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論(64) 망국의 군주, 충정의 장수

군주가 소인배(小人輩)면 간신이 발호하고 충신은 결국 죽게 된다.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황태극(皇太極)이 황위를 이어 청 왕조를 세웠다. 황태극은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물게 뛰어난 재능과 모략을 겸비한 황제였다. 그는 잠시 영원성 대신 조선(朝鮮)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로는 명과 청 왕조 모두 휴전하고 각자 전열을 가담을 시간이 필요했다. 명군은 성을 축조하고 병사들을 훈련 시켜야 했고, 청군은 조선을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함으로써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해야 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원숭환은 황태극에게 화친을 제의했고 황태극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명의 황제와 조정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만청이 줄곧 중원의 속국이었으니 황태극은 절대로 화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황태극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을 침략했고 원숭환은 성을 축조하고 금주 중좌와 대능하, 소능하 등지에 방어선 구축 공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했다. 조선이 너무 빨리 투항해버리면 명군도 요동으로 돌아가 청군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황태극은 조선을 침공해 커다란 승리를 거두면서 막대한 재물을 손에 넣었고 안정된 정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숭환이 성을 보수하고 군마를 훈련 시키면서 세력이 갈수록 강대해지는 것을 보고는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휴전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1627년, 마침내 황태극은 대군을 이끌고 요서 지방의 명군 진영들을 공격하여 대능하와 소능하를 함락시키고 이어서 금주를 공격했다. 5월 11일에서 6월 4일 사이에 장군 조솔교(趙率敎)가 병력을 지휘하여 황태극의 군대에 맞서 결전 끝에 참패를 당했지만, 금주를 빼앗기진 않았다. 황태극은 금주 공략이 여의치 않자 영원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숭환은 철저한 방비로 대응했고 양군이 대치한 가운데 벌어진 이틀 동안의 격전으로 쌍방이 모두 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영원성을 함락시키진 못했다. 황태극은 다시 금주를 공격했지만, 성의 수비가 견고하여 청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도 금주를 손에 넣지 못했다. 마침 폭염까지 겹쳐 병사들이 지독한 열사병에 시달리고 사기가 크게 떨어지자 황태극은 어쩔 수 없이 심양으로 철군했다.

금주 전투에서 명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원숭환은 한 단계 승진했을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원숭환이 위충현과 같은 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숭환이 진사에 합격했을 때 주고(主考-과거시험의 최고 심사위원)였던 스승과 그를 요동 수비에 추천했던 사람은 모두 동림당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영원대첩과 금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어도 위충현의 호감을 사지 못했다. 오히려 위충현은 원숭환의 기세가 갈수록 커지는 것을 보고 사당을 동원하여 금주를 구하지 못한 것이 원숭환의 실책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원숭환은 사직하고 고향인 광동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해 8월, 목공예에 심취해 살던 희종황제가 사망하자 후사가 없어 친동생 주유검(朱由檢)이 황위를 이어받고 연호를 숭정(崇禎)이라 했다. 당시 숭정황제의 나이 겨우 열일곱 살이었지만 매우 총명하고 능력이 뛰어나 형과는 크게 다른 풍모를 보였다. 그는 겉으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하게 엄당을 제거한 후 위충현을 자살로 몰아갔고 조정의 모든 독소를 교묘한 방법으로 해소해 나갔다. 위충현이 죽자 그에게 아첨하며 몸을 보전하던 신하들은 모두 주살되거나 군대로 충원되었고, 위충현으로부터 배척당했던 원숭환이 다시 기용되었다.

