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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이’ 페스트와 싸우는 사람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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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이’ 페스트와 싸우는 사람들 3
- 지금, 까뮈 『페스트』를 읽다 -
  • 김종익
  • 승인 2020.02.28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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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타 미쓰오 宮田光雄1928년 태어나다. 도호쿠대학 명예 교수. 유럽 사상사 전공. 저서로는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아가다』 『국가와 종교』 『나치 독일과 언어』 등이 있다.
미야타 미쓰오 宮田光雄1928년 태어나다. 도호쿠대학 명예 교수. 유럽 사상사 전공. 저서로는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아가다』 『국가와 종교』 『나치 독일과 언어』 등이 있다.

■ 의사 리외의 초상

우선 리외의 기록 노트에 기재된 리외의 초상

“언뜻 보기에 서른다섯 살 정도, 키는 보통. 딱 벌어진 어깨. 거의 네모에 가까운 얼굴. 곧고 어두운 눈매. 앞으로 튀어나온 턱. 크고 가지런한 코. 아주 짧게 깎은 검은 머리. 입은 활처럼 둥글고, 입술은 두텁고 불룩하며 언제나 일자로 꽉 다물어져 있다. 피부는 햇볕에 탔고, 털은 검고, 그리고 언제나 어두운 색의 그러나 그에게 잘 어울리는 양복을 입고 있는 점은 얼핏 시칠리아 농부 같은 풍모를 풍긴다.”

리외 자신은, 이 기록을 “상당히 정확하다”고 평한다. 아무튼 그는 자신이 “건강해 오래 견디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다. “매일의 일 가운데 바로 확실한 것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명상적 생활이 아니라, 행동적 생활이었다. 일찍이 젊은 의사로 출발한 그는, 이 무렵에 한층 겸허해지고, 현실적이 되었다. 가까이에서 겪은 비참한 많은 경험, 아니, 인생 그 자체가 그러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페스트가 엄습한 이 도시를 상대로, 외부 세계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호소나 격려’가 답지했다. 항로와 육로로 보내준 ‘구조 물자’와 아울러, 매일 밤 전파를 통해 또는 신문의 지면으로 ‘동정하거나 칭찬하는 설명이 붙은 말’이 고립된 이 도시에 쇄도했다.

의사 리외는, 그것들을 읽을 때마다, “서사시 풍의 또는 수상 연설 풍의 어투”에 실망했다. 그는 이러한 ‘간절한 배려’가 가식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재난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고난의 와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의 ‘틀에 박힌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과의 ‘연대’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침내 리외는, 페스트 환자 각각의 구체적인 삶과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해야 할 일은, 확인할 것을 명료하게 확인하고, 쓸모없는 망령을 끝까지 쫓아내고, 적절한 치료를 강구하는 것이다”라고. 파늘루와는 달리 불가지론자인 이른바 ‘신 없이’ 페스트와 싸우는 의사 리외를 떠받쳤던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파늘루의 첫 번째 설교는, 리외에게 페스트를 인식하는 데에도, 그것과 싸우는 데에도 조금의 도움도 안 되었다. 페스트에서 그가 끌어낸 것은, 그런 기독교적인 미래를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재앙에 대처해 간다는 연대적ㆍ실천적인 구원 활동밖에 없었다. 파늘루의 설교는, 리외에게는 오랑시를 엄습한 페스트를 구제사적救濟史的[신이 창조한 세계의 역사에는 처음과 끝이 있고, 그리스도에 의한 화해와 성령에 의한 구속救贖을 통해서 구원의 완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상]인 세계 해석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계기로 정당화시키는 절망적인 시도이며, 비인간적인 교육론에 지나지 않았다.

파늘루의 설교에 대해, 그것과는 조금 어감을 달리하는 타루 자신의 생각은, 그의 관찰 노트에 달려 있는 ‘주’에서 발견된다. “호감이 가는 이 열정적인 기분은 나도 잘 안다. 재앙의 초기와 그것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늘 약간의 수사를 부리기 마련이다. …앞으로 기다려 보자”라고.

