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 최정간 (매월다암원장·차문화연구가)

현암 최정간.(사진=필자제공)
현암 최정간.(사진=필자제공)

■지리산, 섬진강, 노량 바다, 신이 내린 풍광의 땅 하동

하동은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자주 찾던 아름다운 고을이다. 이곳에서 1894년 음력 9월4일 19세기 서세동점 벼락과 해일 속에 맞서 민족의 자존과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들은 하동이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서 영남 최대의 격전장인지를 망각한 채 살아왔다. 일본제국주의 군대가 최신무기로 무장한 체 동학농민혁명군과 섬진강 하동읍 진교면 안심리 금오산 자락, 옥종면 고승당산성 등지에서 혈전 끝에 동학농민혁명군은 꽃잎처럼 산화해 갔다. 

그들의 피는 강물을 이루었고 주검의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였었다. 아직도 호곡하는 소리로 인해 잠들지 못한 땅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나 시민사회단체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은 호남지역에서 일어난 사실만 주목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혁명의 영웅으로 그 밖의 동학남접의 혁명지도자들만 현창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동군 옥종면 고승당 산성에서 개최된 동학농민혁명군 129주년 추모행사.(사진=필자제공)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전국각지에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결성되고 각종 학술회의와 문화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동학농민혁명이 우리 역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월30일 영남 최대 동학농민혁명군의 격전지였던 하동 땅에서도 뜻깊은 인사들이 모여서 하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발족이 되었다. 

이날 발족모임에서 전 문화부 차관이자 관광공사 사장인 김장실과 하동 진교면 사기마을에서 거주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많은 논문과 “해월 최시형 家의 사람들” 저서를 출간했고 현재는 차문화 연구가로 활동 중인 현암 최정간 등 2명이 고문으로 참가했다. 

기념사업회 의장에는 평소 하동 지역문화운동에 헌신해온 지리산 사진작가 김종관, 대하소설 동학의 작가 김동연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부의장에는 하동군 진교면 사기마을 운영위원이자 도예가인 송찬영, 사무처장으로 이 시대 위대한 산악인 정성완, 감사로 손병용, 이사로 김애숙, 장현주 그밖에 박애숙, 최영욱, 정한용 자문위원으로 경주 동학문화재 참여자 도예가 원 방 박학규 씨 등 각계각층에서 20여 명이 동참했다.  

이날 모임에서는 앞으로 기념사업의 계획 등을 논의했다. 실로 하동 땅에서 130년 만에 동학농민혁명의 메아리가 울려퍼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어 이들 기념사업회 간부들은 하승철 하동군수를 방문해 하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취지를 전달하고 하 군수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하 군수는 "평소 하동 동학농면혁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군의회와 긴밀한 협의를 해 관련 조례제정에도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마침 지난 12월19일 하승철 군수는 하동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조례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왼쪽부터 정성완 하동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김애숙 이사, 김동련 공동의장, 하승철 하동군수, 김종관 공동의장, 박경희 부의장, 송찬영 부의장.(사진=필자제공)
왼쪽부터 정성완 하동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김애숙 이사, 김동련 공동의장, 하승철 하동군수, 김종관 공동의장, 박경희 부의장, 송찬영 부의장.(사진=필자제공)

한편 하동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깊이 숭모하고 있는 젊은 조상규 변호사는 "앞으로 하동군의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예들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도록 법률적인 자문을 적극 연구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시작은 조금 늦었지만 하동 동학농민혁명의 기념사업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어 무척 희망적이다.

■ 하동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여장협(余章協) 장군

필자는 동학 가문에 태어난 못난 후예로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과 옥고를 치뤘다. 그 악명 높은 남한산성 육군형무소를 출소한 후 1982년 하동군 진교면 사기마을 새미골도요지(일본국보 이도다완의 고향)를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지역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하동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역사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동학역사의 권위자이신 당시 천도교 상주선도사로 재직하고 있던 표영삼 선생을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표영삼 선생은 하동의 동학 접주는 여장협(생몰연대 미상)이였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여장협 장군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하동에서 전남 광양의 동학대접주 김인배가 통솔한 1만5000여 명의 농민혁명군과 연합하여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 토벌군과 장장 1개월에 걸쳐 하동 땅에서 전투를 치뤘다고 했다. 

이때 하동의 여장협 장군은 하동읍과 진교면 안심리 전투와 옥종면 고승당 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비운의 전설적인 장군이라고 표영삼 선생은 강조했다. 1980년대는 5공 군사독재가 엄혹했던 시절이라 동학농민역사를 찾아나선다는 것도 매우 힘들었다. 

필자의 주변에는 항상 정보기관의 사찰이 심했다. 그래도 하동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여장협 장군의 자료 찾기는 멈출 수가 없었다. 1984년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에 의춘 여씨들이 집성촌을 이룬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방문했다. 

이 마을 여씨 집안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 가토기요마사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서 일본 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에서 승려 생활을 한 여대남(余大男)의 고향마을이기도 했다. 필자는 의춘 여씨 족보를 통해 여장협 장군이 이곳 양보면 의춘 여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밝혀내게 됐다. 

