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축구와 야구가 함께 정상에 올랐다. 2014년 인천 대회에 이어 2회 연속이다.

축구와 야구는 자타가 인정하는 국내 최고 인기 종목이다. 이런 종목이, 무대가 아시아이긴 하지만 최고의 경기력을 보인 건 리그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먼저 축구부터 보자.

한국은 1일 인도네시아 보고르 파칸사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에서 일본과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로 이겼다. 한국은 두 대회 연속이자 통산 5번째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통산 우승 횟수에서 이란을 따돌리고 단독 1위로 올라섰다.

이어서 야구다.

한국은 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겔로라 붕카르노 구장에서 열린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결승전에서 선발투수 양현종의 호투와 4번 타자 박병호의 홈런을 앞세워 일본을 3-0으로 꺾었다.

한국은 2006년 도하 대회 동메달 이후 2010년 광저우 대회와 2014년 인천 대회에 이어 3개 대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뒤 7번째 대회에서 5번째 우승이다.

축구와 야구 팬 모두 즐거워할 일인데 반세기여 전에는 이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아시안게임 동반 우승이 있었다. 야구는 아시안게임은커녕 국제 무대에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때 얘기다.

타임머신을 타고 제6회 아시안게임이 열린 1970년 방콕으로 날아가 보자.

축구와 농구는 그 무렵 아시안게임 첫 우승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경기력도 우승권에 근접해 있었다.

축구는 1956년(홍콩)과 1960년(서울)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2연속 우승하며 아시아 정상의 실력을 자랑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태국에 0-3, 버마(오늘날 미얀마)에 0-1로 져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도 당했다. 요즘 같으면 대한축구협회가 된통 홍역을 치를 일이었다. 그해에는 북한이 8강에 오른 잉글랜드 월드컵 지역 예선에 북한의 전력을 의식해 출전을 포기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대한축구협회는 양지(중앙정보부 축구 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에서 비롯한 이름)를 중심으로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을 목표로 전력을 다졌다. 멕시코행 비행기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축구 대표 팀 전력은 알게 모르게 향상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맞이한 대회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이었다.

대회 직전 열린 제3회 킹스컵에서 우승하며 기세를 올린 한국은 1차 조별 예선 C조 첫 경기에서 난적 이란을 1-0으로 꺾은 뒤 인도네시아와 0-0으로 비겨 2차 조별 예선에 올랐다. 2차 리그 첫 상대는 홈그라운드의 태국이었다.

그 무렵 태국 원정은 거친 응원으로 선수들에게는 악몽이었다. 김호 박이천 정강지 등이 관중석에서 날아 온 빈 병과 돌에 맞아 그라운드에 쓰러지기도 한 가운데 2-1로 이겼다. 두 번째 경기에서 버마에 0-1로 졌지만 조 2위로 준결승에 올라 라이벌 일본과 맞붙었다.

전해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동메달의 일본에 1승1무(2-0 2-2)로 앞섰던 한국은 연장 접전 끝에 2-1로 이겨 결승전에 올랐고, 버마와 다시 만나 0-0으로 비기면서 대회 출전 사상 첫 우승을 거뒀다.

농구는 전해인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방콕)에서 대회 출전 사상 처음으로 우승한 여세를 몰아 1970년 세계선수권대회(유고슬라비아)에서 11위에 오르는 등 전력이 상승하고 있었다. 이 순위는 2018년 현재 한국 남자 농구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올린 최고 성적이다.

한국은 조별 예선에서 이란을 110-77, 홍콩을 116-51로 연파한 데 이어 그 무렵 아시아 농구 최강인 필리핀을 79-77로 따돌리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 첫 경기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잡혔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이스라엘을 81-67로 물리쳐 4승 1패로 이스라엘과 타이를 이룬 뒤 승자승으로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일본이 3위,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이 4위, 필리핀이 5위, 인도가 6위, 이란이 7위, 태국이 8위 등이었다. 오늘날의 아시아 농구 판도와는 꽤 다르다.

이스라엘은 1981년 아시아경기연맹(AGF) 후신인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에서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에 의해 제명되기 전까지 아시아 지역의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1994년 유럽올림픽위원회(EOC)에 가맹하면서 스포츠 활동 무대를 유럽으로 완전히 옮겼다.

두 종목 우승 이후 스포츠계에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축구와 농구의 ‘술 내기’가 벌어진다. 그런데 이 내기는 애시당초, 요즘 말로 ‘게임이 되지 않을’일이었다. 키와 몸무게 등 체격 조건에서 축구가 농구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술 내기에 나선 선수 숫자와 관련해서는 5-5와 7-7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아무튼 축구가 완패했다. 그 대회 금메달 멤버는 최재모 최길수 최상철 정강지 정규풍 홍인웅 김창일 김호 김정남 김기복 김기효 이회택 이세연 임국찬 오인복 박병주 박이천 박수덕 박수일 서윤찬(이상 축구) 최종규 추헌근 김인건 김영일 곽현채 이인표 이자영 박한 신동파 신현수 유희형 윤평로(이상 농구)다.

농구 쪽 출전 선수 가운데 뒷날 유명 대학 감독으로 활동한 A는 농구 담당 신임 기자가 오면 양주를 ‘글라스 떼기’로 해서 기를 죽여 놓곤 했는데 이 정도 실력이었으니 축구가 이길 방도가 있었을까. 이 ‘술 내기’ 종잣돈은 대회 선수단장인 B 씨가 두 종목 선수들에게 준 격려금이었다고 한다.

이번 대회 선수 선발과 관련해 말이 많았던 축구와 야구이기에 이번 동반 우승은, 반세기 전처럼 즐거운 추억으로만 남을 것 같지는 않다. 우승으로 끝날 일이 아니고, 여러 가지로 두 종목 단체 관계자들이 반추해야 할 과제를 남긴 대회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