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명칭부터 불교문화와 밀접한 관련 맺어…불상과 유적 등 산재

조선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이백리를 가다보면 가야산이 있는데 이 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이 바로 내포다"라고 썼다. 이중환이 가리킨 열 고을은 현재의 충남 예산, 덕산, 홍성, 결성, 서산, 해미, 태안, 당진, 면천, 신창(아산) 등이다. 모두 가야산의 사방(四方)에 위치한 고을이고, 충남도청소재지가 예산·홍성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내포신도시'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이유다. 올해 충남도는 내포신도시 개청 10주년이 된다. 지난 10년 동안 충남도는 15개 시·군을 아우르는 행정중심 신도시를 조성하고, 내포문화권의 정체성 확립에 구슬땀을 흘렸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내포의 주산(主山)인 가야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관심은 미흡했다. 2023년 내포 충남도청 개청 10주년을 맞아 '내포의 주산(主山), 가야산의 문화관광 발전 및 기능 확장을 위한 제언' 기획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충남=뉴스프리존] 박성민기자=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갯가에서 바라보이는 가장 높은 산을 ‘개산’이라고 불렀다. 과거엔 해안선을 따라 높은 산과 같은 지표를 확인해 가며 항로를 잡는 연근해 항해가 주를 이뤘기 때문에 당시 개산은 중요한 지표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내포의 주산인 가야산은 ‘개산’이다. 해상 교통이 매우 발달하고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불교문화 같은 많은 외국의 선진 문물이 유입됐다.

가야산 가야봉에서 석문봉 방면을 바라본 모습(북쪽).(사진=박성민기자)
가야산 가야봉에서 석문봉 방면을 바라본 모습(북쪽).(사진=박성민기자)

특히 가야산은 명칭부터 불교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가야산이라는 명칭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곳, 즉 붓다가야 근처에 있던 가야산의 이름을 빌려 우리나라의 개산들 역시 불교식으로 가야산이라고 표기됐다. 내포의 주산 가야산 역시 이러한 까닭에서 이름이 지어졌다.

현재는 북쪽 봉우리들을 상왕산(象王山)으로, 남쪽 봉우리들은 가야산으로 부르지만, 고려 시대까지는 모두 가야산으로 불렸다.

문학박사인 한국큰강연구소 박광수 소장은 “불교의 동래는 정신적 통일을 유도해 왕권을 강화하고 나아가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박 소장에 따르면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는 교종이 우세했다. 교종은 우선 불교 교리와 경전을 중시했으며 불교 교리와 경전을 통해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교종은 연기법칙에 따라 인간과 자연이 원만한 관계를 맺게 되고, 이러한 연기법칙을 깨닫고 실천하면 누구나 성불한다는 요지였다.

통일 신라시대도 교종 시대였다. 특권 의식을 가진 귀족층에 의해 당시 불교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문자를 해득하지 못했던 평민들은 어려운 불교 교리를 알 수가 없었으며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층은 자신들만이 불교를 알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통일신라의 교종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진다. 귀족사회였던 고려는 신라 교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와 통일신라 말기에 형성된 선종이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부각됐다. 불교 교리나 경전을 통한 성불보다는 직접적인 체득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선종이 백성들에게 쉽게 다가왔다.

불교의 한반도 동진 이래 강세를 보였던 교종은 경전 중심의 교리로 인해 특정 경전에 매몰된다. 교종의 대표적인 종파는 천태종과 화엄종을 들 수 있다.

천태종은 잘 알다시피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1097년(고려 숙종2)에 개창됐다. 대각국사는 고려 제11대 문종의 넷째 아들이다. 대각군사는 열 한 살 때 출가했으며 송나라 수도 변경의 여러 절에 머물면서 화엄과 천태 등의 교학에 몰두했다. 1086년(선종 3) 불교 경전류 30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여 흥왕사의 주지가 됐다. 1097년에 국청사(國淸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천태종을 창종(創宗)했고 선종과 교종의 대립보다는 종단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다. 천태종은 《법화경(法華經)》을 주요 경전으로 삼았다.

화엄종은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에 의해 시작됐음은 이견이 없다.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智儼)에게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하고 왔다.

내포 가야산, 불상과 사찰 유적의 ‘보물창고’

가야산 자락에는 많은 불상과 사찰 유적이 산재해 있다. 많은 고승들도 배출됐다. 내포지역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가야산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가야산 상가리미륵불로 가는 길.(사진=박성민기자)
가야산 상가리미륵불로 가는 길.(사진=박성민기자)

먼저 예산군 상가리 덕산도립공원에는 상가리 미륵불(충남도 문화재자료 182호)이 장대한 몸을 하고 서 있는데 묘하게도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대개 해가 잘 드는 남쪽을 바라볼 수도 있을 텐데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니 독특하다는 평이 많다.