타루는 지원 보건대를 조직하는 안을 상담하기 위해, 처음으로 리외를 방문했다. 그때 파늘루의 첫 번째 설교에 관해 리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도 화제가 되었다. 타루의 질문에 대답한 리외의 감상.

“나는 지나칠 정도로 병원에만 박혀 살았기 때문에 집단적 징벌 같은 관념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나 어쨌든 기독교도라고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저런 식의 말을 하고는 하죠, 실제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결국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좋은 사람들인 데도 말이죠.”

이 발언에서는, 리외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 주목을 끈다. 사실, 나중에 타루가 파늘루 또한 보건대 대원으로 가입을 신청해 온 사실을 전하자, 리외는 대답한다. “그가 그 설교보다는 나은 인간이라고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네요”라고.

여기서 ‘신’의 존재를 둘러싸고 타루와 리외 사이에 첫 번째 중요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신을 믿습니까, 당신은?”

타루의 이 질문에 대해서 리외는, 잠시 망설인 다음 대답한다.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확실히 판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의 배후에 있는 것은, 깊은 ‘밤’의 경험일 것이다. 바로 이 세상의 부조리, 특히 그것을 상징하는 죄 없는 어린이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가 풀리지 않은 채로 있는 ‘신의 침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리외는 “이미 오래 전에 나는 그런 것을 특별히 별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죠”라고 이어서 말한다. 타루는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묻는다.

“결국 그거 아닙니까, 당신과 파늘루의 차이는?”

리외는 대답한다.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고요. 파늘루는 서재에 처박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죠. 사람이 죽은 것을 많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진리를 내세워 말하거나 하는 거지요.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없는 시골의 목사라도, 착실하게 교구의 사람들과 접촉하고, 인간이 임종하는 숨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생각하겠지요. 그 비참이 내포한 훌륭한 이유를 증명하려고 하기에 앞서, 우선 그것을 치료하겠지요.”

여기에는 말투상으로 ‘진리’에 대한 두 개의 모습이 대비되고 있다. 하나는 바로 타루의 관찰 노트가 말하는 ‘수사’상의 진리이다. 그것은 완전히 습관에 사로잡혀 있어서, 현실에서 일어난 재앙으로도 중단시킬 수 없다. 그것에 비해 리외가 말하는 ‘진리’는, 상투적인 습관을 떨쳐 버리고, 희생자를 직접 마주 대하는 인간으로, 그러한 상투적인 말의 사용을 중단하게 만든다. 결국 파늘루는 페스트의 재앙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접하기까지, 아직 습관의 세계에 속한 채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특정 신의론의 형태로 종교적 진리를 계속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타루는 다시 한 발 파고들며 리외에게 묻는다.

“왜 당신 자신은, 이렇게 헌신적인가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요?”

독자의 최대 관심을 끄는 이 질문에 대해, 작가 카뮈는 일의적으로 명료하고 직접적인 화법 형태로는 대답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늘 속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은 채, 의사는 그것은 이미 대답한 것으로, 만약 자신이 전능한 신이라는 존재를 믿고 있다면,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걱정거리는 그렇다면 신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사람도, …이런 종류의 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그 증거로는 누구도 완전하게 자신을 포기해 버린다고 하는 일은 하지 않고, 그리고 적어도 이런 점에서, 리외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만들어진 세계와 싸움으로써 진리에 이르는 길 위에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이 직업의식과 연관해 의사 리외의 행동 동기를 좀 더 정확하게 탐지하기 위해, 파늘루의 두 번째 설교 후에 파늘루와 의사가 나누었던 ‘사랑’에 대한 문답을 다루어 보자.

오랑의 거리를 지배하는 페스트의 ‘분노’를 말하는 리외에 대해, 파늘루도 또한 공감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그는 신을 믿는 기본적인 입장을 여전히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리외는 “갑자기 상체를 쭉 펴고” “몸속에서 느낄 수 있는 한 모든 힘과 정열을 모아서” 반론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것을 좀 다른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심하게 고통을 받게 만들어진 이런 세계를 사랑하는 일 따위는 죽어도 수긍할 수 없습니다.”