1987년 6.10항쟁에 의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노 정권은 비교적 전두환 정권보다 민주화를 유연하게 연착륙시키고 있는지라 동학농민혁명을 그렇게 백안시하지는 않았다. 이때 각종 시위 현장에서는 어김없이 동학의 창도자 수운 최제우 선생의 칼노래(검가)를 깃발로 나부꼈고, 이 검가는 판화가 오윤이 목판으로 작품한 것을 리프린팅한 것이었다. 

필자는 당시 청송에서 사과 농사를 짖는 5.18민주화동지 무영 박명규 선생과 의논한 끝에 일본 등지의 각 대학도서관을 방문해 일본 측이 소장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자료들을 열람하고 수집했다. 

이때 마침 카톨릭농민회운동을 주도하던 이병철 선생의 소개로 강원도 원주에서 동학사상과 해월 최시형 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무위당 장일순(1928~1994)선생을 찾아뵙게 됐다. 해맑은 얼굴로 무위당 선생은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선생은 ‘해월 선생의 생명사상’ 이야말로 오늘날 현대문명의 죽임의 문명을 살림의 문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하셨다. 

강원도 원주에 세워진 해월 최시형 선생 추모비 제막식 1980년 4월, 오른쪽에서 네 번째 무위당 장일순 선생, 일곱 번째 김지하 시인, 최승현, 박재일, 맨끝 현암 최정간.(사진=필자제공)
강원도 원주에 세워진 해월 최시형 선생 추모비 제막식 1980년 4월, 오른쪽에서 네 번째 무위당 장일순 선생, 일곱 번째 김지하 시인, 최승현, 박재일, 맨끝 현암 최정간.(사진=필자제공)

필자는 무위당 선생과 대화에서 하동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여장협 장군에 대해서도 학계에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해월 선생의 생명사상을 단순히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을 실천행동에 옮겨 오늘날 ‘한살림운동’을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하였던 것이다. 

무위당 선생은 1990년 4월12일, 해월 최시형 선생이 관군에 의해 체포된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송곡리에 치악고미술동인회 회원들과 함께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을 기리며'란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김지하 시인을 비록한 전국에서 많은 인사들이 참석했고 필자도 함께했다. 비문의 제목과 내용은 무위당 선생이 친필로 썼다. 

■ 끝내 세우지 못한 여장협 장군의 추모비

‘1994년은 동학100년’이라고 1990년부터 각계각층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예고했다. 필자도 동학의 후예로서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하동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여장협 장군의 업적을 현창하고자 사재를 털어 추모비 건립을 계획했다. 

즉 동학농민혁명당시 진교면 금오산 아래 안심마을은 여장협 장군이 인솔하는 농민혁명군과 일본군이 치열한 전투를 한 장소였다. 때마침 하동군 진교면 면장인 여태성 씨가 여 장군의 후손이었기에 필자는 여면장에게 여장협 장군의 추모비를 세울 진교면 안심리 부근 부지를 마련해 달라고 건의했다. 

부지 물색에 시간이 자꾸 흘렀고 나중에는 필자가 사비로 안심리에 작은 텃밭이라도 매입하고자 주인과 여러 차례 협의했으나 그마저 일이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곤양면에서 활동하던 석조예술가 우석 이화인씨를 통해 충남 보령에서 자연석으로 된 비석 몸돌까지 구입해 필자의 사기마을 도요지에 운반했다. 비문도 필자가 지었고 제목도 썼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동학 100년 한해를 넘기고 말았다. 이 빗돌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진교면 사기마을 ‘현암 도요’에 누워있고 도예가 송찬영이 관리하고 있다. 언젠가 시운을 잘 만나 여장협 장군의 추모비가 반드시 금오산자락 안심리에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한편 1994년 10월5일 저녁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축하연과 필자의 저서 「해월 최시형 家의 사람들」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윤여현, 조재훈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김경중 동학농민혁명 유족회장, 정문화(해월 선생의 외증손자), 조완규(전 서울대 총장), 김성준 진주교대 교수, 김정헌 서양화가, 한승헌 변호사, 이이화 역사학자, 송건호, 김용구 원로언론인, 박태근 역사학자, 손학규, 이재호 국회의원 등 각계각층에서 300명이 참석했다.  

1994년 10월 5일 서울신라호텔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축하연, 오른쪽부터 네덜란드 대사, 영국대사, 현암 최정간, 조완규 전 교육부장관, 이이화 역사학자, 한승헌 변호사, 동학농민혁명100주년 기념사업회 대표.(사진=필자제공)
1994년 10월 5일 서울신라호텔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축하연, 오른쪽부터 네덜란드 대사, 영국대사, 현암 최정간, 조완규 전 교육부장관, 이이화 역사학자, 한승헌 변호사, 동학농민혁명100주년 기념사업회 대표.(사진=필자제공)

또한 주한 영국대사, 스웨덴대사, 네덜란드 대사 등 각국 외교사절 30여 명이 참석하여 100년 전 이 땅에서 인류 보편의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을 외친 동학농민혁명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축하했다. 

1994년 10월 당시 최형우 내무부장관을 면담해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지원을 요청했다.(사진=필자제공)
1994년 10월 당시 최형우 내무부장관을 면담해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지원을 요청했다.(사진=필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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