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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서평] 슬라보예 지젝 금융위기에 비친 마르크스주의의 두 초상
  • 김은경 기자
  • 승인 2019.01.01 23:06
  • 수정 2019.01.02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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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슬라보예 지젝 지음|김성호 옮김|창비|339쪽|1만5천원

지난 이십여년간의 정세와 이론적 지형 속에서 좌파적 정치를 사고하는 방식에 두드러진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치적 영역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지위가 사라졌거나 적어도 희미해졌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경제적인 것에 부여했던 우선성의 지위가 소멸하면서 정치를 보증하는 궁극적 토대로서의 경제와 혁명적 주체로서의 계급은 사라지고, 경제적인 것은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는 다양한 영역들 중 하나에 불과하거나 정책적·제도적 관리의 대상으로 환원된다. 하지만 2008년 이후의 금융 위기에는 이런 정치적 사고를 흔들어 깨우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체제의 결함에 대한 직관과 더불어 경제를 근본적인 변화의 대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따라서 경제가 정치의 무대로 재등장하는 계기를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경제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바라보는 상이한 관점

지난 여름 번역돼 출간된 두 권의 책,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와 캘리니코스의 『무너지는 환상』은 금융위기 이후 좌파적 사유로 현실의 경제적 질서를 파악하고 모종의 정치적 가능성을 도출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배경을 제공한다. 양자는 모두 금융위기가 단순히 금융에 대한 국가의 규제 실패나 우연한 사고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근본적 결함의 표현이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접근 방식과 대안의 제시에서 전적으로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캘리니코스가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197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변화,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불안정한 금융시스템의 형성과 붕괴과정, 그리고 그것이 자본과 노동의 계급관계에 함의하는 바를 보여주고자 하는 반면, 지젝은 곧장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끄집어내며 이데올로기의 작용 으로어떻게 위기가 봉합되는지, 그리고 위기에 대한 정치적 반응과 실천이 어떻게 자본주의의 핵심을 피해가며 전치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말하자면 캘리니코스가 위기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지젝은 모종의 물러남의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두 저자가 자본주의의 모순 또는 경제적인 것 속에 놓여 있는 정치적인 것의 차원을 파악하는 방식의 차이, 그리고 경제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캘리니코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경제 내적인 논리 속에서 파악한다. 다시 말해, 모순은 자본의 이윤 논리와 시장의 무정부성의 작용 속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적 갈등과 경제 전체의 위기로 나타나며 국가를 비롯해 자본주의 하에 이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은 『무너지는 환상』에서 1970년대 이후 과잉 축적과 이윤율 저하가 어떻게 노동 임금 저하와 노동강도 강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으로 나아갔는지, 하지만 그런 착취로도 해결되지 않는 위기가 어떻게 금융화의 불안정성과 붕괴의 과정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지젝이 파악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경제적 원리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지젝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또는 사회 일반은 언제나 자신 속에 포함되지 않는 어떤 요소들을 배제함으로써만 구성되며 모순과 적대는 이 배제의 지점을 중심으로 표출된다. 지젝에게 문제는 이런 배제와 적대의 지점을 곧바로 정치적으로 동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장소가 이데올로기의 작용 속에서 왜곡되고 전치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치는 언제나 이데올로기 비판의 실천 속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우리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오늘날의 경제적 질서에 대한 언급보다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훨씬 많이 접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특히 지젝은 이 책에서 크게 이데올로기의 두 가지 작용방식, 즉 증상적 방식과 물신적 방식을 구분하고 오늘날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물신적 방식이 현실을 왜곡하고 본연의 정치적 차원을 전치하는 논리를 분석한다. 이런 논리 속에서 체제의 한계에 대한 인식은 체제의 승인과 공존하며, 실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런 방식으로 지탱된다. 금융위기는 경제적 문제일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문제다.

다른 사고, 다른 대안 - 국유화 실천 vs 보편성의 정치

자본주의를 파악하는 방식의 이런 차이는 두 저자가 실천적 대안의 방식을 제시하는 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캘리니코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가에 의한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이를 통한 공적 영역의 확대, 그리고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의 자주관리로 운영되는 계획경제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캘리니코스는 시장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사고하는 방식을 배격하는 동시에 현실 사회주의(또는 캘리니코스의 ‘국가자본주의’)의 관료적 계획경제 모델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리하여 캘리니코스가 강제력과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기관으로서 국가의 힘이 중요하다고 파악한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노동자와 대중의 자주적·민주적 참여가 실현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다. 또 국유화와 계획이라는 마르크스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의 전통적 요소는 ‘민주적 계획경제’의 모델로 전환된다. 하지만 전략적 거점으로서의 국가와 이를 통제할 주체로서의 보편적 노동계급이라는 요소는 캘리니코스에게 변치 않는 신념으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해 지젝은 보편성을 중심으로 정치적 실천의 방향을 제시한다. 지젝에게 정치는 보편성의 자리를 명명하고 그것을 현실의 질서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지젝은 바로 이 보편성의 정치를 공산주의로 명명한다. 실로 공산주의적 가설의 개념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처음으로 상세하게 제공되며, 지젝이 이전 저작들에서 제시한 전복적 실천의 형식들(행위, 감산적 정치 등)을 넘어서는 구체성을 획득한다. 동시에 이는 지젝이 마르크스주의와 조우하는 새로운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젝에게 이것은 미래 사회의 어떤 구체적 형태가 아니다. 여기에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나 국가 소멸과 같은 그 어떤 실정적이고 실천적인 내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불어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성은 전통적인 보편계급으로 기능해온 노동계급의 보편성과도 무관하다. 공산주의적 정치를 구성하는 보편성의 자리는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것 속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 사회가 자신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 배제해야만 하는 지점, 따라서 사회가 자신 또는 스스로의 보편성과 일치할 수 없는 지점에 놓여 있다. 해방적 정치의 일차적 과업은 이 바깥의 자리, 사회의 근본적 배제와 적대의 지점을 식별하는 것이다. 지젝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하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네 가지의 적대를 논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적대의 지점으로 사회적 공간 내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를 분리하는 간극을 제시한다.

된 자본주의는 한 도시와 국가 내에서, 그리고 국경을 가로질러 이런 인간들 사이의 장벽들, 그리하여 실업자와 빈민가의 거주자들, 난민 등의 자리없는 자들을 계속해서 산출하며 그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지탱되는 근본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지젝에게 본연의 정치는 국가나 노동계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배제된 자를 중심으로 사고된다. 그것은 그들이 자본주의적인 사회 질서 내에서 그 어떤 적절한 자리도 갖지 못한다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자본주의의 진실을 체현하는 자들이며, 정치는 이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보편성의 질서를 어떻게 창출하느냐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젝과 캘리니코스의 만남에서 찾은 경제적 물질성과 보편성

캘리니코스와 지젝을 대질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의 공간에서 잊힌 두 요소, 경제의 물질성과 보편성의 요소를 만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정치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던 이 물질성과 보편성을 희생시킨 대가로 오늘날의 정치적 공간이 구성돼어 왔다면 어떤 점에서 금융위기는 이런 희생에 대한 사후복수일지도 모른다. 물론 경제주의와 본질주의의 함정을 피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겠지만 물질성과 보편성을 정치적 사유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복원하는 데 있어 이 두 권의 책은 유용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김은경 기자  saint44445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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