파늘루는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야 알았습니다. 은총이라고 불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리외는 조금 전보다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대답했다. “제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확실하게. 그러나 저는 그런 것을 당신과 논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모독이나 기도를 넘어서 우리를 결속하는 뭔가를 위해. 그것만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파늘루는 감동에 겨운 모습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당신도 또한 인류의 구제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리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한다. “인류의 구제란 너무 과장된 말이지요, 제게는. 저는 그런 당치도 않는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건강이라는 것이 제 관심의 대상입니다. 우선 무엇보다 건강입니다.”

이러한 다소 감정적으로 말을 주고받은 다음에 리외는, 파늘루의 손을 잡고 말한다. “제가 증오하는 것은 죽음과 불행입니다, 그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우리는 함께 그것을 견디며, 그것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느님조차 이제는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사실 파늘루는 보건대에 참가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이 보건대에는 랑베르 또한 참여하고 있었다. 그것은 페스트 발생 직전의 그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려하면 근본적인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소설의 시작에서는, 랑베르는 인생의 행복과 정열을 체현하는 존재였다. 페스트가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 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새로운 사태를 맞닥뜨려, 그저 오로지 거기에서 탈출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의사 리외에게 건강증명서을 발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안 됐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여 증명서 발행을 거부당했다.

랑베르는 마음속에 가득 찬 열의로 파리에 남아 있는 아내와 다시 재회해야 할 필요를 호소했지만 “포고와 법률”에 따라야 하는 의사의 입장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뜻을 통고받았다. 랑베르는 그것을 “추상의 세계”로 불리는 “이성의 말”이라고 격렬하게 반발한다. “공공을 위한 직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공공의 복지라는 것은 개개인의 행복에 의해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라고. 확실히 랑베르의 이 주장은, 얼핏 보기에 자신의 행복에만 집착하는 이기주의 같이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예전에 스페인 시민전쟁에 참가해 패배한 공화파 편에 서서 싸운 과거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페스트와 싸우는 리외와 타루를 향해 관념을 위해 죽는 영웅주의를 부정하고, “자신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고, 또 죽는” 것을 바로 열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발언을 들었을 때, 의사 리외가 랑베르의 열의에 대해 따듯하게 이해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던 점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리외는 인간애에 대한 감수성을 전혀 갖지 않은 비정한 관료주의자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중에 랑베르가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출을 도모하려고 하며 이별의 인사 차 들렀을 때는, 그가 사랑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소원을 “떳떳한 것,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결국 리외는 자신은 이룰 수 없는 소원이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페스트에 대한 그의 투쟁은, 필요로 하는 이성의 법칙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는 것 자체를 개인의 행복보다 우선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리외의 투쟁, 그 밑바탕에 있는 것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만은 꼭 말해 두고 싶네요. 이번 일은 영웅주의 따위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실함의 문제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어쩌면 웃음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함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된 랑베르는 “어떤 것이죠, 성실함이라는 것은?”라고 반문한다. 이 반문에 대해 리외는 대답한다.

“일반에게는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네요. 그러나 내 경우에는 결국 자신의 직무를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의사 리외의 일은 이미 직접적으로 환자 치료를 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격리하기 위해 페스트 환자를 가정에서 끌어내고, 가족 관계를 끊어 버리는 행정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개인은 아내의 병과 페스트의 방역 활동에 의해 아내로부터 이중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의 생활을 가질 수 없고, 그 마음 깊숙한 곳에서 단절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얼핏 보면 비인간적인 결정의 집행자인 동시에 이별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기도 했다.

랑베르는 리외의 아내가 몇 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국의 요양소에 있다는 것을 타루에게서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이 동요되어 바로 리외에게 전화한다. 탈출 방법을 찾을 때까지 함께 일하고 싶다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랑베르는 서서히 의식 변혁을 이루어 간다. “역시 나는 가지 않겠어요. 여러분과 함께 남으려고 합니다”라며, 리외와 타루를 향해 오랑에 잔류하겠다는 결의를 확실히 알린다.

