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논리와 자주사상

장기표는 1970~80년대 명성을 날렸던 재야운동가이다. 이 책은 그가 86년 인천투쟁으로 구속되고 난 후 교도소에서 쓴 글들(항소이유서 포함)로 이루어져 있다. 본서를 보고 문익환 목사는 ‘이것은 칼날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80년대 운동권에 만연한 반미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기표 씨와 내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66년 가을 바로 이맘때, 그러니까 햇수로 쳐서 꼭 22년 전의 일이다. 그 무렵 어느 날 서울대학교 개교기념행사였던가 무언가로 효창운동장에서 교내체육대회가 열렸는데 1,500m 달리기 시합에 출전한 장기표 씨는 맨 꼴찌로 뒤쳐져서 남들이 골인한 뒤에도 만장의 박수와 폭소를 한 몸에 받으며 온전히 한 바퀴를 혼자서 마지막까지 달렸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가 그에게 "실력도 안 되는 사람이 어째 출전할 생각을 했느냐"고 농담 삼아 물어보았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가을하늘 아래서 한번 마음껏 달려보고 싶습니다."

가을하늘은 그때처럼 맑고 높푸르건만, 이번에도 또 양심수 석방에서 제외된 장기표씨는 그 하늘 아래를 달려가지 못한다. '양심수 전면 석방'을 공약한 '6. 25선언' 이후 벌써 몇 차례나 석방조치가 있었는데도 그때마다 '탈락'되어 아직껏 철창신세를 져야 하는 그는 대체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 내가 알기로도 장기표 씨가 죄가 없지는 않다. 죄가 많다.

67년 어느 겨울밤 나는 동숭동 대학로를 끝없이 걷다 서다 하며 베트남 파병부대에 자원 입대하겠다고 하는 그를 온갖 말을 동원해가며 만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고 나로서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고 하는 마지막 말로 나를 단념시키고 말았다. 그 역사의식이 그의 첫 번째 죄였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갖은 고생 끝에 서울법대까지 들어왔으면 육법전서 한가지만을 의지해서 판검사로 출세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일이지 목숨을 걸고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겠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망령된 생각인가? 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하며 스물 둘의 젊음을 스스로 불살라 죽었을 때, 장기표 씨는 누구보다도 먼저 성모병원 영안실로 달려가 그의 주검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 이후 십수년 그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투옥과 도피생활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민중의 곁에 있었다. 배고픈 자와 함께 배를 곯았고, 아픈 자와 함께 앓았고, 통곡하는 자와 더불어 눈물을 흘렸고, 분노하는 자를 위하여 외쳤다. 바로 그 사랑이 죄였다. 그는 사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꿈꾸지 않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죄였다. 모두가 외면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쳐다보았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혼자 가슴을 앓아야 했단 말인가?

72년의 유신체제 수립, 그리고 80년 5공의 광주학살,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겪으며 사람들이 좌절과 침묵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 때에, 그는 오히려 '군사독재 타도'의 결의를 더욱 굳히고 불철주야로 민주화운동의 재건을 위해 뛰어다녔다. 깡마른 체구의 한 병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불의한 권력 앞에 무릎 꿇기를 끝내 거부하는 그 '터무니없는' 자존심, '유연한 타협'을 모르는 그 지나친 강직함이 그의 죄였다.

장기표 씨가 어떤 사람이냐고 누가 내게 물을 때면 나는 한마디로 "그는 순수한 사람이다"라고 대답한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어부의 노래를 그는 알지 못한다. 세상이 다 취해도 홀로 깨어 있으려고 하는 그 지나친 순수함이 그의 병이요, 그의 죄이다.

이처럼 장기표 씨의 수많은 '죄상'을 역력히 알고 있는 나로서도, 그가 매번 석방에서 탈락되는 데 대해서 한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장기표 씨가 징역 7년이라는 형기의 3분의 1을 채우지 못하여 "가석방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7년의 형기가 그다지도 신성하고 정당한가? 전경환 씨가 징역 7년, 문귀동 형사가 징역 5년인데, 과연 장기표 씨가 이 사람들보다 더 끔찍하고 용서받지 못할 대죄를 저질렀는가? 이해하기가 어렵다.

올해 따라 가을날씨가 왜 이다지도 청명한지 아득한 하늘을 우러르면 알 수 없이 마음이 저려온다

[문익환 목사] 이건 칼날이다

이건 그냥 글이 아니다. 글치고는 겨레의 몸부림과 아우성이 담겨 있는 글이다. 그러나 이건 그냥 몸부림이 아니다. 그냥 아우성이 아니다. 이건 명경지수(明鏡止水)로 맑은 양심의 몸부림이요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건 그냥 양심이 아니다. 이건 서릿발 날리는 푸른 양심이다. 아니, 그대로 칼날이다. 그러나 이건 그냥 칼날이 아니다. 靑龍刀 무거운 칼날의 무게를 싣고 바람을 가르며 내려찍는 칼날이다. 그러나 이건 칼몸-그것은 민중이다.

