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일 오후 만난 김지수 헌7학병동지회 6.25 참전유공자 / 사진=변옥환 기자

[뉴스프리존,부산=변옥환 기자] “전방에 있었을 땐 아침에 얘기 나눴던 친구가 저녁에 죽어서 발견된 것을 봤다. 후방으로 빠졌을 때도 동료들이 무사했으면 하는 걱정에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25일 오후 뉴스프리존이 만난 헌7학병동지회 6.25 참전유공자 김지수 선생은 그 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먹먹하다고 밝혔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8월 28일 부산의 고등학교(당시 중학교 6년제)와 대학교 재학생 가운데 1661명이 육군 헌병학교에 입대했다. 헌병학교 제7기 학도병(헌7학병)들은 약 한 달간의 전투 훈련을 받고 난 뒤 10월 초 전국 각 격전지에 분산 배치됐다.

당시 18살의 나이로 경남중학교에 다니다 지원해 9사단 백마부대에서 철원 등지를 다니며 전투에 참전한 김지수 선생은 “당시 우리가 입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가 있어야 우리가 있으니까”라며 “경북 포항, 영월, 구미부터 경남 통영까지 밀고 들어와 상황이 정말 위급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부산에 있는 각 중학교에 다니던 또래들이 모여 함께 입대했다. 그때 동신초등학교(부산 서구 동대신동 소재)에서 한 달 남짓 훈련을 받고 바로 전장에 투입됐다”며 “입대 당시 부모님과 헤어지는 그때 너무 슬퍼서 차마 말로 얘기할 수 없다. 전장에 가면 거의 죽는다고 하는데 나뿐 아니라 학우들의 부모님 모두가 몸 걱정 많이 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바로 전방에 배치돼 9사단에서 함께 싸웠다. 전방에서 전투를 벌일 때 하루마다 누가 죽고 누가 다치고 하는 게 일상이었다”며 “아침에 밥 먹으며 같이 얘기 나눴던 전우가 저녁에 죽은 채 발견되고 그랬다. 그러면 죽은 시신을 개울가에서 화장해 유골을 뿌렸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먹먹했다”고 전쟁터에서 겪었던 심정을 말했다.

김지수 선생이 겪었던 당시 경험담에 따르면 철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일 때 보급이 너무 열악했다. 당시 김지수 선생의 소속 부대 최전방 전투병들에게 밥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데다 식사로 나온 주먹밥도 추운 날씨에 다 얼어 이빨로 깨 먹어야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한겨울 강원도 철원의 살인적인 추위에 소변을 누면 바로 얼 정도였다고 한다.

김지수 선생은 “전방에서 전투 경험이 부족한 학도병들 목숨 많이 잃었다”며 “전쟁터에서 친형제와 다름없이 지냈던 전우들끼리 다친 곳은 없는지 서로 걱정이 절로 나왔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 치열했던 순간들을 전했다.

 

▲ 김지수 선생이 함께 훈련받은 대한민국 1기 합동수사본부. 전시에 수사기관이 없을 시절 합동수사본부가 그 기능을 대신했다고 한다. / 사진=변옥환 기자, 제공=김지수 헌7학병동지회 6.25 참전유공자

또 김 선생은 전방에서 철수한 뒤 후방에서 훈련받은 합동수사본부 동료들이 중공군에 의해 전멸한 사건도 얘기했다. 김 선생은 “당시 모든 부대가 북진 중이었는데 그 부대 중대장이 아침에 무장 해제를 한 상태에서 구보를 시켰다. 분산돼 숨어있던 인민군들이 아침에 기습해 구보하던 중대병력을 다 쏴 사살했다”며 “나는 당시 금화 603고지 밑에서 차량 통제 검문소에 있어 그 소식을 듣게 됐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후방에 있어도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전방에 싸우는 동료들 걱정이 자꾸 났다”며 “전방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후방으로 내려왔을 땐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피난 온 사람들이 하루하루 먹고살려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봐 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먹고살기 너무 힘들었다. 하루 2끼 챙겨 먹으면 잘 먹은 것이다”라며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라고 밝혔다.

김 선생은 “그때를 생각하면 오만 생각이 다 난다”며 “그때 같이 싸우던 헌7학병 출신 동지들도 전투하다가 많이 죽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1661명 중에 200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또 그는 “나는 다행히 총상이나 어디 골절된 것이 없으니 다친 곳 하나 없다. 전투 중 넘어져 타박상을 입거나 하는 것은 신경 쓸 겨를 없다. 1951년 초 중공군 수십만명이 몰려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정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현재 국가유공자에 대한 처우가 아쉽다는 얘기도 전했다.

김지수 선생은 “내가 51년경에 대관령 지역 인근에서 인민군 연대장을 생포해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받는 보상은 한 달에 20만원 남짓이다”며 “나라를 위해 싸운 우리들을 조금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소신을 밝혔다.

이어 그는 “우리는 나이가 많아 살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국가는 대한민국을 지켰던 많은 이들에 대한 예우를 해줬으면 좋겠다”며 “지금 정치인들도 우리 참전유공자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정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전했다.

 

▲ 부산진구 초읍동에 있는 헌7학병 1661명 기념비에서 김지수 선생이 6.25전쟁 당시 함께 참전한 전우들과 찍은 기념사진 / 사진=변옥환 기자, 제공=김지수 헌7학병동지회 6.25 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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