이때 리외는 주의 깊게 랑베르에게, 전에 나눈 대화에서 그가 생명을 건 행복이라고 여겼던 파리의 아내와의 재회에 대해 상기시키려고 한다. 랑베르는 그 생각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 자신이 탈출해 간다면 “틀림없이 부끄러운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런 기분이 있고서는 저쪽에 남겨 놓고 온 그녀를 사랑하는 것에도 틀림없이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리외는 “똑바로 몸을 일으키며” “분명한 목소리로”, 그것은 “어리석은 짓”, “행복 쪽을 선택하는 데 부끄러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 말에 답하며 랑베르는 고백한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나는 이 도시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나 자신과 여러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이는 대로 사실을 봐 버린 지금, 이미 확실하게 나는 이 도시의 사람입니다. 내 자신이 그것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 사건은 우리 모두가 관계된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랑베르는 거듭 다그치며 리외와 타루의 행동 근거를 캐물으려고 한다.

“게다가 여러분 또한 알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뭐를 하시겠다고 하는 거죠, 저 병원에서? 일단 선택했잖아요, 여러분은? 그래서 행복을 단념했잖아요?”

긴 침묵이 이어지고 다시 랑베르는 “힘을 주어” 아까의 질문을 되풀이한다. 리외만이 “노력한 모습으로” 대답한다.

“언짢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랑베르. 그러나 나도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뭔가에 짝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게다가 그러면서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어요,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른 채.”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고, 결국 그 뿐입니다.”

“기진맥진한 어조로” 이렇게 계속한 리외는 “자, 그대로 기록해 놓고, 거기에서 끌어낸 결론만 채택하면 안 될까요”라고 했다. “어떤 결론인데요?”라고 다시 한 질문에 대한 리외의 결론. “인간은, 동시에 치료하거나 알거나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가능한 한 빨리 치료한다는 것이지요. 이쪽이 긴급을 요하는 일입니다.”

‘신’을 둘러싼 최초의 대화에서 타루에게 한 대답, 파늘루와 ‘사랑’의 문답, 더욱이 랑베르에 대답한 “그것만이 사실이다”이라는 결론. 거기에는 뭔가 모르게 전해지는 어떤 일관된 이유의 소재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리외의 행동을 지탱하는 궁극적인 동기의 비밀은, 꼭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마지막에 정리해 다루는 것으로 하자.

■ 타루의 초상

파늘루의 두 번째 설교 후, 11월말에 리외와 타루의 두 번째 중요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타루는 그때까지 의사 리외의 오른팔 같은 존재로 방역 활동을 위해 열심히 협력하며 일해 왔다. 그러나 그의 출신을 비롯한 신변 사정은 밝혀져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바로 자신의 성장 내력과 체험을 말하며 ‘자신의 정체’를 고백한다.

타루의 풍모에 대해서는 소설 초반에 “다부지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한일자를 그어 놓은 듯한 짙은 눈썹, 전체 모습에 위엄이 있는 아직 젊은 남자”로 소개되었다. 이 고백에서 밝혀진 것은, 타루의 생애가 겪고 있었던 것이 인간의 ‘죄책’ 문제였다는 것이다. 실제 이 문제도 또한 인간의 ‘극한 상황’을 규정하는 중요한 국면의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그는, 이 대화의 첫머리에서 “나는 이 도시와 지금의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페스트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다. 타루에게는 벗어나기 어려워 보이는 죄책의 굴레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 죄책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자신의 죄책을 가능한 한 작게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만 한다. 단 한 번의 결단으로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면, 덮쳐드는 피로에 맞서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계속 저항해야만 한다.