그냥 민중이 아니다. 한국의 민중, 억눌리고 짓밟혀도 땅 속으로 힘줄을 뻗으며 돌 같은 땅을 뚫고 돋아나는 한국의 잔디 같은 민중이다. 이 땅을, 이 역사를 숨이 턱에 닿아 살아 온 민중의 한이다. 모든 억압을 물리치고 기어코 우리의 세상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뜨거운 뜻이다. 그 뜻 속에서 번져나오는 푸른 꿈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의 무게다. 그런데 장 기표라는 기막힌 젊은이는 이 무게를 견뎌낸다. 견딜 뿐 아니라. 20여년 길바닥을 헤매면서, 때로는 수배자의 몸으로 쫓기면서,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이 쇳덩어리를 역사에 대고 갈아서 스스로 날이 된 것이다.

장 기표는 온 몸으로 이땅의 가난하고 고생하는 민중의 날이 되어 내려찍는다. 무엇을?

그것은 돈으로 푹푹 썩어 행정부의 시녀가 되어 버린 사법부다. 백성의 인권을 지켜야 할 사법부가 백성이 인권을 짓밟는 원흉이 되어 버린 사법부다.

사법부를 채찍인양 휘두르며 양심적인 애국자를, 민주인사와 노동자와 학생을 사형장으로 몰고가는 독재자의 손목이다.

장기표는 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파란만장의 역사에 대고 간 날카로운 많은 칼 가운데서도 가장 무섭고 가장 날카로운 몇 안되는 칼이다. 이 칼들이 멀지 않아 신나는 칼춤을 출 날이 올 걸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이건 그냥 믿음이 아니다. 그건 우리의 입김이요, 가슴의 고동이다. 역사의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요, 그 문으로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사랑의, 우리의 믿음의, 우리의 희망의 전부가 이 책에서 외치고 있다.
 (1988. 5.12 무너미에서. )

[해방의 논리와 자주사상] - 추천의 말
[함세웅 신부] 장기표, 우리들의 장기표 씨

1987년의 5~6월에는, 이 나라 민중이 분출하는 민주화의 열기가 이땅을 가득 채웠다. 지금은 역사와 국민의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한 독재자의 호헌조치에 대해 '이럴 수는 없다'는 지식인, 문화인, 전문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던 것이다. 그 물결은 더욱 나아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을 왜곡·축소·조작한 공권력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군사독재정권의 명운은 일각일각 민중의 포위망 속에 압축되어 갔다. 이른바 6.29선언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독재권력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카드요, 또한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때부터 사태는 잘못 흐르고 있었다.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시작된 '구속자 석방'은 민중의 입장과 그 극명한 논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엊그제까지만 해도 인권을 유린하고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고 용공조작한, 바로 그 공안당국의 손과 논리에 따라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 후 대통령선거가 치루어졌고, 그 결과 '제6공화국'의 출범에 즈음하여 또 한바탕 외형적으로만 소란스러운 '석방'과 '사면'과 '복권'이 거듭되었다.

그러나 장기표, 우리들의 장기표 씨는 언제나 석방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감옥에 남아 있는 장기표 씨의 옥고나 분노를 걱정하기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장기표 씨의 부인과 어린 두 딸을 위로해야 될까를 먼저 걱정하곤 했다. 언제나 가장 가까이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장기표 씨는 적어도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분통터지는 일이다.

이제, 멀리 떨어져 있는 장기표 씨와의 통신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다고 한다. 비록 부인과 어린 두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쓰여졌지만, 그것은 실은 다같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에게, 그리고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절절한 그의 메시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옆에, 우리 안에 그가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그의 서한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와의 만남을 비롯하여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된다.

사실 격렬하기만 한 이미지로 그를 양각시켜 놓은 것은 바로 그를 잡아넣은 권력이요, 이른바 그 촉수로서의 공안당국이었다. 나는 그의 해맑고 조용조용한 몸짓과 말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만약 그가 이 시대의 한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그의 몸짓과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도 책임도 나일 것이다. 70~80년대라는 시대가 착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격렬한 투사로 만들어 냈으니까.... 오늘의 장기표, 그는 이 시대가 만들어 낸 대표적인 한 사람의 초상이기도 하다.

이 서한집에는, 한 인간의 투명한 의식이 이 시대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하나하나의 현상들에 투철하게 조응되어 있다. 때문에, 마디마디 배어나오는 진실에 찬 목소리를 담고 있는 서한집은 바로 이 시대의 아픔의 기록이고, 또한 이 땅에 살아가야 할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문제의 제기이며, 동시에 그 해답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때로는 아주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때로는 힘을 다하여 성심으로 외치는 메시지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그의 글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하여 그의 생각과 고통을 함께 하기를 바라면서, 일독을 권해 마지않는다.
 (1988년 4월 )  [장기표의 옥중서한 -새벽노래]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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