1628년 7월, 숭정은 낙향했던 원숭환을 불러 요동의 수비에 관해 물었다. 이 대화를 통해 숭정은 원숭환을 신뢰하고 따르게 되었다. 원숭환은 숭정에게 군량과 마초를 충분히 보급해주고 일체의 간섭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면서 구체적인 요동 수비의 책략과 원칙을 제시했고 숭정은 그의 제안과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숭정은 원숭환에게 보검 한 자루를 하사함으로써 그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표하고 요동을 잘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원숭환이 도착하기 전에 요동에서 병란이 일어났다. 원인은 간단했다. 군대에 군량이 부족했다. 당시 중앙이 잠시 무력해진 틈을 타 각급 관원들과 지주들이 재물을 훔쳐 가버려서 국고가 텅텅 비고 군량을 지급할 재원이 없었다. 원숭환은 즉시 황실의 재산을 이용하여 군량을 지급할 것을 건의했지만 재물을 목숨처럼 여기는 숭정황제는 몹시 화를 내면서 원숭환에 대한 태도를 바꿔 더, 이상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원숭환은 피도 대장 모문용(毛文龍)을 주살함으로써 또다시 숭정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피도는 요동 동남 해안의 작은 섬으로, 북으로는 청과 통하고 동으로는 조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교동반도의 봉래와 등주를 방어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모문용은 일찍이 청에 대한 항전에서 공을 세운 바 있으나 위충현의 양아들이 되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청의 황태극에게 산해관을 양보하는 대신 자기에게 산동을 때어달라는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

원숭환은 요동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드러나지 않는 화근을 제거한다는 생각으로 숭정 2년(1623) 7웡, 병사들을 매복시켜 모문용을 체포한 다음, 그의 죄상 열두 가지를 공개하고 보검을 뽑아 주살했다. 원숭환이 모문용을 죽인 원인과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자 숭정은 몹시 놀라며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했지만 당시로 서는 원숭환의 능력에 의지하여 청군을 막아내고 있던 터라 별다른 문책을 하지 못했다.

청의 황태극은 명과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이 역부족임을 깨닫고 줄곧 화친을 요구했지만 오만한 숭정황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숭환이 중간에서 조정에 나섰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러다가 1629년 11월, 황태극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명을 공격하여 원숭환이 주둔하고 있던 영원을 격파하고, 곧장 북경으로 향했다. 청군의 공격으로 장성과 준화가 함락당하자, 명군은 퇴각하기에 급급했다. 순무 왕원옹(王元雍)은 자살하고 산해관 총병 조솔교도 준화 성에서 전사했다. 준화를 손에 넣은 청군은 곧장 북경을 공격했다. 그러자 원숭환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지원했고 연도에 흩어져 있던 군사를 규합하여 청군의 퇴로를 막는 데 주력했다.

11월 10일, 원숭환이 계주에 도착했을 때 청군은 이미 계주를 포위하여 서진 중이었고, 이어서 삼하와 향하 등의 성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원숭환은 급히 북경으로 달려가 수도를 지키기 위해 북경광거문 밖에 진을 쳤다.

청군의 맹렬한 공격에 숭정황제는 혼비백산했고, 수도는 한순간에 혼란에 빠졌다. 원숭환이 도착하자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힌 숭정은 그를 크게 치하했지만, 전투에 지친 군사들을 성안에 들이지 않았다. 여전히 원숭환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숭정은 병력을 외성에 주둔시켜달라는 요구마저 받아들이지 않고 청군과의 결전만을 강요했다.

원숭환은 군사들이 몹시 지쳐 있음을 알고도 숭정황제의 재촉 때문에 교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부상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달려가 격전을 벌인 원숭환은 청군을 남해자 근처까지 내모는 대, 성공했다. 하지만 청군이 아직 멀리 퇴각하지 않은 것을 본 숭정황제는 이들을 추격하여 섬멸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 명군에는 여러 지대의 부대가 남아 있었고 원숭환의 지휘권, 하에 있었지만 아직은 힘을 모울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 밖으로 나가 결전을 벌일, 경우 청군은 배수진을 치고 달려들 것이 분명하기에 북경성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숭정은 원숭환을 의심하여 그의 병권이 막강해질 경우 자신을 제압하고 정권을 빼앗으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청 군대는 성 밖에서 대대적인 약탈과 폭행을 일삼으며 백성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었다. 태감들은 대부분 수도에 땅과 집을 갖고 있어 자신들의 재산이 파괴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들은 이러한 불안을 원숭환에게 풀어버리기로 마음먹고 원숭환이 청군을 끌어드려 황제에게 화친을 강요하고 있다고 억지 주장을 했다. 이러한 여론은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고 모두 원숭환을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북경성 문에 올라가 원숭환을 매도하는 고함을 지르며 아래쪽에 있던 원숭환의 병사들에게 돌을 던져 부상을 입히는 일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숭정황제의 의심과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청의 황태극은 음모를 꾸몄다.