타루의 자기 생애에 대한 긴 회고는, “거의 원형 그대로” 직설적 화법으로 리외에 의해 기록된다. “젊은 시절”에는, 그는 “나는 맑고 깨끗하며 더럽거나 속된 데가 없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었다. 말하자면 전혀 생각 같은 것은 갖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번민하는 취향은 없는 편이고, 세상으로 나가는 첫 걸음도 대체로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의 아버지는 차석 검사로 근무하고, 아버지의 “중용을 지키는” 생활 스타일의 인격에 대해, 타루는 “분별 있는 애정과 존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제안을 받고 중죄 재판소에서 아버지의 논고를 방청하게 된다. 그때 키가 작고 볼품없는 붉은 머리털을 한 형사 피고인에게 아버지가 사형을 구형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마음에 병이 들어 버려” 가출한다. 머지않아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어서 정치운동에 가담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사회는 사형 선고라는 기초 위에 이루어졌다고 믿고, 이것과 싸움으로써 살인과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투쟁에도 판결, 투옥, 처형이 이루어졌다. 이 “혐오스러운 학살” 사실에 직면하여, “비록 아무리 간접적이었더라도, 또 선의의 의도에서라도, 이번은 내가 살해자 측에 붙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는 혁명 운동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확실히 그것을 알았다 ― 우리는 모두 페스트 속에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현재도 계속 그것을 추구하면서, 모든 사람을 이해하자, 누구에게도 불구대천의 원수는 되지 말자고 노력하고 있다. 다만 나는 이런 일만은 알고 있다 ― 앞으로 더는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단 하나 마음의 평화를, 또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떳떳한 죽음을, 기대하게 해 주는 것이다.”

타루는 리외를 향해 “나는 인생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두 번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인식이었다. “누구나 각자 자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 하나, 정말로 이 세상의 어느 한 사람도 그 병독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타루에게 “훌륭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가능한 한 긴장을 풀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게다가 그것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상당한 의지와 긴장을 가지고, 결코 긴장을 풀지 않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타루가 도달한 현재의 입장은 “나는 확실한 길을 택하도록, 명료하게 말하고, 명료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재해에 한정하는 형태로, 모든 경우에 희생자 측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 긴 고백은, 마지막에 매우 흥미 깊은 주제로 옮겨 간다. “어떻게 하면 성자가 될까”라는 문제이다. “하지만 그대는 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리외의 경악에 찬 질문에 타루는 대답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에 의지하지 않고서 성자가 될 수 있을까 ― 이것이, 오늘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구체적 문제이다”라고.

“신에 의지하지 않은 성자”라는 것은, 바로 의사 리외의 헌신적인 희생적 행동이야말로 정말로 타당한 것이 아닐까? 반복해 치료의 헛됨을 실감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페스트 징후를 보이는 환자의 표정을 목격하면, 의사로서의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리외 자신은, 이러한 “성자가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살릴 수 없었던 페스트 환자의 고뇌에 찬 운명에 대해 바로 자신이 윤리적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성자다운 것보다 그들의 생명 자체가, 한층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말이야, 나는 스스로 패배자 쪽에 더 연대감을 느낀다, 성자 같은 것보다도. 나에게는 어쩐지 영웅주의나 성자의 덕망 같은 것을 소망하는 마음은 없는 것 같다. 내가 마음이 끌리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 조심스러운 리외의 말 배후에는, 끊임없이 “구체적 삶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 끊임없이 윤리적 결단하에서 살아가는 인간 ― 이라는 높은 요구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때문에 타루는 곧바로 “그렇지,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공감을 고백할 수 있었다.

이 중요한 대화가 오고간 무대가 되었던 곳은, 페스트에 오염된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해변의 테라스였다. 작가의 이 설정도 매우 암시적이다. 그것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바다 냄새를 실어 나르고, 절벽으로 밀려오는 파도의 은밀한 숨결이 들려오고, 등대의 깜박임이 멀리 바라보이는 고요한 밤의 일이었다.

