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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일상 속의 '민족 혼'이 살아 숨쉬던 신당(神堂)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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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일상 속의 '민족 혼'이 살아 숨쉬던 신당(神堂)①
[창원의 신당(神堂)] 창원 동남쪽 끝 '연도신당'
  • 강창원 기자
  • 승인 2021.01.28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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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천자봉에서 본 연도 모습/
2015년 웅천 천자봉에서 본 연도/ⓒ강창원 기자

산업화 과정에서 급격하게 사라진 전통문화가 많지만, 방치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맥을 잇는 전통문화도 적지 않다.

그 중의 하나가 신당(神堂)이다. 신을 모시는 사직당과 성황당을 일컬어 '신당'이라고 하지만, 국가에서 제를 지낸 사직당은 일제에 의해 사라졌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성황당은 아직도 어렵지 않게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신당은 '미신'이라는 서양종교적 관점과 산업화 과학화의 틈바구니에서 아직도 흔적이나마 남아 있는 창원시의 신당을 찾아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했던 선조들의 구복문화를 주1회 소개한다. [창원=강창원 기자]

[창원=뉴스프리존] 강창원 기자=창원이라는 도시는 본래 해양을 끼고 발달한 해안도시이다. 지금은 많은 부분 육지처럼 보이지만 해양의 매립과 낙동강 둑을 쌓아 만들어진 땅이라 바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중에서도 창원의 동남쪽 끝에 위치한 연도(椽島)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육지에서 4km 떨어진 4면이 바다인 섬이었다. 지금은 거대한 매립으로 육지가 되었지만 지명은 아직도 연도(椽島)라는 섬으로 불린다. 

‘연도(椽島)’라는 이름은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처음 나온다. 이 섬의 주민들은 어업으로 소득이 높아서 ‘돈섬’ 또는 ‘쇠섬’으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ㅅ’음과 비슷한 ‘서까래 연’자를 써서 연도로 표기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연도의 면적은 76만 8천㎡이고 가장 높은 곳은 107m이다. 해안선이 1천264m인 연도는 동북쪽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암석 해안으로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아직도 섬의 중앙부에는 흰색의 무인등대가 건설되어 있어 인근 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옛 웅천현에 속한 연도는 어업과 수산·양식업이 잘 되는 곳 중 하나로 우리나라 피조개 양식의 보고였으며, 낚시꾼과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섬의 특성상 어업이 성할 수밖에 없고 바다라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들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예측하기 힘들다. 섬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연도 여자 상여소리’이다. 바다에 업을 하던 남자들이 배 사고로 죽어 상여를 매고 갈 남자가 없다 보니 결국 여자들이 상여를 매고 가는 한스런 전통이 ‘연도 여자 상여소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고 무사안일을 비는 신당(神堂)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연도신당(椽島神堂)은 섬 사람들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으로 탄생했으며 마을에서 가장 신성한 땅에 신당을 모셨다. 신당(神堂)은 웅천 연도동 211번지 마을 뒤쪽 해발 50m지점으로 위도 35°03'50"N 경도 128°46'02"E에 위치한다.

이곳 사람들은 신당(神堂)을 일러 당산, 당집, 당(堂) 등으로 부른다. 오랜 세월 동안 전해 오던 2그루의 신목(神木)이 죽자 주민들은 신당 주위에 소나무를 심고 훼손을 하면 당사자는 땅신이 화를 내어 재앙이 일어나는 동티(動土)가 나던지, 축을 맞는 등 사고를 보인다는 속설을 믿었다. 

현재 신항만공사로 인해 연도마을 주민들과 집들은 모두 철거하고 분교도 철거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가 되었다. 사람이 떠난 이후에도 이 땅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신당이지만 찾는 사람이 없어 점점 자연으로의 회귀가 시작되고 있다. 한때는 연도를 지키는 연도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았던 곳이고 아픔을 해소하던 신당은 우리 전통문화가 사라지듯이 그렇게 우리들의 생각에서 지워지고 있다.

민족의 혼이 놀던 연도신당이 이제 자연으로 회귀하는 모습/
민족의 혼이 놀던 연도신당이 이제 자연으로 회귀하는 모습/ⓒ강창원 기자

1967년 문교부 소속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제당조사질문지祭堂調査質問紙』의 내용에는 웅천연도분교(熊川椽島分校)에서 근무한 최차도崔且道(당시 36세)씨의 기록을 보니 신당의 이름은 당산堂山이며, 마을 동편 당산 정상에 위치하고 남향南向이라 했는데 방문해보니 동향東向이다. 신당의 외형은 4평 정도의 시멘트블럭 담장을 둘렀고 신당은 1.5평 규모인데 기와를 입혔다. 기와의 모습을 보니 새로 단장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신당 내부의 정면에는 신주 집이 조그마하게 만들어져있고 그 속에 신패(神牌)가 있는데 「당산신위(堂山神位)」라 적혀 있다. 신패 앞 제단 위에는 스텐촛대가 좌우에 있고, 자기향로가 중앙에 있으며 그 안쪽으로 스텐 제기 3쌍이 놓여 있다. 제단 아래 구석에는 각종 제기들이 있으며 얼마 전까지 제례를 올린 흔적이 남아있다.
예전에 제주(祭主)는 30대 이상의 부정 없는 부부를 마을에서 엄선하고 제주는 매일 우물에서 목욕하고 정성을 드리고 부정한 것은 보지 않으며 임산부나 해산녀는 마을 밖으로 출타를 했다. 제례는 정월 15일 오전 8시~오후 2시까지 했으며 일주일 전부터 타인은 제주의 집에 출입을 금했다. 제물(祭物)의 상차림으로 술(酒) 흰떡(白餠) 쌀밥(白飯) 과실(果實) 소채나물 등이었으며 마을 주민들이 헌납하는 금전으로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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