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시은 기자, 사진 김지미 기자]= 한국 아이스하키의 역사는 양승준 단장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그는 1984년도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해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약했다. 이후 현재 한국의 유일한 아이스하키 실업팀인 HL 안양 아이스하키단의 30년을 함께 했다. HL 안양 아이스하키단 30주년을 기념해 양승준 단장의 삶을 되돌아보자.

PROFILE

양승준(교육학과 84)

前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전무이사

前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평창 올림픽준비기획단장

現 HL 안양 아이스하키단장

#아이스하키 #연세대

누구보다 아이스하키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그가 아이스하키를 어떻게 접하게 됐는지 물었다.

“공부하기 싫어서 했어요.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단체로 응원 올 때였어요. 저도 처음에 응원 끌려갔다가 운동 자체가 너무 멋있어 보여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런데 저는 그 정도로 공부를 안 시킬 줄은 몰랐어요. 지금은 우리 운동부 애들이 공부도 다 하잖아요. 그런데 저 때만 해도 거의 프로 선수예요. 공부를 1시간도 안 시켜서 조금 당황했는데 적응하다 보니까 나름 재밌었고 배운 것도 많은 것 같아요.”

아이스하키와 함께 시작한 그의 연세대학교(이하 연대) 재학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운동 특기자로 입학해서 교육학과로 배치받았는데, 아무래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과 애들하고 실력 차이가 많이 났어요. 그래서 운동부라는 티를 안 내려고 수업도 열심히 들어갔어요. 그런데 1학년 때 이진아 교수님 수업에서 영어 해석을 줄대로 시키시더라고요. 다행히 초반에는 안 걸렸는데 나중에는 걸릴까 봐 너무 두려웠어요. 그래서 제가 교수님을 먼저 찾아가서 사실은 제가 운동부인데 출석은 열심히 할 테니 제발 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알았다고 얘기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다음 수업에 자신 있게 들어갔는데 제일 먼저 저를 시키시더라고요. 많은 애들과 수업을 듣고 있는데 답을 못 읽으니까 교수님께서 월요일까지 준비해 오라고 하셨어요.”

“너무 창피해서 수업 끝나자마자 해석집을 사서 주말 내내 외웠어요. 외워서 수업에 들어갔는데 정말 처음으로 저를 시키시는 거예요. 주말에 했던 거를 열심히 읽고 해석하니까 교수님이 그제야 애들한테 제가 운동선수라고 얘기하셨어요. 제가 운동선수라는 게 그 순간 다 탄로 난 거예요. 그런데 그때부터 오히려 과 애들이 시험 준비하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줬어요. 제일 많이 도와줬던 게 나윤경(문화인류학과 교수)이에요. 나윤경은 시험 때 제가 답을 못 쓰고 있으면 제 앞에 앉아서 “야 승준아~” 하면서 도와주는 의리 있는 친구였어요.”

“제가 입학하고 운동을 하루도 안 빠졌는데 마라톤 때문에 딱 하루 빠졌어요. 저희가 1986년에 100주년이어서 총학생회에서 행사를 했는데, 행사 중에 마라톤이 있었어요. 그때 한 300명 정도 나왔는데 제가 2등 했어요. 근데 1등 한 애가 축구 선수였어요. 그건 도저히 못 따라가겠더라고요. (웃음)”

#신입사원 #HL안양 #30주년

현재 한국의 유일한 아이스하키 실업팀인 HL 안양 아이스하키단(이하 HL 안양)의 30년을 함께 해온 그에게 30주년을 맞이한 소감을 물었다.

“일단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간 것 같아요. 30년 전에 창단해서 국내 리그도 하고 아시아리그도 만들어서 해보고, 탑 디비전도 가보고, 올림픽도 했잖아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굉장히 보람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근데 어찌 됐든 30년을 할 수 있었던 건 우리 구단주 정몽원 회장님의 뜨거운 열정 덕분입니다. 현재는 우리 팀 하나밖에 없지만, 한때는 현대, 동원, 쌍방울, HL 안양 이렇게 네 팀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들이 그만뒀지만 저희가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만둘 생각 안 할 수 있었던 건 회장님의 뜨거운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그 부분에 있어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현재의 HL 안양은 그의 머릿속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은 어땠는지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저 때는 한국에 실업팀이 없어서 실업팀 창단이 아이스하키인들의 숙원 사업이었어요. 저는 실업팀이 없던 시절에 선수를 했기 때문에 취업이 안 됐어요. 농구했던 동기들은 다 프로로 가는데 저희는 졸업 후 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죠. 1990년에 제대하고 저도 제 밥벌이는 해야 하니까 여기저기 원서를 냈어요. 그런데 제 학점이 1.5예요. 나름 진짜 열심히 한 거예요. 원래 교육학과가 학점 안 주기로 유명한 과예요. 그렇지만 저는 나름대로 나윤경의 도움을 받은 학점으로 원서를 여기저기 냈어요.”