‘우정의 기념’으로 두 사람은 해수욕을 함께 하며 무한한 행복감을 만끽한다. “달과 별빛뿐인 하늘” 아래에서, “단둘이, 세상에서 멀리 떠나, 도시와 페스트에서 마침내 해방되어” 힘껏 헤엄친다. 긴박한 투쟁의 장에서 잠시 물러남으로써, 다시 페스트에 저항할 힘을 회복하기 위해.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전염병도 조금 전에는 그들을 잊고 있었고, 그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 타루의 죽음

그러나 타루는 이제 막 페스트가 끝장이 나기 직전에 마지막 페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타루는 처음부터 리외와 함께 페스트와 싸우는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용감함, 냉정함, 정열로 보건대를 조직하고, 함께 싸우는 동료와 연대를 꾸려 왔다. 공교롭게도 타루가 마지막 페스트 희생자가 된 것은, 그렇지 않아도 자의적인 페스트에 의한 죽음을, 한층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고, 남은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을 크게 만들었다.

죽는다는 것은 나쁜 사람에게 한정되고, 착한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은, 사실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작가 카뮈는, 이러한 현실을 문학적 표현을 통해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타루가 죽음과 싸우는 최후의 자세는, 고통당하는 장면을 상징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는 성실한 죄책감에서 약자를 위해 연대하며 행동해 왔다. 그러나 용사는 마침내 쓰러졌다. 그의 죽음은, 앞에서 본 오통 소년의 최후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 비극의 절정을 형성한다. 의사 리외는 거의 자신의 죽음인 것처럼 친구가 겪는 죽음의 고통을 함께 체험한다.

타루가 죽어가는 곁에서 마지막까지 간호했던 리외의 어머니 모습도 인상적이다. 그녀에게는 마치 십자가 곁에 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마저 얼핏 보인다. 타루 자신의 관찰 노트에는, 그녀의 풍모에 대해 그 모든 언동에서 드러나는 선량함과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그녀의 조용한 몸가짐이 강조되어 있다.

“그렇게 조용하게 어둠에 묻혀 있기 때문에, 어떤 광선에도 이를테면 페스트의 광선일지라도, 당당하게 견딜 수 있다”고. 이 문장에 이어지는 타루의 말. “나의 어머니도 그런 모습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리외 어머니 같은 조용함을 좋아하고 있었고, 어머니야말로, 내가 언제나 그런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고 생각해 온 인간이다.”

사실 죽음의 병상에 누운 타루 위로 리외의 어머니가 몸을 구부리고 베개를 바로잡아 주고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의 귀에, 멀리서 들려오는 꺼져 가는 듯한 목소리가, 고맙다고 하며, 지금이야말로 모든 것이 좋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타루도 또한 파늘루와 마찬가지로 괴로운 삶의 여정에서 마지막까지 ‘내면의 페스트’와 싸우며, 그것에 목숨을 바쳤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모든 것이 좋다”고 하는 타루의 희미한 중얼거림은, 그가 그 고행자로서 삶의 마지막에 마침내 찾아낼 수 있었던 자기수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리외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회상한다.

“희망 없이 마음의 평화는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단죄할 권리를 인간에게 인정하지 않았던 타루, 그러나 어떤 사람도 단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고, 희생자들조차도 때로는 사형 집행인이 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타루는,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아온 것이며, 희망이라는 것을 결국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 때문에 그는 성자의 덕을 소망하며, 사람들에 대한 봉사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은 리외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타루가 죽은 다음날 아침. 리외는 아내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를 받는다. 그는 얼굴을 돌린 어머니에게 “아무쪼록 울지 말아 달라고, 자신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다만 그에게 그 고통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또 지난 이틀 사이에도 그것과 똑같은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 리외는 이 세상의 부조리라는 냉혹한 현실에, 되풀이해 직면해 왔다. 그는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일에 노력해 왔다. 그러나 오랑시의 입구가 마침내 열리고, 사람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을 때, 자신이 승리했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마음의 벗과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몸과 마음이 모두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라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행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이 기록이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대략 모든 사람들 ― “성자다울 수 없는, 자연의 재앙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게다가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 ― 이 자기 자신의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수행해야만 할 것” 대한 “증언”일 뿐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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