얼마 전 청군은 명의 황궁에서 파견된 말 사육을 전담하던 태감 두 명을 사로 잡았다. 한 명은 양춘(楊春)이고 다른 한 명은 왕성덕(王成德)이었는데, 황태극은 철수하면서 부장 고명중(高鳴中)과 참장 포승선(鮑承先), 영완성(寧完成) 등을 시켜 이들을 지키게 했다. 이들은 청군에 귀순한 한족 장수들이었다. 저녁이 되자 포승선과 영완성은 황태극이 지시한 밀계에 따라 포로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자네 아나? 이번에 철군한 것은 다 작전이 있어서야. 황태극께서 혼자 말을 몰고 적진에 들어가 밀약을 맺고 왔거든. 황태극과 원숭환 사이에 밀약이 맺어졌으니 조만간 대사가 이루어질 걸세.”

두 명의 태감은 자는 척하면서 모두 듣고 있었다. 다음날 양춘은 적군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도망쳤고 자신이 들은 얘기를 곧장 숭정황제에게 보고했다. 숭정은 양춘의 보고를 그대로 믿고 즉시 원숭환을 궁으로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옥에 가둬버렸다. 원숭환의 부하장수들은 사태의 추이를 몰라 성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사흘 후에 황제의 뜻이 전해졌다. 원숭환이 적과 내통하여 모반을 계획했기 때문에 그에게 죄를 묻되 다른 사람들은 문책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에 병사들은 몹시 분통해, 하며 울음을 터뜨렸고 심지어 황제를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었다. 저대수도 비분에 젖어 병력을 인솔하여 금주로 돌아가 버렸다.

저대수가 가버리자 숭정황제는 청군이 다시 공격해올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저대수를 다시 오도록 원숭환에게 편지를 쓰게 하는 한편, 관리들을 보내 설득하기 시작했다. 원숭환은 여러, 대신들의 권고에 못 이겨 국가가 몹시 위중한 상태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저대수는 숭정이 보낸 사자를 적으로 생각하고 죽이려 했으나 그가 내민 원숭환의 친필 서한을 보고는 검을 내려놓았다. 그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저대수의 모친이 말했다.

“네가 회군하면 원장군의 죄만 중가 시킬 뿐이다. 차라리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일부 지방을 탈환하고 승리를 거둔다면 원장군을 감옥에서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대수는 모친의 말에 따라 병력을 이끌고 나가 청군이 점령하고 있는 두 개의 성지를 탈환하고 청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한편 황태극은 원숭환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그는 이미 북경 이남 20리 지점에 있는 양향을 점령했고 곧장 노구교를 공격하여 거군(車軍)을 격파했으며 4만의 명군을 대파하고 우두머리급 장수들을 생포하거나 사살함으로써 북경을 불안에 떨게 했다. 그러나 저대수가 회군한다는 소식에 퇴로가 차단될 것이 두려워 화친을 제안하는 한편, 산해관을 통해 서서히 병력을 철수했다.

청군이 물러가자 숭정은 다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기 시작했다. 이때 많은, 신하들과 장수들이 원숭환의 구명을 위한 상소를 올렸고, 손승종도 원숭환을 위한 시문을 바쳤다. 자기가 대신 처벌을 받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숭환은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부하들이 안심하고 청군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독려했고, 반년 후에 명군은 무사히 청군을 장성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반년 동안 원숭환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형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당분간 그를 살려두었다가 청군이 완전히 물러간 다음에 능지처참한다는 것이었다. 적군의 이간질에 속아 무고한 원숭환을 처형하고 그를 ‘민족의 반역자’로 증오하도록 민심을 호도한 것은 숭정황제의 소심하면서도 완고한 성격의 소치였다.

한편 원숭환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된 것도 자신을 보호하는 데 무능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지킬 줄 아는 것이 개인의 신상과 이익을 지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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