이를 두고 남연군묘와 연결시켜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그곳에 아버지 묘를 쓰니 이에 못마땅한 미륵불이 등을 돌렸다는 게 그 전설이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이 역시 남연군과 얽힌 이야기인데 가야사 자리에 묘를 쓰는 과정에서 많은 민초들이 노역에 동원됐다고 한다. 그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을 대변하듯 미륵불이 뒤돌아서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야산 상가리미륵불.(사진=박성민기자)
가야산 상가리미륵불.(사진=박성민기자)

이밖에 북쪽의 해안으로 들어오는 당나라 군대를 막아달라는 수호의 의미를 담아 백제 부흥군들이 세웠다는 설, 멀리 바다로 장사를 떠나거나 해외로 가는 사신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그만큼 가야산이 교통의 요지, 해상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가야사지 윗길을 따라가 보면 미륵불은 많다. 북쪽 길을 따라 넘어가면 상왕산 대성과 서산마애삼존불, 용장천을 따라가다보면 안국사지, 여미리 미륵불들이 포진하고 있다.

가야산 자락 대표 사찰인 서산 보원사지

대표적인 사찰 유적은 가야산 자락의 보원사지가 있다. 서산 운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터인 보원사지는 1987년 7월 18일자로 사적 제316호로 지정됐다. 지정면적은 10만2886㎡로 석조, 당간지주, 탑, 법인국사보승탑과 법인국사탑비가 남아있다.

서산 보원사지 전경.(사진=박성민기자)
서산 보원사지 전경.(사진=박성민기자)

박광수 소장은 “보원사의 문헌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다”며 “사지나 사적기 같은 문헌기록은 없지만, 백제의 고찰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보원사의 창건을 대략 6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다. 그는 “이곳 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이 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창건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며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熊州) 가야협(伽耶峽)의 보원사는 의상(義湘)을 계승한 화엄십사(華嚴十寺) 중의 하나‘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보원사는 화엄종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보원사지 서쪽에 있는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에 탄문(坦文)이 보원사에 머물렀고 975년 국사(國師)로 책봉됐으며 이곳에서 입적했음을 적고 있다. 탄문은 장의산사(藏義山寺)의 신엄(信嚴)에게서 화엄경을 배웠다. 15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탄문은 계행이 매우 높아 고려 태조 왕건이 별화상(別和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태조(太祖)·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 등 4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왕사(王師)로서 당대 교종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했다. 왕사가 거처하면서 화엄경을 강론했던 보원사가 어느 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사지만 남기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임진왜란 전후에 폐사의 길을 걸었다면 그동안 억불숭유의 상황 속에서 쇠퇴의 길을 걷다가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사태를 만나 소실됐는지도 모른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와 법인국사탑.(사진=박성민기자)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와 법인국사탑.(사진=박성민기자)

보원사지 석조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102호로 지정됐다. 석조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내부를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이다. 이러한 석조 양식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인 것으로 전해졌다.

보원사지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5층 석탑도 있다. 사지의 서쪽에 위치한 탑은 1963년 보물 104호로 지정됐다. 5층 석탑은 높이 약 9m에 달하며 고려 초기의 양식인 것으로 전해졌다. 2단의 기단부 위에 5층의 탑신을 조성했으며 아래 기단에는 사자상이 있고 윗 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겨 놓았다.

이밖에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103호인 보원사지 당간지주, 고려시대의 승려 법인국사 탄문을 기리는 보물 105호 법인국사탑, 보물 106호 법인국사탑비 등이 보원사지에 남아있다.

가야산의 빼놓을 수 없는 국보 '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사진=박광수 소장)
서산마애삼존불.(사진=박광수 소장)

인근에는 서산마애삼존불도 있다. ‘천년의 미소’ ‘백제의 미소’라는 별명을 가진 마애삼존불은 보원사지로 가는 계곡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박 소장은 “대략 높이는 2.8m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빛의 각도에 따라 미소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걸작으로 칭송되고 있다”며 “마애삼존불이 조성된 곳이 바위로 이뤄진 급경사로 사람의 왕래가 없었다. 1959년에 발견됐는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마애삼존불이 조성된 지역은 황해와 연접한 중국의 불교문화가 유입돼 부여로 가는 길목이었다”며 “중국의 남조와 백제의 교통로의 입구에 해당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일찍이 불교가 도래하여 정착하면서 불교문화가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용현계곡의 동쪽 바위에 조성된 백제시대 마애삼존불상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큰 바위의 아래쪽에 조성된 삼존상은 가운데에 배치된 본존상은 좌우 협시상보다 크며 입상이다. 우협시보살은 입상, 좌협시보살은 반가사유상이다. 우연인지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짓날 떠오르는 해가 불상의 정면을 비춘다.

이처럼 내포 가야산 자락에는 불교문화의 발자취가 무수히 많다.

내포 가야산 자락은 드러나지 않은 박물관이다. 묻힌 유적·유물들을 발굴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내포 가야산을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충남도와 서산시, 예산군이 함께 움직여 활용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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