“그때만 해도 연대 나왔다 하면 웬만한 기업에서 다 받았는데 학점이 워낙 이상하니까 서류에서 다 걸러지더라고요. 그런데 유일하게 만도기계에서 면접 보러 오라고 했어요. 면접에 갔는데 대장이신 분이 제 학점을 보고 ‘너 운동했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근데 저는 ‘이분이 제가 운동한 걸 어떻게 알았을까?’라고 이해했었는데 이분의 의도는 ‘너 데모했지.’ 였던 거예요. 저는 자신 있게 얘기했죠. ‘저 운동했습니다.’ 근데 앞에 계신 분들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지시고 정적이 흘렀어요. 분위기가 이상해… (웃음) 그래서 제가 아이스하키를 했는데 어떻게 아셨냐고 하니까 ‘너 데모한 게 아니고 아이스하키 한 거야?’라고 하시면서 막 웃으시더라고요.”

“만도기계가 위니아라는 브랜드를 런칭하게 됐어요. 그래서 홍보 아이디어들이 나왔는데 제가 사수한테 아이스하키팀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어요. 솔직히 아무 생각 없이 한 거예요. 그때가 우리 회장님이 사장하실 때였는데 사수가 그걸 얘기하셨네? 사장님께서 얘기를 들어보시고 사업 계획서 한번 만들어보라고 해서 1992년도에 제가 사업 계획서를 썼어요. 그런데 위에서 사장님 빼고 나머지는 다 반대하는 거예요. 비인기 종목을 왜 하냐고 차라리 여자 배구를 하라고 했어요. 근데 아이스하키도 잘 모르셨던 사장님이 한번 해보자고 하셨어요. 에어컨이 시원한 이미지도 있어서 그런지 사장님께서 아이스하키로 결정하시고 1994년에 창단식을 했어요. 1994년부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성공적인 창단 이후에도 HL 안양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 리그를 했어요. 국내에서 대학, 실업팀들하고 했었어요.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이 안에서만 놀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일본이 그때만 해도 우리보다 훨씬 잘할 때였고, 가까우니까 일본과 교류해 보려고 했어요. 처음에는 일본 1등 팀을 찾아갔는데 그냥 무시만 당했고 만나주지도 않았어요. 꼴찌팀을 찾아갔더니 그 팀은 한 번 합동 훈련을 해주겠다고 해서 닛코로 갔어요. 그게 한일 실업 아이스하키 역사상 첫 교류에요. 그래서 (일본 팀과) 시합하는데 0-11인가? 꼴찌팀과도 엄청난 점수 차로 졌어요.”

“IMF 때 일본 팀 두 개가 해체되고 한국도 저희만 남아서 그동안 교류해 왔던 것을 바탕으로 팀을 합쳐서 해보자 해서 2002년에 아시아리그가 출범해요. 아시아리그 첫 게임에서 우리가 1-11로 깨졌어요. 처음엔 5개 팀으로 시작했지만, 중국과 러시아도 들어왔었고, 어떤 시즌에는 팀이 9개나 됐었어요. 또 한국에 하이원, 대명도 있었고 상무도 출전해서 규모 있게 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5개로 돌아왔지만 일본하고 교류를 튼 거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많이 배웠고 얻은 게 많아요.”

그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한국 아이스하키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평창) 올림픽이 유치됐잖아요. 그러다 보니 올림픽에 참가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기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한국은 출전권이 없었어요. 일단 실력이 안 되니까요. 근데 마침 올림픽이 확정되고 저희 회장님께서 아이스하키협회장이 되세요. 그때부터 전력을 올림픽에 나갈 수준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백지선 감독과 박용수 코치 같은 역량 있는 친구들을 영입하기 시작해요. 심지어 핀란드 2부리그 구단도 인수해 버렸어요. 구단을 인수하고 우리 선수들을 거기서 뛰게 하면서 효과를 상당히 봤어요. 결국에는 그런 것들이 바탕이 돼서 2017년에 저희가 역사상 처음으로 탑 디비전(1부 리그)에도 가보고 올림픽에서는 1승도 못 했지만, 나름 의미 있는 성과는 남겼다고 생각해요.”

HL 안양이 현재 이 자리에 있기까지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30년 동안 HL 안양을 이끌면서 그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안 나올 때 힘들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결과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과거에는 우리가 일본 팀들한테 경기력 외에도 홈 게임 운영 같은 것들을 많이 배웠는데, 지금은 거꾸로 일본에서 우리를 벤치마킹하는 현상이 많아졌어요. 그렇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고 또 회장님께서 앞으로의 20년 목표를 새로 설정하셔서 그거를 아마 끊임없이 해나가지 않을까 싶어요.”

반대로 그가 30년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지도 궁금해졌다.

