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뉴스프리존]김 석 기자=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 중이다. 영화를 본 이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정치군인을 보면서 현 정부의 정치검사를 떠올린다고들 한다. 최근 부산대학교에 붙은 대자보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부산대학교 대자보와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 역을 연기한 정우성 배우(왼쪽)와 전두광 역을 맡은 황정민 배우가 마주 서 있다.
부산대학교 대자보와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 역을 연기한 정우성 배우(왼쪽)와 전두광 역을 맡은 황정민 배우가 마주 서 있다.

❝ 그렇다면 지금은 봄이 왔을까?

군사독재를 한 전두환,

국민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위하는 모습이. . ❞

유례없는 이 정부 이름은 '(?)국가'이다.

검찰이 정치를 하고, 정책을 만들고, 정책을 명분 삼아 수사로 국민을 겁박한다. 검찰 출신들이 요직을 꿰차서만은 아니다. 이른바 '검찰주의'의 사고와 무모함, 권위주의가 현 정권의 DNA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는 '검찰공화국'을 겪었다. 일그러진 한국 현대사를 보여주는 영화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19일 현재 누적관객 900만 명을 넘었으니 이번 주 안으로 1000만 돌파가 말 그대로 목전에 와 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광(전두환, 황정민 분) 일당의 군사반란을 온몸으로 막으려다 실패한 이태신 장군(장태완, 정우성 분)은 영웅서사의 비극적 주인공과 닮았다. 영화 끝무렵, 이태신 장군이 전두광을 향해 겹겹의 철조망을 힘겹게 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형용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분노를 자아낸다.

영화는 뒷얘기를 간단히 보여주고 넘어간다. 이후 전두광 일당은 이태신 장군을 실제 어떻게 ‘처리’했을까?

‘성공한 쿠데타’ 12일 뒤인 1979년 12월 24일, 전두환이 장악한 국방부는 장문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의 박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신군부는 이 발표문에서 장태완 장군을 이렇게 모함한다.

“(장태완은) 정승화와는 70년 1군사(軍司) 검열단장시 참모장으로 모시게 된 것을 계기로 75~78년간 26사단장 재직간에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79년 8월 육본 교육참모부 차장시에는 우수한 장군이라고 총애를 받아 오다가 시해 사건 후 79년 11월 수경사령관직에 발탁되자 신명을 다바쳐 정 총장에게 충성할 것을 결심하고 유사시 경호실장이 지휘토록 된 수경사 지휘권을 참모총장 휘하로 변경, 작업하는 등 전 정 총장을 추종해오던 자로서, 12.12사건 시에는 전 정 총장을 구출한다는 구실로 전차부대 및 병력을 출동케 하고 발포 명령을 하달하는 한편 3군 사령관 이건영에게 2개 사단을 지원 요청하는 등 조직적인 저항을 자행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사결과에 의해 드러난 범행내용과 정상에 따라 정승화 전 총장은 김재규의 내란방조죄로 입건조치하고 추종세력인 이건영 문홍주 정병주 장태완은 죄상에 따라 각각 처리할 방침이다.” (당시 국방부 발표문)

1979.12.24 조선일보 호외
1979.12.24 조선일보 호외

다른 신문은 발표 다음날인 12월 25일자에 관련기사를 내보냈지만 조선일보는 발표 당일인 24일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 입건’이라는 제목의 호외를 찍어 거리에 뿌렸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 기준) 호외에는 국방부의 발표 전문도 게재했다.

당시 조선일보의 호외 발행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는지, 신군부의 ‘부탁’에 따른 것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호외 기사 앞부분을 보자.

“국방부는 24일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의 박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 정 전 총장이 김재규의 범행이라는 심증을 굳히고도 기회주의적인 야욕이 발동, 군 이동을 김재규에게 유리하게 조처하는 등 범행에 묵시적으로 동조했다고 밝혔다.” (1979.12.24 조선일보 호외)

반란군들이 오히려 진압에 나선 군인들을 반란세력으로 모함하고 있다. 장태완 장군을 ‘전 정 총장을 추종해오던 자’로, 정승화 총장을 ‘기회주의적인 야욕’을 가진 인물로 중상모략한다. 더 분노가 치미는 지점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반란군의 발표와 언론기사만 보고 ‘정승화와 장태완 등 일당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중령 시절의 장태완 장군
중령 시절의 장태완 장군

장태완 장군은 12.12 반란 뒤 강제예편과 6개월간의 가택연금을 당했다. 비극이 찾아왔다. 1982년 대학생이던 아들이 한 달간 실종됐다. 그 아들은 할아버지(장 장군의 부친)의 산소 근처 낙동강 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두 인물의 앞날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장면에 끝부분이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두 인물의 앞날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장면에 끝부분이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1995년 MBC의 한 토크쇼에 출연한 그는 ‘12.12 때 누가 가장 원망스러웠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제가 못나서 소임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아쉬운 점은 내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두 개 사단 요청했을 때 즉각 승인 조치가 내려졌다면…”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우리 가족이 어쩌면 이렇게 비참하게 돼 버렸는지 모르겠다. 국가에 잘못을 저질렀거나 도적질을 했거나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니지 않냐”는 한탄도 했다.

장태완 장군은 2010년 7월 26일 하늘로 떠났다. 향년 79세였다. 아내 이병호 씨도 2년 뒤 유서를 남기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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