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반세기 걸친 서민 코스프레에 종지부가 찍히다

“아버지 경비 하시고, 어머니 까막눈이시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의 여파로 조기 대선이 치러진 2017년 5월의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본 투표일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서울시 노원구에 거주하고 있던 나는 월계동 길거리에서 위와 같은 취지의 내용이 적힌 자유한국당의 선거 현수막을 발견하고서 얼굴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현수막에 기재된 문구가 필자가 평소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더해 종이책에까지 썼던 아래의 구절을 너무나 쏙 빼닮은 탓이었다.

사진: 윤재옥 원내대표와 면담 마치고 기자 질문받는 홍준표 대구시장 = 홍준표 대구시장이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와 면담을 마친 후 국회를 떠나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 윤재옥 원내대표와 면담 마치고 기자 질문받는 홍준표 대구시장 = 홍준표 대구시장이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와 면담을 마친 후 국회를 떠나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아버님 주방에서 닭 튀기시고, 어머님 홀에서 서빙하시고.”

나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선거캠프가 자행한 공공연한 표절 행위를 문제 삼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잠깐 들었다가 곧장 마음을 접었다. 별의별 희한한 사건이 다 일어나기 마련일 긴박하게 돌아가는 대선정국에서 내 항의에 귀를 기울여줄 사람도 없을뿐더러 나는 그 무렵까지는 홍준표에게 비교적 우호적 입장이었다. 홍준표의 찢어지게 가난한 출신 성분과 여느 정치인들로부터는 찾기 어려운 투박한 서민적 감수성은 나에게 일종의 동지의식이 뒤섞인 동병상련의 감정을 수시로 촉발시켜온 터였다.

대한민국 제도정치권의 보수 계열 정당에서 서민 코드로 단연 크게 톡톡히 재미를 봐온 사람을 들자면 홍준표 현 대구광역시장은 자연스럽게 첫손가락에 들어갈 인물이다. 그가 대중을 상대로 선전하는 구구절절한 개인적 서사는 거의 항상 자신이 얼마나 못 먹고, 못 입고, 불편한 잠자리를 전전하며 성장했는지로 시작되기 일쑤였다. 지독한 빈곤으로 점철된 구슬픈 인생사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홍준표의 자랑이자 상징일 ‘모래시계 검사’ 신화는 파도 몰아치는 해변에 얼기설기 쌓은 모래성처럼 진즉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을지 모른다.

“아버지 골프 치시고, 어머니 은행원 하시고.”

만에 하나 홍준표 대구시장의 자제들 가운데 한 명이 부친의 대를 이어 현실정치에 뛰어든다면 그는 본인의 가정환경을 이처럼 소개해야만 할 성싶다. 홍 시장이 참여정부 집권 시기에 삼일절 골프로 국무총리직에서 불명예 퇴진한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버금가게 골프를 사랑하는 것으로 바야흐로 밝혀지고 있는 이유에서이다.

전 지구를 강타하는 중인 극심한 기상 이변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곳곳이 물난리를 겪고 있다. 이름조차 생소한 ‘극한 호우’가 초래한 홍수로 인해 무수한 인명이 안타깝게 희생된 상황이다. 그런데 수해가 나라를 덮친 와중에 홍준표 대구시장이 한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굵은 빗줄기처럼 거세게 퍼부어지고 있다.

홍준표 시장은 자기는 일과가 전부 끝난 후에 골프를 쳤다고 항변하며 공무원들에게도 자유로운 휴식시간이 보장돼야 한다고 되레 역공에 나섰다.

홍준표의 주장은 형식논리상으로는 일견 타당할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 국민정서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용납되기 힘든 말이다. 나는 홍준표가 나름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그는 주말에 자비로 골프를 쳤기 때문이다. 문제는 검사복을 벗고 직업정치인으로 변신한 홍준표가 치밀한 논리가 아닌 원초적 감성을 앞세워 승승장구해왔다는 데 있다.

더욱이 홍준표는 주4일 근무제가 도입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 어느 젊은 공무원에게 그렇게 쉬고 싶으면 다른 직장을 알아보라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면박을 주었다. 홍 시장의 논리대로라면, 민심의 눈총과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언제든 골프를 치고 싶어 하는 홍 시장부터 당장 공직 이외의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맞을 것이다.

홍준표 시장이 언제부터 그토록 근무시간과 여가시간을 엄밀하게 구분했는지는 수수께끼다. 확실한 부분은 과거의 홍준표와 달리 지금의 홍준표는 ‘자기 자신’의 웰빙을 무척이나 중시하는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홍준표 시장은 다음번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전에 참여할 것이 유력시된다. 그래서 홍준표에게 진지하게 제안 겸 조언하는 바이다. 홍 시장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사이에만 선거운동을 하라는 거다. 점심시간에는 당연히 푹 쉬시고.

부탁할 사항이 한 가지 또 있다. 홍 시장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서민계급에서 중산층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 부유층으로 신분상승을 이뤘음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서민의 범주 안에 무리하게 욱여넣으려는 짓을 이제는 양심적으로 멈춰주시기 바란다. 서민도 아닌 사람이 서민을 자처하면 이는 한마디로 사기극이다.

홍준표는 대통령 선거 유세를 벌이면서 “서민들의 꿈은 오직 내 자식 잘되는 것”이라고 역설했었다. 전적으로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 자식 잘되는 게 중요한 서민들도 나중에 내 자식이 수많은 이웃이 목숨 잃고, 재산 잃는 지경에서마저 여유롭게 골프장에서 “나이스 샷!” 외치며 골프채 휘두르는 광경을 꿈꾸지는 않는 법이다. 남들 가슴에 대못 박으며 나 혼자 떵떵거리면서 잘살 바에는 하루 밥 세 끼 거르지 않는 정도의 소박한 삶에 만족했던 이들이 착하디착하고, 순하디순한 우리네 대다수 평범한 서민가정의 부모님들이었기 때문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자택이 자리한 잠실의 아시아선수촌 아파트가 재건축 공사의 첫 관문인 안전진단을 통과한 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글을 마치련다. 재물복을 타고난 인간은 밉상으로 낙인이 찍혀도 재산이 증식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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