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미학

역설(逆說)이란 문학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하지만, 그 속에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을 말합니다. 참 어려운 말입니다. 더군다나 <미학(美學)>이라니요? 우리 덕화만발 카페에 『이언 김동수 교수님의 시문학방』이 있습니다.

이언 김동수 시인은 현재 <미당 서정주 문학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이번에 이언 시인께서 <역설의 미학>이라는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이 <역설의 미학>이 아무래도 제 눈에는 문학을 넘어 진리의 깊숙한 뜻을 설해 주신 것 같아 덕화만발에 실어 널리 알립니다.

【역설(逆說)은 모순 어법으로 일종의 ‘낯설게 하기’이다. 얼핏 보기에는 모순된 논리 같으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말 속에는 일종의 진리를 품은 깊은 통찰이 숨어 있다. 시인들은 이러한 통찰의 세계를 보다 밀도 있게 압축한 역설의 언어를 통해 시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침묵이 곧 웅변’, ‘지는 것이 이기는 것’,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죽는다.’ 등이 그것이다.

만해(卍海)의 「님의 침묵」에서도 님은 갔지만, 그 님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이별이 곧 만남’이라는 역설을 낳게 된다.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내려 식물의 뿌리와 줄기에 스며들어 꽃이 되고 또 그것이 열매가 되어 과일로 익어가는 끊임없는 변전(變轉), 그것은 동일성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그리 놀라운 기상(奇想)도 반전도 아니다.

사물의 순차적 변화 과정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형식 논리에서 보면 ‘A’는 ‘A˜’일 수가 없다. 그러나 시(비유)의 세계에서 보면 ‘A’는 ‘A˜’ 이 되어 시공을 초월한다. ‘작은 거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등도 역설의 초월성이 함장(咸章)된 은유(隱喩)다.

조건에 따라 그때그때 형상과 이름을 달리하고 있을 뿐, 그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동일성의 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이것이 곧 시의 모티브가 된다. 사물이 여러 모습으로 변해가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연기되어 있기에 역설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로 이어져 있다. 다만 원인과 결과 그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중간의 변화 과정이 생략된 압축 구조, 아니 논리적 추론 과정을 뛰어 넘어 그 본질에 직진하는 직관과 통찰이 역설의 배경에 깔려 있다.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그 누가 오래토록 객수에 젖어 있나/ 한 번 큰 소리로 천지를 뒤흔드니/ 눈 속에 핀 복사꽃도 흐드러져 날리네.』 -한용운 「오도송 悟道頌」

만해가 어느 겨울 오세 암에서 좌선하다 문득 깨치게 되었다는 선시(禪詩)다. ‘객지’가 ‘고향’이고, ‘눈 속’에서 ‘복사꽃’이 핀다. 이 또한 기상이고 역설이다. 하지만 우주적 선의(禪意)에서 보면, 인생 자체가 이 세상 나그네에 지나지 않고, 봄에 피는 꽃도 실은 겨울의 눈 속에서 배아(胚芽)되어 개화의 봄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유(有)와 무(無) 그리고 공(空)과 색(色)을 넘나드는 반전과 역설 등도 실은 보이지 않는 본질에서 분리되지 않는 ‘하나(一)’이다. 결국, ‘같다(the same)’는 것이 아니라 ‘동일선(the identical)상’에 놓여 있는 ‘같은 것들의 다른 모습’이요,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不一不二)’의 ‘연속성의 원리’로 이어진 연기에 다름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도 역설이고, ‘번뇌가 곧 보리’라는 부처님의 말씀도 역설이다. 역설의 깊이는 깨달음의 깊이요, 깨달음의 깊이는 묵상(默想)의 깊이다. 그러기에 묵상을 통한 깨침, 곧 직관적 통찰이 없다면 어찌 역설의 진정한 이치를 깨달았다 하리오?

디지털적 메커니즘도 역설의 구조와 닮아 있다. 순간적 비약의 초월성이 그것이다. 아날로그가 사건의 전 과정을 연속적 연산의 결과물로 설명해 주고 있다면, 디지털은 그것들의 논증 과정을 건너 뛴 초월적 불연속성으로 중간 값이 생략된 채 문제와 정답만 제시되어 있는 즉답성이 그것이다.

이처럼 ‘처음’과 ‘끝’, ‘문제’와 ‘답(答)’만을 결합시켜 중간 과정이 생략된 구조가 디지털적 시스템이요 역설적 직관의 세계이다. 결론과 정답만이 제시 되어 있기에 역설과 디지털적 즉답 형식은 때때로 소통 불능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러기에 역설은 모순의 언어이면서도 비 모순을 지향하고, 디지털 또한 불연속이면서도 아날로그적 연속성을 추구하게 되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떻습니까? 심오한 ‘역설의 미학'이 아닌가요? 가히 우리 덕화만발의 품격(品格)을 보여 주는 이언 시인의 <무정설법(無情說法)>이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오래오래 여운(餘韻)으로 감도네요!

단기 4353년, 불기 2564년, 서기 2020년, 원기 105년 9월 4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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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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