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군과 일본군 토벌작전으로 결국 미완성,. 치열했던 1년간의 농민 혁명 기록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전옥서 터 앞에서 열린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제막식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정세균 국회의장 등이 제막을 했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19세기말 일제의 침탈과 봉건 지배에 맞서 싸운 정 장군의 얼을 기리고 민족, 인권운동의 효시인 동학운동의 시대적 의미를 담기 위해 국민 성금으로 세워졌다. 무술년(戊戌年) 의 무(戊)는 십간의 다섯 번째, 즉 갑·을·병·정의 다음을 말한다. ‘무성하다, 우거지다, 산’이라는 의미가 있다. 색깔로는 ’노란색, 황금색‘을 뜻한다고 한다. 무술년(戊戌年)의 술(戌)은 십이지 중 열 한 번째인 ‘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농민혁명 발발 이후 우리들이 겪었던 3·1운동, 4월 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등 가치와 의미가 큰 혁명 또는 그에 준하는 대사건들이 있어 왔지만 그 규모와 깊이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능가한 것은 없었다. 1894년 동학농민 혁명 이후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돈 1954년은 한국전쟁의 상처와 휴전을 둘러싼 강대국의 이권 싸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 당시 미국과 중국 등이 일방적으로 그어 놓은 휴전선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다시 역사의 수레바퀴는 64년이 흘러 마침내 2018년 그동안 세상은 크게 변한 것 같지만 123년 전 개혁의 깃발아래 탐관오리의 처벌, 지벌을 타파하고 고른 인재등용, 조세개혁을 외치던 동학농민군의 요구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지 벌써 123년이 흘렀다. ‘동학 난’에서 혁명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힘든 과정을 지나오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이제 우리에게 그 의미를 다시 묻고 있다.

1894년 조선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를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동학란’이라 불렸다. 이후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혁명 등 다양한 용어로 변천됐다. 북한에서는 1960년대 이후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용어로 통일해서 사용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을 칭하는 용어는 그 속에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을 칭하는 용어를 잘 이해하는 것은 그 사건의 본질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용어를 잘 분석해보면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먼저 ‘동학’은 동학이라는 종교의 사상과 조직이 이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농민’은 이 사건의 주체세력이 바로 농민이라는 것을 말한다. ‘혁명’은 이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혁명은 정치제도, 경제체제, 사회조직 등 사회의 전면적 개편을 의미한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혁명이라고 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을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으며, 동학농민군이 지향한 목표를 현재 우리가 계속해서 완성해야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사진: 종로네거리에 24일 제막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그리고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즉 국가가 법률에서 이 사건을 ‘동학농민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염두해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해석할 때 그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됐을까?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고부농민봉기, 3월 봉기, 집강소시기, 9월 재봉기 등으로 구분해 설명할 수 있다.

1892년 4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했던 조병갑이 온갖 수탈과 학정을 자행하자 전봉준 등 20여명은 1893년 11월 송두호의 집에 모였다. 그들은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과 타락한 벼슬아치를 처단하며 군기청과 화약고를 점령해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등을 결의하며 그것을 사발통문에 적었다. 그러던 중 1894년 1월 19일 조선정부가 조병갑을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하려고 하자 전봉준 등은 봉기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고부농민들은 1월 10일 말목장터에서 봉기해 그날로 고부관아를 점령했다. 이들은 무기고를 헐어 무장하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창고를 열어 세금으로 거둔 양곡을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또 만석보를 헐고 탐학한 향리들을 처벌한 데 이어 조병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관아에서 나온 농민들은 말목장터에 진을 치고 대장소를 세우는 등 전열을 정비했다. 그러나 신임군수 박원명이 주민들을 회유하고 우화적인 태도를 보이자 농민군은 해산하기 시작해 3월 13일 완전히 해산했다.    

전봉준은 고부농민봉기가 확대되지 못하자 무장의 손화중을 찾아갔다. 여기서 전국적인 농민혁명을 일으키자는 합의가 전격적으로 이뤄졌으며 주변지역의 농민군을 무장 당산마을로 집결시켰다. 1894년 3월 16일부터 당산마을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은 인근 마을에서 탈취해 온 무기로 훈련을 하는 한편 주변 농민군을 끌어 모았다. 농민군은 3월 20일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무장을 출발한 전봉준과 손화중은 4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창, 흥덕, 고부를 거쳐 24일 백산에 진을 옮겼다. 이어 김개남도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백산에 도착했다. 김개남이 합류함으로써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이 집결해 연합 농민군이 완성됐다. 이 연합 농민군은 3월 25일 백산에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 손화중을 총관령으로 김덕명, 오시영을 총참모로 최경선을 영솔장으로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정하는 등 그 지휘체계와 조직을 세우는 한편, 격문과 4대 명의, 12개조의 기율을 발표했다.

동학농민군은 이후 1894년 4월 7일 정읍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전라도 남쪽으로 이동해 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 해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는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京軍)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이후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7일 경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한 다음날 농민군은 전주성을 경군에게 내어주고 나왔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나간 이유는 청일 양국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던 것이다.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각자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27개조)을 단행했다.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은 신임 전라감사로 부임한 김학진과 전봉준 사이에 담판이 이뤄지면서 가속화돼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세력 여하에 따라 집강소 운영 실태는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동학농민군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고을에서는 집강소 설치가 수월했을 뿐만 아니라 과감한 폐정개혁이 이뤄졌다. 그러나 나주, 운봉의 경우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향리와 지방 유생 및 반농민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등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집강소는 1894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2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집강소 체제는 세계사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정부는 국가를 반대해 일어난 농민들을 인정했으며 여기에 집강소라는 일종의 통치행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한편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며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을 독려하던 전봉준은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재기포(再起捕)를 준비하게 된다. 여기에는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들도 뜻을 모았다.

9월 재봉기를 위해 전봉준은 9월 초부터 삼례를 거점으로 해 동학농민군을 재조직하고 10월에는 서울을 향해 북상을 시작했다. 이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군대가 세 길로 나누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잇따랐다.

특히 3월 봉기 단계에서 봉기하지 않았던 충청도·강원도·경기도·경상도·북부지방에서도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반침략 항쟁의 대열에 동참했다. 또한 충북 보은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동학 2대 교조 최시형의 9월 18일 무력 봉기 선언에 따라 손병희(제3대 동학 교조)와 동학 상층 지도자들이 휘하 교도들을 이끌고 봉기해 10월 15일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류했다.

남북접 연합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공주를 향해 진격했고,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1차 대접전,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제2차 우금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두 차례의 큰 싸움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분투했지만 절대적인 무기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동학농민군은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지만 반외세의 항쟁은 계속돼 11월 15일경 논산 황화대에서 11월 25일 김제 금구 원평에서 끈질긴 항쟁을 계속했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원평 전투를 거친 후 태인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은 해산을 공식화 해 이후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재기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피신했지만 관군과 일본군에 의한 완전 토벌작전에 밀려 대부분 체포됐다. 그렇지만 전봉준의 해산 선언 이후에도 동학농민군의 항전은 계속됐다. 1894년 12월 전라도 장흥의 석대들 전투가 있었고 같은 해 12월 충청도 보은 북실 전투가 있었으며 1895년 1월에는 대둔산 항전이 있었다. 그리고 황해도에서는 1895년 9월까지도 동학농민군의 항전이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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