“2009년 아시아리그에서 처음 우승할 때 제일 기뻤어요. 아시아리그 시작하고 성장은 해왔지만 7년 만에 우승한 거라 큰 의미가 있어요. 특히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났던 팀이 저희를 가르쳐줬던 크레인즈라는 팀이에요. 챔피언 결정전이 5전 3선승제였는데 1차전은 연장 가서 겨우 이겼어요. 2차전도 연장 가서 겨우 이겼어요. 3차전은 우리 홈에서 했는데 우리가 졌어요. 그래서 크레인즈 홈에서 4차전을 치렀어요. 4차전 때 우리가 이기고 있었는데 경기 종료 1초를 남기고 지금 연대 아이스하키 코치인 손호성(사회체육학과 01)이 골을 먹은 거예요. 동점이 돼서 또 연장에 갔다가 우리가 졌어요. 5차전도 2-3으로 끌려가다가 지금 우리 코치 김기성(체육교육학과 04, 이하 체교)이 17초 남겨놓고 동점을 만들었고, 결국 김우재(체교 98)가 연장에서 결승 골을 성공시키면서 첫 우승을 하게 됐어요. 저 경기는 지금까지도 명승부예요. 5차전 중에서 4번이나 연장에 갔거든요. 그것도 우리를 가르쳐줬던 스승 팀과.”

#평창동계올림픽 #미래

세계인들의 축제, 올림픽에 처음 출전하는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경기를 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는지 궁금해졌다.“우리 조민호의 첫 골. 우리는 올림픽을 한 번도 안 나가봤잖아요. 또 한국 아이스하키는 강한 팀들을 상대해 보지 않았어요. 그러니 체코와 첫 게임이 얼마나 두렵고 궁금하겠어요. 10골 차 나는 망신을 당하면 어떡할까 하는 고민을 다 했을 거예요. 근데 뚜껑을 열어보니 체코와 대등하게 가면서 심지어 우리가 첫 골까지 만들어냈어요. 그 순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아쉽게 우리 민호가 지금은 없지만 그때 굉장히 다 좋아했어요.”

한국 아이스하키의 발전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에게 올림픽 이후의 변화에 관해 물었다.

“요새 초등학교에서 아이스하키를 많이 한다고 해요. 단지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기초 체력이죠. 올림픽을 통해 우리의 인프라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올림픽 때는 워낙 시간이 없어서 급조할 수밖에 없었지만 올림픽이 끝나고 보니 우리가 하키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인프라를 강화하는 게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어요. 그래서 그동안의 30년은 올림픽이나 아시아에서의 위상에 집중했다면 앞으로의 30년은 우리의 기초 체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할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 속의 유소년 시스템을 구축한다든지… 그리고 아이스하키라는 종목은 시설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요. 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그래서 지금 우리 전용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어요.”한국 아이스하키가 발전하고 실업팀도 자연스럽게 늘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물어봤다.“기업은 마케팅을 위해 구단을 운영하잖아요. 마케팅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팬이 많이 찾거나 미디어에 노출돼야 해요. 근데 미디어는 사람이 꼬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시아리그에서 한두 게임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우리가 그게 중요하다고 착각했어요. 하지만 팬을 넓히고 또 아이스하키를 하는 사람들을 넓혀 나가는 게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고, 결국에 그런 게 넓어지면 관중이 많아지고 미디어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돼 있어요. 그러면 호 순환이 되죠. 기업들도 관심을 갖고 팀을 창단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팬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에게 아이스하키 팬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할지도 물어봤다.

“많은 요소가 필요해요. 예를 들어 외국은 링크 시설이 되게 좋아요. 관중들이 링크에서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게끔 환경이 이뤄져 있어요. 또 관중들에 대한 서비스 퀄리티도 중요해요. 관중들이 경기를 보면서 눈도 행복하고, 귀도 행복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고 경기의 퀄리티도 좋아야 해요. 허접한 경기를 해서는 관중들이 재미를 느낄 수 없어요. 다행스러운 건 최근에 우리 홈경기가 계속 매진되고 있어요. 작년에 비해 관중이 훨씬 늘었고 이제는 계속 매진될 것 같아요. 물론 경기장이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이걸 중요한 시그널로 인지하고 있어서 계속 키워나가려고 하고 있어요.”

30년 동안 그의 아이스하키에 대한 애정과 함께 한국 아이스하키는 수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이제는 또 다른 30년이 기다리고 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 아이스하키가 더 높은 곳에 다다르기 위한 새로운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저희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요. ‘우리 실력으로 10년 후에 다시 올림픽에 도전한다.’ 저번에는 용병들을 넣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진정성이 떨어져서 회장님께서 10년 후에 올림픽에 재도전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셨어요. 목표를 달성하려면 위에서 얘기했던 것들이 거의 다 이뤄져야 해요. 10년 후에 올림픽에 들어갈 자원들을 발굴해서 저희가 직접 키울 거예요. 그러면서 저변도 같이 넓어지게 하려고 연구하고 있어요.”

일본 실업팀조차 무시하던 한국 아이스하키가 세계선수권 1부 리그인 탑 디비전에 다다를 때까지 정몽원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지와 더불어 양승준 단장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HL 안양 아이스하키단이 30주년을 맞이한 지금,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10년을 바라보는 그처럼 한국 아이스하키가 또 다른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도록 HL 안양 아이스하키단의 새로운 30년에 많은 관심과 응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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