과거의 인연을 매우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공 스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대왕은 전생에 나무꾼이었습니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벨 때 오래된 절이 있어 보니, 낡고 허물어져 산문(절)이 몰락한 것 이였습니다. 지붕도 다 허물어져 절 안에 오래된 불상이 비바람에 젖어 있었으며 공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나무꾼은 착한 마음이 발하여 자기의 대나무 삿갓을 벗어 불상의 머리에 덮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나 이제나 가난한 사람이 보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나무꾼이 자신의 삿갓을 부처님께 공양한 것은, 어렵고도 고귀한 행위입니다. 그 덕분에 인간이 되고, 왕의 몸을 얻게 된 것입니다. 대왕께서 전생에 이렇듯 착한 일을 지었기 때문에 금 생에 이러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업(業, 원인)과 보(報, 결과)로 된 단어 ​‘업보(業報)’는 2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원인에 관한 결과’란 뜻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무던히도 애를 먹이는 존재(사람)’란 뜻입니다.

​사람도 임자가 있습니다. 자기를 꼼짝 달 싹 하지 못하게, 하는 임자가 있지요. 그리고 무던 하게 애를 먹이게 하는 임자도 있습니다. 이 업보는 자식일 수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일 수도 있으며,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나에게 사기(詐欺) 친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업보가 있으면 나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사람이 죽는 것은, 배고파 죽는 것이 아니라 업보 때문에, 죽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업보가 없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업보 없애는 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해탈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요? 여러 방법이 있는데, ‘밝아지는 것’ 즉 지혜를 얻어 슬기로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업보라고 말하는, 나에게 임자로 다가온 그 사람은 ‘내가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혜로워 그런 원인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런 업보는 만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혜에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유위(有爲)의 지혜’와 ‘무위(無爲)의 지혜’이지요. ‘유위의 지혜’는 우리가 그동안 배우고 익혀 잘 알고 있는 슬기가 ‘유위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없으면 세상을 온전하게 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위의 지혜’만 가지고는 죽음 이라 든가 열반(涅槃)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지혜가 ‘무위의 지혜’입니다. ‘무위의 지혜’를 불교에서는 반야(般若)라고 부르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참나, 곧 부처님, 하느님, 주인공 등으로 불리는 그것이지요.

마음에 탐욕 심을 제거한 이를 보살(菩薩)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업보의 줄에 끌려 이끌리어 보시 하지도 아니하고, 타성에 젖어 보시(布施)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아 상(我相)이 없는 보살의 보시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하는데, 중생 중, 이런 성인(聖人)의 삶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보 시 하되 업보(業報)에 이끌리어, 하는 보 시와 타 성에 젖어서 하는, 보시는 예정된 운명을 바꿀 수 없습니다. 즉 악 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지요. 외부 자극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助)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친 사람의 보시란 외부의 자극이나 업보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오로지 부처님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즉 순수하게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보 시를 합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계산하지 않는 마음으로 오로지 부처님 기쁘게 해드리는 보 시가 무주상보시 입니다. 이런 보시는 예정된 운명에서 벗어나고, 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위력 있는 보시이지요. 결국 이 지혜(般若)가 아니면 영생(永生), 열반(涅槃)도 해결할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업보 해탈이 돼야 삶이 편안하고, 지혜가 있어야 세상을 잘살게 되며, 반야를 얻어야 영생(永生)을 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업을 잘 지어야 해탈도 얻고,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정신, 육신, 물질로 무상공덕(無相功德)을 쌓아 영생을 잘살아 보면 어떨까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8월 25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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